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조종엽]한국인이 제일 어려워하는 일 ‘대화와 타협’

조종엽 논설위원 2024. 4. 23. 2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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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열하고, 타협하지 못하는 건 정말 한국인의 특성일까.

최근 일련의 뉴스에서 우리 사회가 가진 대화와 타협의 역량에 일찌감치 한계가 드러나는 일이 잦아서다.

그게 한국인의 민족성이라기보단 격동의 근현대사에서 극단적인 상황을 너무 많이 경험한 탓일 게다.

같은 공동체의 일원임을 잊고 산적한 과제 앞에서 함께 길을 잃을까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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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종엽 논설위원
분열하고, 타협하지 못하는 건 정말 한국인의 특성일까. 악의적 편견에 불과하지만 새삼 마음이 무겁다. 최근 일련의 뉴스에서 우리 사회가 가진 대화와 타협의 역량에 일찌감치 한계가 드러나는 일이 잦아서다.

침수 문제가 불거지고도 24년 동안 비만 오면 물에 잠기는 처지로 방치된 국보 반구대 암각화 문제만 해도 그렇다. 1970년 발견된 반구대 암각화는 동아시아를 대표하는 선사 유적이지만 앞서 건설된 울산 사연댐 탓에 침수를 반복하며 훼손돼 왔다. 학계가 대책 마련을 촉구한 2000년 이후에도 원형 보존을 둘러싼 이견, 예산 문제 등에 더해 대구·경북 지자체 간의 물 갈등까지 엮이면서 해결책을 내지 못했다. 사연댐의 수위를 낮추면 지자체 간에 도미노식으로 식수를 끌어와야 하는데 2009년 발암물질 낙동강 유출 사태로 대구와 구미가 물 분쟁을 벌이는 가운데 대책이 함께 표류했다. 정치권이 개입한 가변형 임시 물막이 설치는 수리 전문가들의 반대에도 추진했다가 실패하면서 아까운 시간만 버렸다. 최근 환경부가 사연댐에 수문을 설치하기로 했지만 식수 갈등은 여전히 잠재해 있는 실정이다.


‘힘 대 힘’ 갈등의 패자는 국민

재정안정론과 소득보장론이 팽팽한 국민연금 개혁 논의는 사실과 의견이 뒤섞여 혼란스럽다. 기금의 고갈 시기나 이후 가입자에게 약속한 급여를 지급하는 데 필요한 돈은 계산하면 나온다. 비교적 정해진 미래에 가깝다. 반면 고갈 뒤 부족액을 모두 가입자의 보험료로 충당할지, 재정을 투입할지, 자산소득에도 보험료를 부과할지 등은 가치 판단과 의사 결정의 영역이다. 두 영역이 뒤섞인 채 전문가들이 다투다가 지난해 8월엔 재정계산위원 2명이 사퇴하기까지 했다.

최근 일단락된 국회 공론화위 시민대표단 숙의토론회는 새로운 시도였음엔 틀림없다. 그러나 미래세대에 대한 대표성이 약한 시민 500명을 ‘대표단’이라고 부르기도, 이들 대상 설문조사 결과가 온전한 민의라고 보기도 어렵다. 토론회에 관련 참고 자료가 제대로 제공되지 않았다는 등의 뒷말까지 나오고 있다. 영국은 연금개혁 당시 전문가 보고서를 가지고 여러 차례 간담회와 많은 국민이 참여하는 토론회를 거친 뒤, 정리된 안을 가지고 다시 전국 각지를 돌며 간담회와 토론회를 열어 개혁안을 마련했다고 한다.

갈피를 못 잡는 의대 증원 문제는 갈등 관리 실패의 전범처럼 보인다. 지난해 정부와 대한의사협회의 대화는 견해차를 좁히지 못하고 평행선을 그렸다. 의정 대화를 사회적 협의체로 끌고 가는 등 새로운 방식의 공론화가 필요했지만 정부는 총선을 두 달 앞두고 ‘2000명 증원’을 전격 발표하면서 갈등을 폭발시켰다. 협상 상대에 대한 상호 존중도 찾기 어렵다. 의사 측은 시종일관 집단행동을 통해 힘으로 정부를 꺾을 심산이다. ‘정부는 의사를 이길 수 없다’더니 ‘원점 재검토’만 되풀이하며 의료개혁특위 참여마저 거부한다. 이런 전개에선 누가 이기건 국민은 패자가 될 공산이 크다.


타자 입장 생각 않으면 함께 길 잃을 것

“한국인은 너무 극단적이다. ‘끝장을 보자’ ‘너 죽고 나 죽자’는 말을 서슴없이 한다. 그래서 너무 무섭다.” 양서를 꾸준히 내 존경받았던 한 출판계 어른이 작고 전 사석에서 가끔 했던 말이다. 그게 한국인의 민족성이라기보단 격동의 근현대사에서 극단적인 상황을 너무 많이 경험한 탓일 게다. 이젠 사생결단식 소통을 넘어설 법도 한데, 최근 정치의 양극화와 맞물리며 대화와 타협은 더 어려워지는 것처럼 보인다. 독일 사회학자 위르겐 하버마스는 최근 책 ‘공론장의 새로운 구조변동’에 실린 인터뷰에서 공론장의 포용성을 강조했다. 토의엔 “타자의 관점을 취하고 그의 상황에 서서 생각”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같은 공동체의 일원임을 잊고 산적한 과제 앞에서 함께 길을 잃을까 두렵다.

조종엽 논설위원 jj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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