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입막음 돈

김태훈 논설위원 2024. 4. 23.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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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김성규

TV 드라마 ‘살인자ㅇ난감’ 주인공은 지나가던 여자에게 살인 범죄 현장을 들킨다. 여자는 “내 입을 막으려면 돈을 달라”고 했다가 목숨을 잃는다. 여자가 입막음의 대가로 요구한 돈을 영어로 ‘허시 머니(hush money)’라 한다. ‘허시’는 ‘쉿’이란 뜻이다. ‘허시 머니’란 표현은 1709년 영국에서 처음 등장했다. 당시 정치인이자 언론인이었던 리처드 스틸이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멍청하거나 사악한 짓을 저지른 자들이 허시 머니를 쓴다’고 한 게 문헌에 나타난 첫 표현이다.

▶미국에서 허시 머니 추문에 처음 휘말린 이는 미국 독립선언문을 기초한 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이었다. 혼혈 노예였던 헤밍스란 소녀를 정부(情婦)로 들였다가 다른 사람에게 들키자 돈으로 입을 막으려 했다. 훗날 5대 대통령이 되는 제임스 먼로에게 1801년 보낸 편지에서 그 돈이 ‘불우한 사람을 돕는 자선금’이라고 했다가 화를 불렀다. ‘제퍼슨이 30살 연하의 14세 여자아이를 정부로 삼아 자식까지 여럿 뒀다’는 폭로 기사로 이어졌다.

▶허시 머니가 목적을 달성하는 경우는 드물다. 오히려 평생 돈을 뜯기거나 그 덫에서 벗어나려다 더 깊은 범죄의 나락으로 빠진다. 시트콤 ‘코스비 가족’으로 사랑받던 미국 국민 배우 빌 코스비는 혼외자 아들로부터 “내 입을 다물게 하려면 돈을 내놓으라”는 협박에 시달렸다. 2008년 미국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 나섰던 존 에드워즈 상원의원은 혼외정사 상대 여성에게 허시 머니를 주려고 선거용 공금에 손을 댄 게 들통나 정계에서 퇴출됐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18년 전 관계가 있던 포르노 배우에게 “입을 다물라”며 건넨 13만달러 때문에 법정에 섰다. 추문을 숨기려다가 미국 역사상 형사 피고인이 된 첫 전직 대통령이 됐다. 허시 머니 자체는 불법이 아니다. 그러나 트럼프 측이 건넨 돈 상당액이 회삿돈이며 장부에 ‘법률 자문료’로 허위 기재돼 있는 게 기소의 근거가 됐다. 처음부터 실수였다고 사과했다면 법정에 서지 않았을 것이다.

▶허시 머니는 진실을 영원히 숨기지도 못한다. 토머스 제퍼슨은 혼혈 노예와의 관계를 평생 부인했다. 그러나 200년 뒤인 1998년, 헤밍스 자손이 유전자 검사를 통해 자기 몸에 제퍼슨의 피가 흐른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영국 속담에 ‘하루 행복하려면 이발하고, 한 해 행복하려면 새집 짓고, 평생 행복하려면 정직하라’고 했다. 허시 머니를 써가며 돈은 돈대로 날리고 추문이 드러나 망신을 사느니 진실을 인정하는 게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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