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라이프이스트-손주에게 물려줄 아버지 고사성어]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다

2024. 4. 23. 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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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닷컴 더 라이프이스트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손주를 보러 온 부모님이 애들 재롱에 빠져 즐거워할 때 전화가 왔다. 전 부서 직원과 통화하던 내가 “그러면 그건 백지화(白紙化)하라”고 하자 아버지가 “전화 끊으라”고 호통쳤다. 손주들이 놀라 품에서 달아나자 아랑곳하지 않은 아버지는 백지화를 “자인하기 싫어 교묘하게 포장한 실패”라고 규정했다. “치졸하다”고 책망한 아버지는 세 가지를 지적했다. 하나는 “전 부서에서 네 손을 떠난 계획을 백지화하라는 말은 월권(越權)이다”라고 했다. “또 살펴보니 전 부서에서 계획한 자료들을 가져왔던데 그건 실행에 옮기지 않은 아이디어라도 그 조직의 재산이다. 그걸 임의로 들고나온 건 엄연한 범법행위다”라고 꾸짖었다. 이어 “전 부서, 전 직장을 욕하는 이가 제대로 된 삶을 사는 걸 못 봤다. 친정 흉보는 거 아니다”라고 아버지는 나무랐다.

아버지는 “네 대답을 듣고 싶지 않다만 혹여라도 ‘나도 고생했으니 후임자들도 고생해봐라’라는 생각으로 그렇게 했다면 크게 잘못한 일이다”라며 크게 염려했다. 백지화는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거나 초기 상태로 돌려놓는다’라는 뜻이라고 정의해 설명했다. 첫째 계획이나 프로젝트가 중단되거나 취소되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 때, 둘째 합의나 결정이 뒤집히거나 무효로 하여 다시 논의해야 할 때, 셋째 기존 시스템이나 구조가 폐지되고 새로운 시스템이나 구조를 구축해야 할 때를 제외하면 백지화는 엄밀한 의미에서 실패다. 아버지는 “18세기 프랑스 혁명 정부는 봉건 시대의 모든 법률과 제도를 폐지하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백지화 정책을 추진했다”라고 유래를 설명했다.

그런 경우가 아니면 백지화는 절대 해서는 안 된다며 시간과 자원 낭비, 불안정성과 갈등 야기, 신뢰를 잃는 문제점들이 있다고 했다. 아버지는 “너 같은 전임자가 백지화한 프로젝트를 되살려 성공하는 예도 많다”며 전임자가 가지지 못한 후임자의 역량에 따라 성공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아버지는 “실패하면 포기한다. 포기하는 것도 습관 된다”라며 “실패에 대한 두려움, 부족한 자신감과 목표의식, 긍정적 사고 부족을 언제나 경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버지가 실패를 경고한 여러 말씀은 이제 다시 찾아보니 유명인사들의 경구였다. “실패는 지연일 수는 있어도 패배는 아니다. 일시적으로 돌아가는 것이지 막다른 골목은 아니다. 실패는 두려워해야 할 것이 아니다. 새로운 시도를 할 때나 큰 성공을 향해 나아갈 때 불가피하게 찾아올 수 있는 것이 실패다”는 말씀은 동기부여전문가 토드 던컨이 한 명언이다. “성공은 실패라고 불리는 99%의 산물로부터 얻어지는 1%의 결과물이다”라는 혼다 창업주 혼다 소이치로(本田宗一郞)가 한 말이다. 아버지는 “포기해야겠다는 생각이 들 때야말로 성공에 가까워진 때이다”라는 말로 격려했다.

백지화가 새로운 것을 창조하기 위한 필수적인 과정이라고 한 아버지는 실패로 인식하기보다는 새로운 시작을 위한 기회로 생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토머스 에디슨의 명언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다”를 원용해 “창조는 모방에서 나온다.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다”라고 뜻을 새겼다.

이어 공자가 말한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과 유사한 뜻인 ‘법고창신(法古創新)’을 인용했다. 아버지는 “온고지신은 옛것을 아는데 머물고 있다면 법고창신은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고 차이점을 일러줬다. 옛것을 본받아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는 뜻인 법고창신의 원문은 “옛것을 모범으로 삼되 그것을 변화시킬 줄 알고 새것을 만들어 가되 법도를 지켜야 한다[法古而知變 創新而能典]”이다. 조선시대 실학의 태두인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의 ‘초정집서(楚亭集序)’에 나온다. 연암이 초정 박제가(朴齊家)에게 ‘글은 옛것을 본떠 써야 하나, 새로운 것을 써야 하나’를 문제 제기한 뒤 ‘글은 옛것에서 새것을 만들어내는 것이다’라고 쓴 글이다. 조직의 전통과 규칙을 따르되 새로운 변화를 알고 조직에 새 바람을 일으키며 새로운 것을 창출하되 전통이나 규칙에 어긋나지 않게 한다는 말이다.

화가 풀리지 않은 아버지는 며느리가 차린 밥상을 물리고 떠나버려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전임자가 백지화한 실패를 딛고 일어서 성공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하지만 인류가 지금 같은 성장을 이룰 수 있었던 건 변화에 성공했기 때문이고 그 성공보다는 훨씬 많은 실패를 딛고 일어선 결과다. 아버지는 “백지화에 변화를 얹으면 창조가 된다”고 말씀을 마쳤다.

백지화해야 할 어려움에 맞닥뜨릴 때 꺾이지 않고 다시 일어서는 힘이 탄력성이다. 변화를 읽는 중요한 인성이다. 희망을 버리지 않고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유지하는 게 탄력성을 키우는 비결이다. 그 어떤 것보다 손주들에게도 먼저 물려줘야 할 소중한 성품이다.

<한경닷컴 The Lifeist> 조성권 국민대 경영대학원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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