코로나에 울던 손님 위해 드럼 친 호프집 사장님 "죽는 날까지 스틱 안 놓을래요"

권정현 2024. 4. 24.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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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 호프집 '꼬꼬방' 기채옥 사장 인터뷰]
코로나19 대유행 때 손님 위로하려 드럼 연주 
"내가 즐겁자고 시작한 음악, 이제 봉사가 돼"
4일 기채옥씨가 서울 종로구 호프집 '꼬꼬방'에서 가수 김태우의 '사랑비'에 맞춰 드럼 연주를 하고 있다. 왕태석 선임기자

“힘들었던 하루, 사장님 덕에 스트레스 다 날아갔어요!”

서울 종로구 세운상가 옆 골목길에서는 저녁마다 흥겨운 드럼 소리가 울려 퍼진다. 소리를 따라가다 보면 건물 2층에 있는 테이블 10개 남짓한 작은 호프집 ‘꼬꼬방’이 나온다. 특별한 것 없어 보이지만 평일 오후 6시면 대기줄이 좁은 골목길을 한 바퀴 두를 만큼 ‘핫플레이스’가 된 지 오래다. 드럼 소리의 주인공은 이 가게 사장인 기채옥(61)씨. 손님들 사이에선 ‘사장님이 드럼 치는 호프집’으로 유명한 곳이다.

기씨는 보통 오후 7시에서 8시 사이에 드럼 연주를 한다. 정해진 곡은 없다. 이글스의 ‘호텔캘리포니아’부터 김태우의 ‘사랑비’까지, 그날그날 기씨의 ‘느낌’에 따라 선곡한다. 무아지경으로 드럼을 치는 그의 모습에 손님들 입에서 감탄이 나왔다. 노래가 하이라이트에 이르자 드럼 박자에 맞춰 일제히 박수가 터졌다.


'음악신동' 57세에 드럼 스틱 들다

기씨가 가게에서 드럼 연주를 하며 한국일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왕태석 선임기자

기씨가 드럼 스틱을 들기 시작한 건 코로나19가 한창이던 2020년이다. 하필 다른 곳에서 장사를 하다가 세운상가 쪽으로 가게를 옮긴 직후 코로나19가 터졌다. 기씨뿐 아니라 인근 자영업자들 모두 매출이 줄어 힘든 시간을 겪었다. 꼬꼬방을 찾는 손님들도 마찬가지였다. 하루가 멀다 하고 그들의 입에서 “죽고 싶다“ “망했다“ “어떻게 사느냐” 등 한탄이 쏟아졌다. 소주를 마시며 우는 손님들의 마음을 달래주고 싶어 기씨는 드럼을 시작했다. 그는 “드럼 소리에 잠시나마 웃음 짓는 손님들의 모습이 열정적으로 드럼을 칠 수 있는 원동력이었다”고 미소 지었다.

드럼 연주는 기씨의 오랜 꿈과도 무관치 않다. 그는 초등학교 때부터 음악 대회에서 상을 휩쓸고 방송국에서도 찾아올 만큼 ‘노래 신동’으로 유명했다. 그러나 한문 교사인 아버지는 “딴따라(연예인을 낮잡아 부르던 말)가 웬 말이냐”며 가수를 반대했다. 마음 한편에 늘 음악을 품고 살던 기씨는 6년 전 가장 친한 친구가 사고로 죽고 난 뒤 남은 인생은 후회 없이 살아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는 “음악을 하지 않겠다는 아버지와의 약속을 지키며 살았지만 이제 나를 위해 뭔가 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렇게 집 안 구석에 묵혀 있던 기타의 먼지를 조심스레 털어냈다. 취미로 기타를 치던 기씨는 손님 소개로 거리 공연을 하기 시작했고, 드럼도 이때 배웠다.


사기당해 바닥 주저앉았다가 재기

활짝 웃으며 드럼을 치고 있는 기채옥씨. 그는 "단 한 명의 손님이라도 내 음악을 듣고 따뜻함을 느낄 수 있다면, 죽는 순간까지 가게에서 손님을 위해 드럼을 치겠다"고 했다. 왕태석 선임기자

기씨 연주가 손님들의 마음을 울리는 건 ‘위로’와 ‘교감’이 있어서일 것이다. 그렇다고 손님만 위로받는 건 아니다. 음악은 기씨에게도 위로가 된다.

사실 기씨 역시 자영업자로 자리 잡기까지 우여곡절이 적잖았다. 그는 남편의 잦은 도박과 사업 실패 탓에 27년 전 처음 장사에 뛰어들며 실질적인 가장이 됐다. 경기 광명시 조그마한 치킨집이 세 자녀를 포함한 다섯 식구의 전부였다. 장사는 잘됐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시련이 찾아왔다. 3년 동안 한 푼 두 푼 모은 돈을 친구에게 빌려줬다가 떼이고 만 것이다. 기씨는 나쁜 생각을 품고 비통한 심정으로 고향을 찾았다. 그러나 그가 16세 때 돌아가신 아버지 산소를 방문하며 마음을 바꿨다. 그는 “산소 앞에서 마지막 인사를 하며 아버지 역시 가정을 이끄느라 많은 고통을 감내하셨음을 깨달았다”며 “아무리 힘들더라도 자식들을 위해 일어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떠올렸다. 그 길로 서울로 돌아와 남편과 헤어졌고 동묘 인근에 새로 호프집을 열어 재기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기씨는 장사 시작 후 지금까지 30년 가까이 꾸준히 기부 활동을 하고 있는데 이 역시 바닥까지 주저앉았다가 일어선 경험이 밑바탕이 됐다.

가게 입구에서 드럼 채를 쥔 채 포즈를 취한 기채옥씨. 왕태석 선임기자

드럼 연주를 시작한 지 7년째. 장사하랴 드럼치랴 손가락부터 팔꿈치까지 성한 곳 없지만 그래도 파스까지 붙여가며 연주하는 그는 “멀리서 찾아오는 분들을 위해 드럼을 치다 보면 아픔도 잊을 정도로 보람차다”고 했다. 이어 “내가 즐겁자고 시작한 음악이 이제는 봉사가 되었다”고 활짝 웃었다.

“단 한 분이라도 제 음악을 듣고 따뜻함을 느낄 수 있다면, 죽는 순간까지 꼬꼬방에서 손님을 위해 드럼을 칠 겁니다.”

권정현 기자 hhhy@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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