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미술 핵심 ‘아이러니’… 에로틱한 공간엔 푸른빛

신정선 기자 2024. 4. 24. 03:03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K콘텐츠 승부사들] [21] 영화미술감독 류성희

그가 터치한 영화는 벽지로도 이야기를 전달한다. 영화 ‘헤어질 결심’의 물결무늬 주방이 그랬다. ‘올드보이’의 펜트하우스, ‘살인의 추억’의 경찰서, ‘달콤한 인생’의 스카이라운지는 한국 영화 미술의 진화된 상상력을 증명하는 상징적인 공간으로 꼽힌다. 모두 류성희(56) 미술감독의 작품이다. ‘박찬욱의 ‘박쥐’ ‘아가씨’, 봉준호의 ‘괴물’ ‘마더’ 등이 그의 감각에서 태어났다. 최근에는 넷플릭스 ‘마스크 걸’도 맡았다. 서울 서대문구 사무실에서 만난 류 감독은 “미술감독은 감독의 뇌 구조에 맞는 지도를 만드는 사람”이라며 “해독이 어려워 보이는 지도에 질서를 부여해 관객 감정의 내비게이션이 될 수 있도록 작업한다”고 말했다.

류성희 미술감독의 서울 서대문구 사무실 한쪽 벽에는 재래시장 포목점을 그대로 옮겨온 듯 색색가지 옷감이 층층이 쌓여 있다. /장련성 기자

미술감독은 영화에 드러나는 모든 시각 요소를 총괄하는 디자이너다. 세트, 의상, 분장, 소품 전반을 설계하고 책임진다. 류 감독은 홍익대 도예학과를 졸업하고 미국영화연구소(AFI)에서 프로덕션 디자인을 공부했다. “도자기처럼 고여 있는 공간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을 담는 스토리텔링이 하고 싶어서 영화로 방향을 틀었다”고 했다. 프로덕션 디자인 개념은 미국에선 1939년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감독 빅터 플레밍)부터 본격적으로 쓰였다. 한국 영화계에서 그 위상이 확연히 올라간 것은 2000년대 이후다. 그 한가운데에 류 감독이 있다. 류 감독은 2016년 박찬욱의 영화 ‘아가씨’로 칸 영화제에서 한국인 최초로 벌칸상을 받았다. 촬영·편집·미술·음향 부문에서 그해 가장 뛰어난 영화인에게 수여하는 상이다.

류 감독이 “제 모든 걸 걸었던 작품”이라고 꼽는 영화가 있다. 박찬욱의 ‘올드보이'다. “시나리오를 읽자마자 생각했어요. ‘이런 건 우리나라에 없었어, 이 세상에 없었어, 반드시 이것만을 위한 세계를 만들고 싶어'라고요.” 20년 전 ‘올드보이’는 지나치게 극단적이라고 받아들여질 만한 이야기였다. 류 감독은 “뜨겁게 들끓는 영화를 불쾌하지 않게 전하는 방법을 고민했다”고 했다.

비결은 아이러니에 있다. 특히 ‘류성희표 디자인’의 인장(印章)과 같은 벽지 디자인에서 두드러진다. 벽지 무늬가 강렬할 땐 차가운 색, 무늬가 차가울 땐 강렬한 색을 써서 양쪽의 힘을 충돌시킨다. ‘올드보이’ 감금방은 뜨거운 색감을 누르는 기하학 문양이었다. ‘아가씨’의 주인공 히데코와 숙희가 사랑에 빠지는 공간은 에로틱한 무늬의 열기를 지그시 가라앉히는 푸른빛 벽지였다. ‘헤어질 결심’ 서래의 집 벽지는 감정의 파동을 물결 문양에 담았다. 녹음기를 통해 전해지던 두 주인공의 목소리처럼 떨림과 울림이 느껴진다. 사진작가이기도 한 박찬욱 감독이 색감에 예민해 여러 번 숙고를 거친 끝에 애초의 안온한 하늘색을 버리고 다소 어두운 푸른 빛으로 결정됐다.

그는 “박찬욱 감독과는 영화적 지향점이 같아 작업할 때마다 감사하다”고 말했다. 똑같은 것, 반복되는 것, 누구나 다 하는 걸 싫어한다는 공통점을 들었다. 봉준호 감독도 마찬가지. 봉 감독은 ‘살인의 추억’에서 “그 이야기이기 때문에 그 경찰서여야만 하는, 고유한 경찰서를 만들어야 한다”며 “깊은 우물의 느낌을 내달라”고 주문했다. 류 감독은 우물 느낌을 내기 위해 경찰서 지하 취조실의 층고를 높여 최대한 명암이 드러나도록 했다. “영화 작업을 하나의 여행이라고 한다면 목적지까지 가는 여정은 매번 달라야 하는 거죠. 항상 고유해야 한다는 고집이 영화를 전보다 나아지게 하는 거 아닐까요.”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