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과 박근혜, 그 불길한 도돌이표
강희철 | 논설위원
“앞으로 국민의 민의를 겸허히 받들어서 국정의 최우선 순위를 민생에 두고….”
대통령은 4월 총선에서 패배했다. ‘야당 심판론’은 먹히지 않았다. 대통령의 자업자득이라는 평가가 줄을 이었다. 뜸을 들이다 고개를 숙이는 듯했다. 그러나 사과는 없었다. 국민이나 언론 앞에 선 것도 아니다. 참모들을 모아놓고 ‘민생’과 ‘겸허’를 말했다. 그것으로 갈음했다. 직후 여론조사에서 대통령 지지율은 폭락했다. 20%대(갤럽), 취임 뒤 최저를 찍었다.
윤석열 대통령 얘기가 아니다. 8년 전 이맘때 박근혜 대통령이 그랬다. 졌지만 지지 않았다. 패배 인정은 없었다. 일찍이 루쉰이 말한 ‘정신승리법’이다. 지금의 윤과 놀라울 만큼 흡사하다.
물론 둘의 처지는 같지 않다. 윤은 당시 박보다 남은 임기가 훨씬 길다. 5년 임기의 반환점을 돌지 못했다. 국회 의석 분포도 다르다. 2016년 4·13 총선도 ‘여소야대’로 귀결됐다. 하지만 여당과 제1야당의 의석 차는 1석(122 대 123)에 불과했다. 이번 총선 결과는 108 대 175, 야권 의석이 192개나 된다. 총선 패배에도 박은 그럭저럭 여당 장악력을 가져갔다. 하지만 이번 국민의힘 당선자엔 친윤조차 ‘무늬만’이 대다수다. 그들 임기가 윤의 잔여 통치기간보다 길다. 이런 혹독한 조건이 앞으로 3년간 지속된다.
윤에겐 심각하고 결정적인 문제 하나가 더 있다. 부인 김건희 여사다.
서초동 일대에선 지난 연말·연초 특검법 정국에 검찰 고위직 경질설이 파다했다. 송경호 서울중앙지검장을 지방 고검장으로 보내고, 그 자리에 윤의 신임이 두터운 ㅇ지검장을 발탁하기로 했다는 것이 골자다. 김 여사 직접 조사 여부가 갈등의 발단이라고 알려졌다. ‘소환이 불가피하다’는 보고를 받은 윤이 격노했다는 말이 돌았다. 꾹꾹 눌러 봉인해 놓은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사건에서 동티가 날 뻔했다.
그러나 인사는 없었고, 설은 잦아들었다. 윤은 재의요구권을 행사해 특검법안을 폐기시켰다. 김 여사는 지금껏 ‘수사 중인 피의자’로 남아 있다. 그 사건으로 기소된 사람들은 1심이 끝나 항소심에 가 있는데, 김 여사는 단 한 차례 조사도 받지 않았다. 제1야당 대표 부인이 10만원어치 식사 제공 혐의로 법정에 선 것과 확연히 대비된다. 그런 식의 불공정과 반상식, 윤의 내로남불을 빼놓고 이번 총선 결과를 온전히 설명할 수 있을까. 윤은 김 여사가 조금이라도 불리하게 언급되는 순간 벌컥벌컥 화를 낸다고, 겪어 본 많은 사람이 말한다. 그래서 김 여사는 대통령실과 여권 전체에서 ‘언터처블’로 간주된 지 오래다. 총선 이전, 지난 2년 동안은 그랬다. 그러나 앞으로도 그럴 것인지는 누구도 장담하지 못한다.
박은 그 점에서 윤의 반면교사다. 박도 총선 이후의 위험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권력형 비리 의혹이 제기된 우병우 당시 민정수석을 한사코 감쌌다. “고난을 벗삼아 당당하게 소신을 지켜나가길 바란다”고 격려했다. 위법성만 따지다 ‘국민 정서법’을 놓쳤다. 최순실 의혹이 본격 제기된 뒤에도 검찰을 찍어눌러 6주를 더 버텼다. 그새 화근은 재앙으로 번졌다. ‘스모킹건’(태블릿 피시)이 공개되자 방어선은 허망하게 무너졌다. ‘친박’ 일색 여당조차 더는 우군일 수 없었다. 검찰과 특검, 국회와 헌법재판소가 동시에 움직이는 ‘단죄의 시간’이 도래했다. 그때 우를 탈탈 털어 끝내 감옥으로 보낸 사람이 윤이다.
“사건이 다 마무리된 뒤에 돌아보니, 박 대통령이 우 수석을 신속하게 정리했더라면 최순실 사건, 대통령 탄핵과 구속까지는 안 가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도 듭디다. 가정에 불과하지만.”(‘국정농단 특검’ 고위 관계자)
김 여사 문제도 누르고 묵히는 사이 더 위중한 사안으로 발전했다. 주가조작 의혹에 ‘디올백’ 수수가 더해졌다. 총선에서 승리한 야권은 이 둘에 양평고속도로 의혹을 묶어 종합특검을 벼르고 있다. 여당 내 동조 분위기가 없지 않다. 김 여사가 이제 ‘국민밉상’의 반열에 올랐다는 방증이다. 총선 참패 뒤 흘러나온 ‘박영선 총리설’은 김 여사 국정개입 의혹만 더 키웠다. 백일을 넘긴 잠행도 약이 되지 못했다. 거기에 윤을 직접 겨눈 ‘채 상병 특검’까지 야권의 양수겸장이 멀지 않았다.
윤은 박의 전철을 피해 갈 수 있을까. “이 정치라고 하는 것은 그래서 항상 자기편에 적이 있다는 걸 알아야 돼.” 김 여사가 이른바 ‘7시간 녹취록’에서 했다는 말이다.
hck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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