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리포트] 한국이 대북 제재 ‘구멍’
간나, 머저리, 돌대가리. 중국 단둥의 수산물 공장에서 일하는 한 북한 여성 노동자는 이런 상욕을 매일 듣는다고 했다. 그는 하루 18시간 동안 좁은 공간에서 바지락을 손질한다. 꾸물거리면 북한 당국이 감시를 위해 파견한 관리자들에게 두드려 맞았다. 다른 북한 주민은 공장 관리들이 걸핏하면 성관계를 강요한다고 했다. 견디다 못한 노동자들이 목숨을 끊었다는 소문이 파다하다. “빈손으론 못 가는데…. 지치고, 사는 게 힘들어 슬픕니다.”
미 워싱턴DC의 비영리 단체 ‘아웃로 오션 프로젝트’는 작년 중국인 조사관들을 고용해 단둥에서 일하는 북한 주민 20명을 만나게 했다. 생생한 증언이 담긴 필사본을 미국으로 전송받았다. 중국은 북한 노동자 고용을 부인해 왔다. 유엔 제재 위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소 공장 15곳에서 1000명이 넘는 북 노동자들이 강제 노동에 시달리고 있었다. 단둥엔 이런 공장이 수백 개 있다. 북한 당국은 이들 수입의 90%를 가져간다. 북한 주민들의 ‘노예 노동’으로 나오는 돈이 고스란히 김정은의 핵(核) 개발에 쓰이는 구조가 확인됐다.
미국의 외교·안보 정책에서 북한 문제는 갈수록 ‘뒷전’이 되어간다는 생각을 지우기 힘들었다. 그러나 이 단체가 조사 결과를 발표하자 미 정가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북한 주민들이 강제 노동으로 만든 중국 수산물이 미국에서 대량 유통된다는 사실이 확인됐기 때문이다. 연방법 위반이다. 의회 청문회가 열렸고 월마트, 맥도널드 등 대형 기업들이 다급하게 “거래를 중단하겠다”고 했다.
본지는 최근 이 단체와 함께 중국 회사들의 무역 자료 등을 분석해 이 중국 수산물들이 한국으로도 수입된다고 보도했다. 일부 초기 자료로 확인된 것만 수백 톤이다. 부끄럽지만 이런 사실을 이제야 알았다. 북 핵·미사일 위협의 최대 피해자는 한국이다. 우리가 우리를 위협하는 북한 핵 개발에 돈 대는 상황을 국민들이 용납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본지 보도 이후 일부 한국 기업이 문제가 된 수산물 거래를 중단하겠다고 나선 건 그나마 다행이다. 본지 기사엔 ‘물가 오르면 책임질 거냐’ ‘우리가 먹고사는 게 먼저’란 댓글이 달렸다. 이해한다. 북한 인권 유린엔 이상하리만큼 침묵하고, 중국엔 ‘셰셰(고맙다는 중국어)’ 하면 된다는 야당 주장에 동조하는 분도 많을 거라고 생각했다.
의아한 건 북한 인권을 최우선 순위에 두겠다던 현 정부 반응이다. 북한 인권 재단을 세우겠다는 통일부는 “제재 결의 의무 준수를 촉구한다”고만 했다. 우리가 제재 위반을 방조하고 있는데 남 말 하듯 한다. 파악해 보기는 했나. 선거가 급했다지만 여당에서도 고민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본지 보도가 나온 직후 미 의원들이 먼저 “한국은 문제 수산물 수입을 중단하라”는 성명을 잇따라 보내왔다. “다른 나라도 아닌 한국이 ‘제재 구멍’이 되면 안 된다”는 이들의 말이 유독 씁쓸하게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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