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면의 악과 싸우는 줄리엣… 지금 젊은이들 이야기

이태훈 기자 2024. 4. 24.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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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만의 ‘로미오와 줄리엣’ 내한… 혁신적 英 안무가 매튜 본 인터뷰

첫눈에 반하는 사랑, 반목하는 가문 사이의 비극, 죽음도 갈라놓지 못하는 순애보. 셰익스피어의 여러 작품 중에서도 ‘로미오와 줄리엣’은 어쩌면 지금 시대와 가장 동떨어진 이야기. 하지만 그걸 재해석해 무대에 올리는 사람이 영국 안무가 매슈 본(64)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서사는 남아 있지만 셰익스피어의 대사들은 이미 사라진 것과 같죠. 오히려 셰익스피어 작품에서 셰익스피어를 들어내는 작업을 하고 있다고 할 수도 있겠네요.” 매슈 본은 다음 달 8일부터 강서구 LG아트센터 서울에서 개막하는 ‘로미오와 줄리엣’ 공연을 앞두고 서면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무용은 비대중적이라는 고정관념을 깨뜨려온 안무가 매튜 본의 '로미오와 줄리엣' 공연 장면. 인종에 구애받지 않는 캐스팅은 최근 세계 공연계의 흐름으로, 주역 로미오와 줄리엣을 포함한 모든 역할을 백인 뿐 아니라 남미계, 흑인 등 다양한 인종의 젊은 무용수들이 연기한다. /사진가 존 페르손

순백의 발레리나들 대신 조각 같은 상반신을 드러낸 남자 무용수 군무로 세계를 충격에 빠뜨렸던 ‘백조의 호수’를 만든 바로 그 사람. 2003년 첫 내한 이후 여덟 차례 한국 공연에서 우리 관객 15만명이 그의 작품들과 사랑에 빠졌다. “저는 공연 책자에 줄거리를 넣지 않습니다. 공연은 미리 공부해야 이해할 수 있는 비밀 언어로 쓰여진 무언가가 아닙니다. 관객은 그저 자신의 본능을 믿고 이야기를 따라가기만 하면 됩니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오페라, 발레, 영화, 연극 등 여러 장르에서 다양하게 변주돼온 고전. 어떻게 다시 새롭게 만들 것인가. 본은 “해답은 간단했다. 젊은 무용수와 창작자들의 말에 귀 기울이고, 그들의 재능과 시각에서 영감을 얻어야 했다. 새로운 세대에 의한, 그들을 위한, 그들에 관한 이야기”라고 했다.

작품의 무대는 마치 SF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보인다. 시대 배경은 가까운 미래, 장소는 ‘베로나 인스티튜트’라 불리는 정체불명의 시설. “젊은이들은 감금된 것처럼 보입니다. 소년원이나 감옥일까요? 학교나 병원? 잔혹한 사회 실험이 벌어지는 비밀스러운 시설일까요? 그들을 창피하게 여기는 부모들이 보낸 것은 아닐까요?” 본은 “어쩌면 이 청년들이 갇힌 이유는 사회가 장려하는 가치에 순응하지 않아서일 수 있다. 사회가 문제아로 분류한 청년들이 자신들을 교정하려는 곳에서 운명의 소용돌이에 휩쓸리기 시작하는 것”이라고 했다.

본은 “현대의 관객들에게 공감대를 얻기 위해서 나는 항상 이야기를 새로운 방식으로 전달하는 방법을 찾아 왔다”고도 했다. “줄리엣은 남자의 구원을 기다리는 가녀린 소녀가 아니라 자신 안의 악마와 싸우는 강한 여자입니다. 경험이 부족하고 별난 로미오, 감정적 깊이가 있는 악당도 등장하지요.”

이번 작품 역시 우울증, 학대, 성 정체성 등 젊은 세대가 마주한 문제들과 정면으로 맞닥뜨린다. 본은 “고전을 통해서도 현대적이며 심각한 주제를 정직하게 다루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줄리엣이 통과하는 참혹한 시련에 놀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회피해선 안 되죠. 해피엔딩이 아니어도 놀라지 마세요. 추하고, 유혈이 낭자하고, 원초적이고, 이전의 그 어떤 버전보다 비극적 결말이 될지도 모릅니다.” 2019년 런던 초연 때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무용의 젊은 세대가 무대에 지진을 일으키는 듯하다”고 평했다.

로미오와 줄리엣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 유명한 발코니 장면 역시 “무용 역사상 가장 긴 키스 신”(영국 텔레그래프)이자 “위대한 발코니 장면에 버금가는 강렬함을 선사한다”(뉴욕타임스)는 찬사를 받은 명장면으로 다시 태어났다. “젊은 사람들이 사랑에 빠질 때는 매우 강렬하며 서로를 떼어놓을 수 없죠. 첫사랑은 때로 어색하고, 탐구와 발견의 흥분으로 가득합니다. 저는 그 젊은 감정과 흥분을 포착해 관객들이 떠올리게 하고 싶었습니다. 서로에게서 한순간도 손을 떼지 못하고 끝없이 서로를 더듬으며 첫 키스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둘 모두 영원히 끝나길 원치 않는 그런 순간, 관객들 모두가 간직한 그런 청춘기의 추억을 포착하고 싶었습니다.” 3만~14만원, 공연은 다음 달 19일까지.

☞매튜 본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이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안무가’라고 부른 영국의 무용가. 영화·뮤지컬 ‘빌리 엘리어트’의 마지막 장면에 등장하는 근육질 남성 백조들의 군무로 유명한 ‘백조의 호수’(1996)로 세계적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영국 공연계 최고 권위의 상인 로런스 올리비에상을 9번 받은 역대 최다 수상자이기도 하다. 2016년 현대무용가 최초로 영국 왕실 기사 작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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