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가산책] 한우물 딜레마

김예지 목원대 관현악작곡학부 교수 2024. 4. 23.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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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열 살에 처음 플룻이라는 악기를 잡았다.

그 전 해까지 억지로 배우던 바이올린과 달리 재미를 느꼈고, 숨과 팔이 짧아 체력적으로 버거우면서도 반짝이는 악기의 묘한 매력에 금세 빠져버렸다.

그땐 마치 진로를 고민하고, 다른 직업이나 인생을 궁금해하는 일이 음악가의 길을 걷겠다는 나와의 약속을 저버리는 행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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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예지 목원대 관현악·작곡학부 교수

나는 열 살에 처음 플룻이라는 악기를 잡았다. 그 전 해까지 억지로 배우던 바이올린과 달리 재미를 느꼈고, 숨과 팔이 짧아 체력적으로 버거우면서도 반짝이는 악기의 묘한 매력에 금세 빠져버렸다. 새 학년이 되면 적어내는 '장래희망' 에 나는 의사라고 적었었는데, 플룻을 처음 접한 이듬해인 4학년 때는 '플룻 잘 부는 의사'라고 써냈다. 의사가 되고 싶었다고 꼭 의사가 됐으리라는 보장도 없지만 그 시절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이야기는 "한 우물만 파라"였다.

두 가지 장래희망이란 없는 것처럼 난 음악가가 되기 위한 전문적인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 나의 일기엔 플루티스트가 되는 꿈에 대한 내용이 가득했다. 음악회를 보고 오면 꼭 나도 그 무대에 서겠다는 다짐이, 대회가 열린 예술학교에 다녀와서는 꼭 그 학교에 진학하겠다는 희망이, CD 속 연주자를 언젠가 직접 만나고 싶다는 바람이 채워져 갔다.

'한우물 가스라이팅'의 결과라고나 할까? 그렇게 예술 중·고등학교를 거쳐 음대에 진학하고, 유학까지 마쳤다. 요즘 학생들이 하는 진로에 대한 고민 같은 것도 거의 없었다. 그땐 마치 진로를 고민하고, 다른 직업이나 인생을 궁금해하는 일이 음악가의 길을 걷겠다는 나와의 약속을 저버리는 행위 같았다.

100세를 넘어 120세 시대를 바라보는 요즘, 평생 한가지 직업에만 종사하며 사는 것도 불가능해 보인다. 직업의 종류가 다양해졌을뿐더러 직업에 대해 세상이 가지는 관점도 아주 많이 변했다. 음악 전공생들 사이에서 요즘 가장 인기 있는 직업은 '유튜버'라고 한다. 그러나 유튜버가 되려고 한들 악기 실력은 기본이고 대중의 이목을 끌만한 콘텐츠, 영상을 찍고 편집하는 기술, 사람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진행 능력이나 말솜씨 등등 갖춰야 할 것이 한둘이 아니다. 실제로 코딩을 배우러 다니는 학생들도 있고, 컴퓨터 자격증과 외국어 점수 등을 모두 갖추기 위해 수강하는 교외강좌도 여러 가지다.

우린 "한우물만 파도 될동말동"이라고 배워왔는데, 요즘엔 "무엇이든 다 잘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한때 김연아의 놀라운 스케이팅을 분석하며 자주 언급된 말콤 글래드웰의 '1만 시간의 법칙'은, '하루도 빼놓지 않고 매일 3시간씩 연습한 10년, 혹은 매일 10시간씩 연습한 3년' 등의 총 1만 시간의 연습이 쌓여야 자기 분야의 마스터가 될 수 있다고 설명한다.

나의 스승이신 이소영 플루티스트께서는 재작년 데뷔 30주년 독주회를 가지면서 '개인 독주회의 은퇴 무대'임을 선언하셨다. 그는 악기를 배우는 과정이 "수십 년의 세월에 표도 안 날 만큼 반 발짝의 걸음들이 모여 올라가는 길"이라고 말씀하셨고, 내 마음 깊이 울렸다.

무서울 만큼 빨라진 지금의 세상에 악기를 가르치는 학부모들의 마음도 이해는 된다. 아이가 이 악기에 소질이 있긴 한 건지, 아니라면 다른 흥미를 얼른 찾아줘야 하는 건 아닌지, 표도 안 나는 악기 공부에 시간과 정성을 쏟기보다 당장 결과물을 낼 수 있는 다른 공부를 해야 하는 건 아닌지 조바심이 날 만도 하다. 뭐든 빨라진 세상이라고 해도 한 분야의 마스터가 되는데 필요한 1만 시간이 5000시간이 되는 건 아니니 예술가의 길을 걷고자 하는 아이와 부모들, 그리고 교육자에게는 딜레마가 아닐 수 없다.

순수예술 소멸의 시대, 성공이 보장되지 않는 미래를 향한 시간과 노력에의 기꺼운 투자가 대견하고 반가우면서도, 들리지 않는 박수를 보내는 소심한 응원이 미안해진다.

김예지 목원대 관현악작곡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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