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적 영감은 어떻게 솟아나는가

고명섭 기자 2024. 4. 23.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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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명섭의 카이로스
창조적 영감이 누군가를 매개로 삼아 불꽃을 일으키면, 그 불꽃이 집단으로 번져 나가 거대한 불길이 된다. 기존 질서에 매여 있거나 그 질서를 지키려는 자들은 불길을 끄려고 온갖 수단을 끌어오지만, 영감이 이끄는 집단의 불길은 우리를 묶어두고 있던 관습과 제도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세계를 연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무사 여신들. 무사 여신은 문학·예술·학문의 창조 영역에 영감을 준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플라톤의 대화편 ‘파이드로스’에는 소크라테스가 젊은 파이드로스에게 ‘광기’(mania)에 관해 이야기하는 대목이 나온다. 소크라테스는 광기를 두 종류로 나눈다. 하나는 ‘몸의 질병’이고 다른 하나는 ‘신의 선물’이다. 몸의 질병으로서 광기는 일상을 어그러뜨린다. 하지만 신의 선물로서 광기는 우리 몸에서 일어나는 광기와는 성격이 아주 다르다. “우리에게 좋은 것들은 대부분 신이 주는 광기에서 온다.”

소크라테스는 신이 주는 광기를 다시 네 가지로 나누는데, 그 하나가 예언의 신 아폴론의 무녀에게서 나타나는 광기다. 델포이 신전의 무녀는 신들린 상태에서 국가의 중대사에 관한 신탁을 전함으로써 공동체가 갈 길을 밝혀준다. 둘째로 디오니소스교도들의 광기다. 재생의 신 디오니소스를 따르는 이들은 비밀의식에 입회해 망아 상태에서 영혼을 정화하고 새로 태어난다.

소크라테스는 세 번째로 시의 광기를 든다. 무사(뮤즈) 여신이 주는 이 광기는 시인의 혼을 사로잡아 비범한 시를 써내게 한다. 시 쓰기 기술을 아무리 갈고닦더라도 이 여신이 주는 광기가 없다면, 독자의 마음을 흔드는 시는 나오지 않는다. 호메로스도 시를 쓰기 전에 먼저 무사 여신에게 광기를 달라고 빌었다. 소크라테스는 마지막으로 사랑의 광기를 든다. 에로스가 광기를 심어주지 않으면 연인들은 상대에게 미칠 수 없다. 에로스의 광기가 연인들의 마음에 들어앉아 아름다움 향한 그리움을 피워 올린다.

여기서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시’는 서정시나 서사시만이 아니라 문학적 창조 전반을 가리킨다. 소설가 프란츠 카프카(1883~1924)가 쓴 편지는 이 문학적 창조의 광기가 어떻게 나타나는지 생생하게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만하다, 카프카는 1912년 8월 펠리체 바우어라는 여성을 만나고 한 달 뒤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하는 편지를 썼다. “존경하는 아가씨! 혹시라도 당신이 저에 대해 아무런 기억도 떠올리지 못할지 모르기에 다시 한번 저를 소개하겠습니다. 제 이름은 프란츠 카프카이며, 프라하의 브로트 지점장 댁에서 처음으로 뵙고 인사했던 남자입니다.”

딱 한번 만난 여인을 향해 이렇게 보내기 시작한 편지는 1년도 안 돼 장편소설 한권 분량에 이르렀다. 600쪽에 이르는 그 편지들은 ‘사랑의 광기’가 카프카의 혼을 사로잡아 끝없는 글쓰기로 몰아댔음을 알려준다. 첫 편지를 보내고 열한달이 지난 1913년 8월14일 보낸 편지에서 카프카는 문학에 바친 자신의 존재를 이렇게 털어놓는다. “나는 문학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문학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나는 다른 그 어떤 것도 아니며 그럴 수도 없습니다.” 그러면서 카프카는 그 얼마 전 읽은 ‘사탄의 종교사’라는 책에서 발견한 이야기 한편을 소개한다.

“한 성직자의 목소리가 너무나 아름답고 달콤하여 누구나 그 소리를 듣고 싶어했습니다. 어느 날 이 사랑스러운 목소리를 들은 다른 성직자가 이것은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 사탄의 소리라고 했습니다. 그러고는 숭배자들 앞에서 사탄을 불러냈습니다. 그러자 성직자의 몸에서 사탄이 빠져나왔고, 그 몸은 심한 악취를 풍기는 시체로 변했습니다.”

사탄의 영혼이 인간의 육체를 빌려 살고 있었던 것이다. 카프카는 이렇게 덧붙인다. “나와 문학의 관계도 이것과 매우 유사합니다. 다만 나의 문학은 성직자의 목소리처럼 달콤하지 않을 뿐입니다.” 문학이라는 광기 어린 힘이 몸속에 들어앉아 작가를 글쓰기로, 창작으로 이끌어가고 있다. 이 고백이 암시하는 대로 카프카의 문학은 어둡고 불길하고 그로테스크하다. 일상의 안온함을 파괴하는 언어를 빌려 카프카는 전례 없이 새로운 세계를 창조했다. 카프카가 말하는 문학의 사탄은 소크라테스가 이야기하는 무사 여신의 동족이다. 사탄이 주는 그 광기가 없었더라면 문학적 관습을 거스르는 카프카적 세계는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를 놀라게 하는 새로운 것의 창조는 익숙한 삶의 문법을 깨뜨리는 반역적 행위에서 나온다. 시대를 거역하는 창조적 정신은 기성의 질서를 흔들기에 그 질서를 지키려는 사람들의 반감과 적대를 부른다. 창조적 작업을 하는 사람은 그러므로 자신을 둘러싼 적대적 문화의 압박이 주는 불안과 두려움을 뚫고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때 필요한 것이 광기라고 프리드리히 니체는 ‘아침놀’에서 말한다. “새로운 사상에 길을 열어주면서 존중되던 습관과 미신의 속박을 부수는 것은 광기다.”

시대의 압박에 맞서 반역적인 창조적 작업을 계속하려면 그 압박을 이겨낼 수 있는 비상한 힘, 광기의 힘이 필요하다. 그래서 니체는 또 이렇게 부르짖는다. “아아, 하늘에 있는 자들이여, 광기를 주소서! 마침내 내가 나를 믿을 수 있도록 광기를 주소서! 의심이 나를 파먹어갑니다. 나는 법을 파괴했습니다. 시체가 사람들을 불안하게 하는 것처럼 법이 나를 불안하게 합니다.” 마치 고대의 시인들이 시를 쓸 때마다 무사 여신을 불렀듯이, 니체는 시대의 ‘법’을 부수는 철학적 작업을 하면서 불안과 두려움을 뚫고 나갈 광기의 힘을 달라고 외쳤다.

니체가 새로운 길을 열면서 느꼈던 그 불안과 두려움을 불교의 창시자 고타마 싯다르타도 느꼈던 것 같다. 삶의 괴로움이라는 문제를 풀어보려고 출가했던 싯다르타는 그 시대 출가수행자들의 관습과 관행을 따라 자기 몸을 극도로 학대하는 고행에 매달렸다. 그러다 어느 날 그런 자기파괴적 고행이 해탈에 이르는 올바른 길이 아니라는 깨달음에 이르렀다. 어린 시절 잠부나무 그늘에 앉아 선정에 들었던 기억이 떠오른 것이다. 자신의 육체를 학대하지도 않고, 날뛰는 욕구들을 뒤쫓지도 않는 그 무념의 상태, 고행에도 매달리지 않고 쾌락에도 빠지지 않는 그 중도의 상태에서 편안한 기쁨을 느꼈던 것이다.

그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고 싯다르타는 자기에게 묻고 답한다. “과연 이것이 깨달음으로 가는 길일 수 있을까?” “이것이 깨달음으로 가는 길이다.” 그러고 나서 싯다르타는 다시 묻는다. “나는 이런 편안함을 두려워하는가?” 싯다르타는 다시 스스로 답한다. “나는 이런 편안함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싯다르타는 분명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이 자문자답이야말로 싯다르타 내면에서 두려움이 피어올라 새길을 찾는 자를 불안에 떨게 했음을 알려준다. 극한의 고행 속에서만 ‘나쁜 카르마’를 떨쳐내고 해탈에 이를 수 있다는 출가수행 전통을 부정하는 최초의 깨달음이 싯다르타의 내면에 불안의 격랑을 일으킨 것이다. 싯다르타는 그 두려움을 이겨냄으로써 불교라는 새로운 종교의 창시자가 될 수 있었다. 창조의 순간에 필요한 것은 두려움을 뚫고 나가는 집중과 결단이다.

창조를 이끄는 그 광기를 조금 순화된 말로 인스피레이션(inspiration, 영감)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인스피레이션의 말뿌리를 이루는 라틴어 ‘인스피라티오’(inspiratio)는 ‘신이 입김을 불어넣음’이라는 뜻이다. 신의 입김이 혼을 휘감을 때 솟구치는 것이 영감이다. 영감은 신적인 광기의 들이침이다. 그 영감은 문학적 창조나 종교적 창조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삶의 모든 영역에서 영감의 힘은 발견된다. 이를테면 철학자 알랭 바디우는 영감이 번개처럼 들이쳐 혁명적인 변화를 불러오는 것을 두고 ‘진리 사건’이라고 불렀다. ‘진리 사건’이란 ‘참된 것의 출현’이다.

바디우는 진리 사건의 현장으로 과학과 예술과 사랑과 정치를 든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의 등장이 과학 영역에서 일어나는 진리 사건이라면, 창작의 문법을 바꾸는 새로운 사조의 등장이 예술 영역의 진리 사건이다. 또 두 사람이 만나 상대에게서 눈부신 빛을 보는 것이 사랑의 진리 사건이다. 정치에서도 참된 것은 일어난다. 스파르타쿠스가 이끈 노예들의 반란, 프랑스혁명의 불을 지른 바스티유 함락이 그런 경우다.

그 진리 사건을 일으키는 것이 창조적 영감이다. 창조적 영감이 누군가를 매개로 삼아 불꽃을 일으키면, 그 불꽃이 집단으로 번져 나가 거대한 불길이 된다. 기존 질서에 매여 있거나 그 질서를 지키려는 자들은 불길을 끄려고 온갖 것을 끌어오지만, 영감이 이끄는 집단의 불길은 반동의 흐름을 뚫고 기존 질서를 태워버린다. 창조적 영감은 우리를 묶어두고 있던 관습과 제도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세계를 연다. 지난 총선은 그런 영감이 일으키는 진리 사건을 얼핏 보여주었다. 그 사건이 역사를 바꾸는 큰 전환의 출발점이 되느냐 마느냐는 그 사건에 참여한 사람들의 비전과 결의가 얼마나 뚜렷하고 굳세냐에 달렸다.

고명섭

책지성팀 선임기자. ‘하이데거 극장-존재의 비밀과 진리의 심연’(1, 2), ‘니체 극장-영원회귀와 권력의지의 드라마’, ‘생각의 요새’, ‘광기와 천재-루소부터 히틀러까지 문제적 열정의 내면 풍경’, ‘지식의 발견-한국 지식인들의 문제적 담론 읽기’, ‘이희호 평전-고난의 길, 신념의 길’을 썼다. 카이로스는 때·시기·기회를 뜻하며 현재를 밝히는 순간의 섬광을 가리킨다. 카이로스의 눈으로 철학·사상·역사를 포함한 인문학을 탐사하며 우리 시대와 대화한다.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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