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처 무덤' 일본이 달라졌다…90조 풀고, 해외기업에도 '러브콜' [긱스]

고은이 2024. 4. 23.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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亞 창업 허브 꿈꾸는 일본
정부도 지자체도 파격지원
스타트업에 사무실 1년간 공짜
JFC, 무담보 대출한도 2배 확대
90년대 IT 성지 시부야 '부활'
글로벌 VC들, 잇단 일본행
500만엔 출자금 등 규제 철폐
아이디어만 있으면 창업 허용
강남언니 등 韓기업도 진출 늘어

‘벤처 무덤, 스타트업 불모지, 정보기술(IT) 갈라파고스….’

얼마 전까지 일본을 바라보는 대내외 시각은 이랬다. 실패를 용인하지 않는 보수적인 기업 문화가 혁신을 멈춰 세웠다는 평가가 많았다. 하지만 최근 일본이 180도 달라졌다. 일본 정부는 스타트업을 미래 성장동력으로 정하고 파격적인 지원책을 쏟아내고 있다. 글로벌 벤처캐피털(VC)은 돈을 싸 들고 일본으로 향하는 중이다. 아시아 창업 중심지 역할을 두고 한국과 일본 사이에서 경쟁이 붙을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그래픽= 이은현 기자

 지원책 쏟아붓는 일본

일본 도쿄 시부야는 1990년대 ‘IT 성지’로 불린 곳이다. 2000개가 넘는 스타트업과 60여 곳의 VC가 몰렸다. 하지만 IT 투자가 주춤하면서 오랜 침체기를 겪었다. 시부야가 다시 기지개를 켜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부터다. 시부야구는 신규 스타트업을 유치하기 위해 ‘스타트업스 주식회사’를 세웠다. 사무 공간을 마련해 스타트업에 1년간 공짜로 제공한다. 은행 법인 계좌 개설에 걸리는 시간은 6개월에서 1~2주로 줄였다. 지역을 지켜온 오래된 회사들이 폐업하면서 활력이 급격히 떨어지자 스타트업 육성을 해법으로 삼은 것이다.

이런 파격 지원책을 내세운 건 지방자치단체뿐만이 아니다. 일본 정부는 2027년까지 스타트업에 10조엔(약 90조원)을 쏟아붓고 있다. 일본정책금융공고(JFC)는 이달부터 스타트업 대상 무담보 대출 한도를 2배 넘게 올렸다. 일본 연기금과 민간 은행도 스타트업 투자에 합세했다. 첨단 기술 개발을 위한 ‘혁신 박스 세제’도 새롭게 도입됐다. 이달 이후 취득한 인공지능(AI) 관련 라이선스 소득에 30%의 소득공제를 해주는 제도다.

일본의 ‘각성’에는 스타트업을 키우지 못하면 국가가 서서히 쇠락의 길을 걸을 것이란 위기감이 반영됐다. KOTRA 도쿄무역관 관계자는 “인력 부족부터 인프라 노후화, 지역 소멸 등 많은 사회적 과제를 안고 있는 일본은 이를 해결할 솔루션에 목말라 있다”며 “체질 개선을 원하는 민간 기업들도 스타트업과의 접점을 빠르게 늘리고 있다”고 말했다.

 ‘공무원→스타트업’ 4배 늘었다

일본은 2000년대 초 디지털 전환의 타이밍을 놓쳤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2000년 1998억달러(약 275조원)였던 일본의 IT 투자액은 20년 후 1757억달러(약 242조원)로 줄었다. 같은 기간 미국의 IT 투자액은 4195억달러에서 7834억달러로 급증해 격차가 크게 벌어졌다. 전성민 가천대 경영학부 교수는 “신사업 추진을 담당하는 일본 기업 간부들은 전쟁 중 사무라이 장수와 같은 상황에 놓인 것처럼 느낀다고 한다”며 “전투에서 패배한 장수는 할복(하라키리)을 통해 책임져야 했기에 신사업에 대한 도전을 주저했다는 것”이라고 했다.

일본의 분위기가 변하기 시작한 건 언론에서부터 감지된다. 지난해 일본 스타트업 도산이 약 2700건으로 역대 최대였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주요 언론은 비판 대신 실패를 용인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일본 최대 경제신문인 니혼게이자이가 “기업 도산에 일희일비하지 말고 실패를 장려해 끊임없이 새로운 싹을 키워야 한다”고 평가한 게 대표적이다.

안정적인 직업을 떠나 창업하거나 스타트업으로 이직하는 청년도 늘고 있다. 2022년 기준 공무원을 하다가 스타트업으로 옮겨간 직원 수는 전년 대비 4배 늘었다. 도쿄대 학생들의 취업 희망처 조사에서도 공무원 선호도가 큰 폭으로 하락하고 IBM 같은 글로벌 테크 기업들이 새롭게 순위에 올랐다. 스타트업으로 이직하는 대기업 인력도 급증했다. 주요 스타트업 76곳의 평균 연봉은 지난해 처음으로 700만엔(약 6230만원)을 돌파했다.

 일본에 모여드는 스타트업들

과거 배타적이었던 외국인 창업자들에게도 문을 열었다. 원래 외국인이 일본에서 사업을 하려면 사무실과 상근 직원 두 명, 500만엔(약 4450만원) 이상의 출자금을 갖춰야 했다. 지금은 이런 조건 없이도 사업 계획만 인정되면 어디서든 2년간 체류할 수 있다. 이미 한국 스타트업들은 앞다퉈 일본 진출을 시도하고 있다. 채널톡, 강남언니, 스토어링크, 올거나이즈 등 일본 시장을 노리는 기업이 셀 수 없이 많다. 국내 VC들도 일본 투자를 본격화하고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인도, 동남아시아 투자에 집중했던 것과는 분위기가 달라졌다.

물리적으로 한국과 가까운 데다 그동안 디지털 전환이 더뎠던 것이 기회로 작용하는 분위기다. 현재 일본 기업들의 디지털 전환 진행도는 48.4%. 미국(78.6%), 중국(88.3%)의 절반 수준이라 기술력을 갖춘 한국 스타트업들이 진입할 여지가 많다. 일본 정부와 지자체가 해외 창업자 대상 지원책을 쏟아내고 있는 것도 강점이다. 오픈AI와 구글, 마이크로소프트(MS) 등 글로벌 빅테크들도 폭발적으로 늘어날 IT 인프라 수요를 노리고 일본 투자를 늘리고 있다.

 “한국도 빠르게 대응해야”

한국이 기민하게 대응하지 못한다면 아시아 창업 허브 자리를 일본에 뺏길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업계 관계자는 “요즘 일본인 창업자들은 영어를 잘하지 못해도 외국인 네트워킹에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시작부터 글로벌로 파고든다”며 “한국 스타트업 생태계가 먼저 자리잡았다고는 하지만 후발주자 일본의 저력이 만만치 않다”고 했다. 한국도 해외 스타트업 유치를 추진하는 등 애쓰고 있지만 비자 발급부터 문턱이 높다. 외국인 창업자들은 한국 스타트업 업계의 폐쇄적인 문화가 사업 확대의 걸림돌이라고 호소하고 있다.

일본과 달리 한국에선 창업 분위기가 꺾이는 중이다. 지난해 말 스타트업얼라이언스의 국내 스타트업 재직자 설문에서 창업 고려율은 전년 58.0%에서 47.2%로 하락했다. 대기업 직장인의 스타트업 이직 고려율도 18.8%로 전년보다 6.0%포인트 떨어졌다.

고은이 기자 koko@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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