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산행기] 고독의 동반자, 그리운 산

김덕준 남양주시 가운로2길 2024. 4. 23.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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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 시절 나는 산과 친하지 않았다.

산에서 보내는 시간이 점차 늘었고, 한라산, 성인봉, 설악산, 지리산 등 어느덧 전국의 명산을 오르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됐다.

"가능하다면 아내와 자녀, 재산, 건강이 있어야 하지만, 거기에 너무 집착해서는 안 된다. 완벽한 자유를 위한 나만의 공간을 마련해 두고, 이곳에서 진정한 자유와 고독을 확보해야 한다. 이곳에서는 마치 아내, 자녀, 재산이 없는 것처럼 자기 자신과 대화를 나누며 마음껏 웃을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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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량산 장인봉에서 필자.

유년 시절 나는 산과 친하지 않았다. 내가 태어난 곳은 동해안의 작은 시골 마을. 초등·중학교 시절에는 방학만 되면 땔감을 얻기 위해 지겹도록 산을 오르내렸다. 떨어진 소나무 갈잎과 고사목을 잘라 지게에 지고, 빙판길 계곡을 내려오다 넘어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멍든 무릎을 볼 때마다 나는 푸념을 밥 먹듯 했었다.

'언제쯤 이 지긋지긋한 산을 오르지 않아도 될까?'

그러던 내가 고향을 떠나 낯선 객지 생활을 한 지 어느덧 35년이 지났다. 지난날을 돌이켜 보면 참 열심히 살았다. 아등바등 세파에 시달리며 달려온 세월이었고, 크고 작은 우환도 많았다. 일상에 치어 스트레스를 받고 있을 때, 둘째 딸이 다리 난간에서 떨어지는 큰 사고도 발생했다. 딸아이는 머리를 심하게 다쳐 뇌수술을 받았다. 응급실과 중환자실 입구에서 아내와 쪼그리고 앉아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던 그때가 아직도 생생하다.

IMF 한파가 몰아치던 그때 내겐 암담한 현실 앞에 기댈 곳은 보이지 않았다. 매일 불면증에 시달렸고, 자정이 지난 시간에도 집을 나와 썰렁한 공원을 거닐며 사색에 빠지는 날들이 많았다. 그곳에선 저 멀리 어둠 사이로 희끄무레한 능선들이 보였다.

어느 날 나는 집을 나와 늘 멀리서만 바라보던 산을 향해 걸었다. '거대한 산에 숨으면 잠깐이나마 괴로움을 잊을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날부터 산은 내게 새로운 의미가 됐고, 삶의 활력이 됐다. 산에서 보내는 시간이 점차 늘었고, 한라산, 성인봉, 설악산, 지리산 등 어느덧 전국의 명산을 오르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됐다.

나는 20년 전부터 등산 일기를 쓰고 있다. 가끔 일기장을 들여다보며 험준했던 고갯길, 함께했던 사람들, 희귀한 야생 동식물을 발견하고 신기해했던 순간을 추억한다. 뭔가 큰일을 앞둔 시점이면 나는 홀로 산을 찾아 기도를 올렸다. 아이들 시험은 물론이고, 집안에 각종 우환이 닥쳤을 때도 나는 어김없이 산을 찾았다. 그때마다 산은 아무런 말이 없었지만, 내겐 산이라는 존재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위안이 됐다.

우뚝 솟은 산봉우리는 내게 위대한 스승과 같다. 산은 과욕을 삼가고, 인내하는 미덕을 내게 가르쳐 주었다. 가끔은 채찍처럼 내 잘못을 엄하게 질책하는가 하면, 때론 어머니처럼 포근하게 감싸줬다. 그 덕에 과거의 아픈 상처도 조금씩 치유됐고, 나를 괴롭히던 소화불량과 어깨통증도 마법처럼 사라졌다. 그 은혜를 잊지 않고, 나는 산에서 만나는 작은 나무와 바위틈의 이끼 풀에도 늘 감사하는 마음을 전하고 있다.

일찍이 프랑스의 사상가 몽테뉴는 자신의 저서 <수상록>에서 이렇게 말했다.

"…가능하다면 아내와 자녀, 재산, 건강이 있어야 하지만, 거기에 너무 집착해서는 안 된다. 완벽한 자유를 위한 나만의 공간을 마련해 두고, 이곳에서 진정한 자유와 고독을 확보해야 한다. 이곳에서는 마치 아내, 자녀, 재산이 없는 것처럼 자기 자신과 대화를 나누며 마음껏 웃을 수 있어야 한다."

고독한 중년들이여! 혼자만의 공간이 필요하다면 지금 당장 산이나 숲으로 가보자! 누가 알겠는가? 그곳에서 마음껏 자신과 대화하다 보면 혹시 잃어버린 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는지….

월간산 5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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