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 3세 안일함: FT가 꼽은 한국 경제 '무능력의 증거' [마켓톡톡]

한정연 기자 2024. 4. 23.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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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스쿠프 마켓톡톡
한국경제 꼬집은 FT
재벌 주도 성장의 장점
3세 시대 열리면서 단점 돼
도전 사라지고 안일함 흘러
이복현이 언급한 지배구조 평가
총수 사익 추구 방지책 포함될까

한국 경제의 기적은 끝났을까.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한국 경제를 사실상 이끌어온 재벌 주도 경제성장 모델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주요 재벌의 총수가 3세로 넘어가면서 성장이 아닌 현실에 안주하고 있고, 그게 한국 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다"고 꼬집었다. 정부가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책으로 내놓은 밸류업 프로그램을 다시 주목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인천신항 컨테이너 터미널 야적장 모습. [사진=뉴시스]

영국 경제매체 파이낸셜타임스(FT)가 한국 경제의 불편한 진실을 언급했다. FT는 22일(현지시간) 게재한 '한국 경제의 기적은 끝났나?'라는 기사에서 한국은행 자료를 인용해 "한국의 경제성장률은 2022년까지 연평균 6.4% 성장했지만, 2020년대에는 연평균 2.1%, 2030년대에는 0.6% 성장하고, 2040년대에는 0.1%씩 역성장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역성장까지 이제 10여년을 남겨둔 한국 경제의 중심에는 정부의 재벌 주도 성장정책이 있었다.

FT는 한국이 2010년대까지 값싼 노동력, 보조금으로 유지하는 값싼 에너지, 기초기술은 없지만 응용해서 상품화하는 능력 등을 무기로 성장했지만, 이제 한계에 달했다고 주장했다.

지난 수십년간 성장의 무기로 쓰던 것들이 무뎌지면서 이제 단점이 됐고, 인구 감소나 기초기술의 열세, 주요 재벌그룹의 3세들의 현실에 안주하려는 태도가 덧붙여져 경제가 쇠퇴하고 있다는 얘기다. FT는 인기 없는 보수 행정부가 총선에 승리한 진보 입법부와 대립하는 정치구도도 장애물로 거론했다.

FT가 언급한 저성장의 이유는 이처럼 다양하지만, 두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바꾸기 힘든 것들과 지금 바꿀 수 있는 것들이다. 출산율, 노동생산성, 전기요금 체계, 행정부와 입법부의 대립은 바꿀 수 없거나 있다고 해도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결국 지금 바꿀 수 있는 건 제조 대기업 중심의 경제 모델이다.

FT는 박상인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의 말을 인용해 "주요 재벌은 이제 3세가 경영을 맡고 있다"며 "재벌은 과거에 성장 위주 사고방식을 가졌지만, 지금은 3세들의 현실에 안주하려는 사고방식 속에서 표류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재벌이 승계를 이어가면서 풍족함 속에서 자란 현재 총수들의 사고방식이 한국 경제의 퇴행으로 이어졌다는 얘기다. 박상인 교수는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재벌개혁위원장을 맡고 있고, 2022년 「재벌 공화국」이란 책을 냈다.

대표적 진보 경제학자 고故 김기원 교수를 기리는 김기원학술상을 2020년 수상한 김주현 박사는 '한국 재벌의 비주력 업종 진출 요인에 관한 연구'라는 논문에서 "정부 주도적 경제개발에 따른 고도성장기가 지나간 2000년대 이후에도 재벌들은 외형 확장을 계속하고 있지만, 신성장동력을 찾는 목적으로 진행해야 할 사업영역 다각화를 총수 일가의 사적 이익 추구를 위해 진행했다"고 지적했다.

경기도 평택시 삼성전자 평택캠퍼스 모습. [사진=뉴시스]
[자료 | 한국은행]

실제로 우리 정부는 지난 수십 년간 출자총액제한제도 폐지(1998년), 지주회사 전환 시 총수일가 과세 이연(2021년까지), 인적분할 시 자사주에 대한 신주 배정과 같은 상법상의 혜택(일명 자사주의 마법) 등 당근을 제시하며 재벌 체제의 문제점을 보완하려고 노력했지만, 특별한 성과를 내지 못했다. 이 논문은 그 이유를 승계 등 총수 일가의 사적 이익이라는 동기에서 찾았다.

그런 점에서 정부가 최근 추진하는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 정책인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을 다시 주목할 필요가 있다. 4·10 총선을 앞둔 지난 2월 급하게 발표된 밸류업 프로그램은 PBR(주가순자산비율)이 낮은 기업에만 초점을 맞추고, 그 원인인 지배구조 문제를 포함하지 않았다. 금융위원회가 지난 1월 추진한 인적분할 시 자사주에는 신주 배정을 금지하는 방안도 표류 중이다.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은 지난 15일 대한상공회의소가 개최한 행사에서 '자본시장 대전환과 우리 기업·자본시장의 도약을 향한 발걸음'이라는 주제의 강연을 통해 "주주친화적 환경을 조성하고자 인적분할 시 자사주에 신주 배정을 금지하는 등 최대주주의 자사주 활용 방지 방안을 마련하겠다"고 말했다. 또 "지배구조가 우수한 기업에는 감사인 지정제도의 적용을 면제하는 등 인센티브를 통해 기업 부담을 경감하겠다"고 밝혔다.

지배구조 우수기업을 평가하는 기준은 기업지배구조의 정점인 재벌 총수를 견제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 다만, 이 기준은 평가의 가이드라인이지 반드시 이행해야 하는 규제가 아니라는 점에서 즉시 바꿀 수 있다는 측면도 있다. 금융당국은 김우진 서울대 경영대 교수, 정준혁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가 지난 2월 28일 한국재무학회·한국공인회계사회의 '기업지배구조 개선 평가 가이드라인' 세미나에서 발표한 내용을 참고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발표자들은 "한국 대기업은 가족 중심의 경영권 승계를 진행하고, 과반수에 미치지 못하는 소수 지분만으로 회사를 지배하는 경우가 많았다"며 "지배주주와 일반주주의 이해관계가 일치하지 않아 소수 지배주주(총수 일가)가 지배권의 사적 이익을 추구할 유인이 크다"고 지적했다. 김주현 박사가 논문에서 지적한 것과 같다.

지배구조 평가 가이드라인의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재벌 총수의 현금흐름권이 높을수록 좋은 평가를 받는다. 둘째, 총수가 소유한 개인회사가 소속 기업들과 거래를 한다면 사적 이익 추구의 유인이 될 수 있어 나쁜 평가를 받는다.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은 지난 15일 '자본시장 대전환과 우리 기업·자본시장의 도약을 향한 발걸음'이라는 주제의 강연을 통해

셋째, 이사회에 집중투표제를 도입하면 좋은 평가를 받는다. 집중투표제는 이사회에서 이사를 2인 이상 뽑을 때 표를 한명에게 몰아주는 제도다. 이를 도입하면 총수가 이사회 이사를 모두 자신이 선호하는 인물로 뽑는 것을 막을 수 있다.

넷째, 경영권 승계 과정에서 회사가 특별한 경영상 목적 없이 각종 부富를 총수 일가에 이전하거나 일가의 지분을 높이기 위한 거래를 하면 지배구조 평가에서 좋지 않은 평가를 받는다.

총수 지분율이 낮은 계열사의 알짜 사업을 총수 지분율이 높은 기업으로 이전하는 터널링도 감점을 받는다. 총수 일가의 보수 수준, 승진 타당성, 자녀의 대표이사 임명 여부도 평가에 반영한다. [※ 참고: 지배구조 평가 가이드라인은 더스쿠프 통권 594호 '쥐꼬리 지분율 총수 통제책 두고 갑론을박'에서 자세히 다뤘다.]

FT는 국내 재벌이 국내에서 고용의 6%만을 책임지지만, 2021년 기준 국내총생산(GDP)의 거의 절반을 도맡으면서 사회적·지역적 불평등을 낳았다고 꼬집었다. FT는 박 교수의 말을 인용해 "(과거 재벌 주도 경제성장 모델의) 이론적 근거는 재벌이 해외 기업들과의 경쟁에 집중할 수 있도록 국내에서는 보호받아야 한다는 것이었지만, 지금은 재벌이 현실에 안주하면서 스스로가 국내 혁신과 스스로의 성장을 억누르고 있다"는 일침도 놓았다.

한정연 더스쿠프 기자
jayhan0903@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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