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배의 ‘뉴욕의 한인 셰프’] [9] 돌솥비빔밥서 힌트 ‘누룽지 푸아그라’… 한식을 ‘오트 퀴진’처럼
뉴욕 이스트 빌리지의 조용한 거리에 한식 맛집이 있다. 임수길(48) 셰프가 운영하는 ‘수길(Soogil)’이다. 한국의 대학에서 생물학을 전공했으나 늘 요리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그는 어느 날 길거리의 간판에서 보았던 배스킨라빈스(Baskin-Robbins) 아이스크림의 슬로건 “사람을 행복하게 해준다(Make People Happy)”에서 강한 영감을 받았다. 그러곤 다소 늦은 나이에 뉴욕의 미국요리학교 CIA로 유학을 떠났다. 2007년 졸업 후 뉴욕의 ‘다니엘(Daniel)’에서 7년, 이후 후니김 셰프의 ‘한잔’에서 4년간 셰프로 근무하다가 2018년 본인의 첫 레스토랑 ‘수길’을 오픈했다.
임 셰프가 근무하던 시기의 ‘다니엘’은 ‘장조지’ ‘르 베르나딘’과 함께 뉴욕의 3대 프렌치 레스토랑으로 꼽히던 미슐랭 쓰리스타 레스토랑이었다. 주방의 군기는 마치 사관학교 같아서 셰프를 제외하고는 앉지도 못하고 밥도 서서 먹어야 할 정도였다. 통풍이 걸릴 정도로 오랜 시간 서서 일을 했지만 묵묵히 탄탄한 저력을 쌓은 덕분에 서열 두번째인 수셰프(sous chef) 자리까지 올라갔다.
세계 최고의 음식 중 하나라는 프랑스의 오트 퀴진(Haute cuisine)을 연출하는 다니엘을 보면서 임 셰프는 부러움과 함께 스스로에게 “한식이 뭐지?” 하는 근본적인 질문을 했다. 당시에 일식은 전통의 자존심과 콘텐츠, 화려한 플레이팅으로 이미 세계화에 성공하였고, 많은 평론가가 프렌치 음식과 비교하면서 그 정교한 맛과 미적 연출에 극찬을 보낼 때였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한식을 프랑스 음식이나 일식처럼 예쁘고 매력적으로 보이게 할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을 했다.
그 과정에서 전통 스타일을 고수하는 것만이 아닌, 새로운 시대의 흐름과 고객의 감각에 맞도록 변형하고 새롭게 접근하는 사고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동시에 다니엘 셰프로부터 절대 지름길을 택하지 않고, 시간이 걸리고 조리 절차가 복잡하더라도 전통 방식을 고집하는 태도도 배웠다. 프랑스 요리는 소금, 후추 이외의 조미료를 쓰지 않기 때문에 깊은 맛, 감칠맛을 내려면 다량의 좋은 식재료로 오랜 시간 육수를 끓이고 소스를 만드는 방법밖에 없었다. 이를테면 오리를 가슴살만 발라내고 남은 부위를 통째로 끓여서 육수를 만들고, 여러 마리의 닭을 아낌없이 사용하면서 하루 종일 끓여 소량의 진액을 만드는 것 등이었다. 이런 과정을 지켜보고 배우면서, 시간을 두고 숙성된 장맛에 의존하는 한식과 일맥상통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거기서 배운 건 ‘시간’이 만드는 맛과 가치였다.
‘수길’을 오픈하면서 다니엘에서 배우고 깨달았던 창의성과 교훈을 유감없이 발휘할 수 있는 메뉴를 선보이고자 했다. 새로운 요리를 만들려면 친숙함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뉴요커들이 좋아하는 캐비아, 푸아그라, 송로버섯 등의 재료를 조연으로 사용하면서 한식의 기반이 되는 장과 김치 등의 요소가 이런 재료에 방해되지 않고 잘 스며들 수 있도록 연구를 했다. 또한 음식이 아름답게 표현되도록 접시 하나하나의 연출에도 많은 공을 들였다.
예를 들어 백김치와 사과를 잘게 썰어 잿방어 안에 넣고 둥글게 만 후 캐비아를 올린다. 이는 김치에서 오는 깊고 시원한 산미를 잘 살린, 경상도식 식당에서 신김치와 회를 같이 내어주는 것에서 영감을 받은 요리다. 돌솥비빔밥에서 힌트를 얻은 ‘누룽지 푸아그라’는 뜨거운 철판에 밥을 눌러 누룽지처럼 만들고 그 위에 방울양배추, 양파, 푸아그라를 얹고, 와인에 절인 배를 장식으로 얹는다. 그러곤 테이블에서 직접 지글지글한 철판위에 간장 소스를 부어준다. 프랑스인들은 보통 푸아그라를 단 과일이나 잼, 빵과 같이 먹는데, 푸아그라를 한식과 접목하는 접점을 빵과 잼 대신 밥과 간장에서 찾은 요리다. ‘수길’의 빈대떡, 아귀찜, 잡채를 맛본 뉴욕타임스의 레스토랑 평론가 피트 웰스(Pete Wells)는 “완벽하게 요리되지 않은 메뉴가 없다”라는 표현으로 평가를 대신했다.
‘수길’ 레스토랑의 인테리어는 전혀 화려하지 않다. 임 셰프도 날카로움과는 거리가 먼, 푸근한 동네 아저씨 같은 인상이다. 그래서 동네 밥집과 같은 음식을 기대했던 손님들은 그 정교함과 맛에 놀란다. 음식의 비주얼은 간결해 보이지만 그 깊이는 심오하다. 임 셰프의 음식은 서양인들에게 친숙한 음식의 맛과 형태, 서비스 방식을 제공하면서, 그 속에 한국의 재료와 맛, 그리고 한국의 깊이를 선사하고 있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정성스럽게 음식을 만들어 제공하는 것만큼 이타적인 행위는 많지 않다. 임 셰프는 레스토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이라고 늘 강조한다. 과거 다니엘에서 근무할 당시 몸이 아파서 출근을 하지 못하자 다니엘의 주방 직원들이 닭국을 끓여 집으로 배달해 준 경험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사람에 대한 중요성을 고객은 물론이고 직원들 하나하나를 배려하는 마음으로 실천하고 있다. 근래에는 높아진 한식의 위상 때문에 미국의 젊은 셰프들이 ‘수길’에서 일하려고 많이 지원한다고 한다. 한식의 배경이 없는 이들에게 하나씩 친절하게 우리 입맛을 가르치는 것도 임 셰프가 직접 챙기는 일이다.
임 셰프는 현재 뉴욕의 어퍼 이스트사이드에 ‘라온(Raon)’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한식당을 준비 중이다. ‘즐거운’이라는 뜻의 순우리말이다. 여기서는 좀 더 전통에 가까운 한식 코스에 배추김치, 동치미, 보김치와 같은 다양한 김치 요리가 코스에 스며들 수 있도록 아이디어를 구상 중이다. 사람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임 셰프의 새 ‘오트 퀴진(Haute cuisine·고급 요리)’ 프로젝트의 또 따른 성공을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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