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프레소] 심판의 날

정상혁 기자 2024. 4. 23.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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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심 잇따르자 심판 무용론
스포츠계 너머 사법 불신도
자격도 없이 “심판” 외치는
엉터리 판관 필히 심판해야

올해 한국 프로야구는 세계 최초로 ABS(자동 투구 판정 시스템)를 들여왔다. 바꿔 말하면, 세계에서 가장 먼저 도입을 서두를 정도로 심판에 대한 신뢰도가 낮았다는 얘기가 된다. ‘스트라이크’인지 ‘볼’인지 알려주는 로봇. 지난해 우승팀 LG 트윈스 염경엽 감독은 “형평성·공정성 측면에서 기존 심판들보다 낫다”고 말했다. 오심(誤審) 논란이 너무 많았다. 선언이 곧 법(法)이었다. 흥분한 관중이 경기장에 난입해 심판에게 헤드록을 걸고 폭행한 적도 있다. 절대적 권한을 누리던 심판, 이제 ABS 판정 내용을 경기장에 전달하는 신호수 신세로 전락했다.

그 불신은 지난 14일 또 한번 타당성을 획득했다. NC 다이노스 이재학 투수가 던진 공, ABS는 ‘스트라이크’를 선언했다. 그러나 판정음을 제대로 듣지 못한 심판은 ‘볼’로 잘못 선언했다. NC 측이 항의하자 심판 넷이 모여 의견을 나눴다. 실수를 바로잡을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음성은 분명히 볼로 인식했다고 하세요. 우리가 빠져나갈 건 그것밖에 없는 거예요.” 대화 내용이 TV 중계 방송에 고스란히 잡혔다. 인간이 못 미더워 기계를 들여왔는데, 그마저 배반한 인간. 중징계가 의결됐다. 이제 누가 심판을 믿겠는가.

근미래 로봇 심판이 야구장에서 판정을 내리는 상상도. 막연한 상상은 아니다. /칼로

오심도 경기의 일부로 받아들여지던 시절이 있었다. 체념이었다. 거칠게 항의해봐야 괜히 퇴장이나 당하니, 억울해도 참고 뛰어야 했다. 야구·농구·배구 종목 불문이다. 지난 6일 K리그에서 인천유나이티드의 무고사 선수가 선제골을 넣었다. 심판은 득점을 취소했다. 공격수 파울. 비디오 판독(VAR)까지 했지만 번복되지 않았다. 며칠 뒤 대한축구협회는 해당 판정을 오심으로 결론 내렸다. 인천은 경기에서 1대0으로 졌다. 심판은 정확성의 상징이지만, 실상은 그럴 수 없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다. 사람이기 때문이다. 심판의 ‘성향’을 분석하는 게 관례가 됐다. 심판을 현혹하는 눈속임이 ‘전략’으로 통용됐다. 그러나 세상이 달라졌다. ‘심판(인간) 무용론’까지 대두된다. 심판의 날이 오고 있다.

심판은 ‘심리’와 ‘재판’을 아우르는 말이다. 일상의 심판은 판사(判事)다. 그가 “아웃”이라고 하면 아웃이 된다. 이 막강한 지위는 ‘그깟 공놀이’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파괴력으로 인생을, 더 나아가 사회를 파탄 낼 수 있다. 이달 초 한국리서치가 ‘주요 헌법기관 역할 수행 평가’ 설문 결과를 발표했다. 법원에 대한 긍정 평가는 20%에 불과했다. 매년 국민 1000명을 대상으로 시행하는 이 조사에서 문재인 정권이던 2020년 1월엔 18% 였고, 지금도 큰 차이는 없다. ‘재판받는다면 누구를 선택하겠나’를 주제로 그해 진행된 설문에서 ‘AI 판사’(48%)가 ‘인간 판사’(39%)를 눌렀으니 예견된 결과다.

인간을 믿을 수 없어 법을 세웠다. 그 법을 인간이 다룬다. 모순이다. 심판하는 자는 그 모순의 극복을 위해 끊임없이 스스로를 심판대에 세워야 한다. “내가 옳을 때는 누구도 기억해주지 않는다. 내가 틀리면 누구도 잊지 않는다.” 메이저리그의 전설적 심판 더그 하비가 말했듯, 심판은 고독한 자리다. 그런 긴장과 압박 없이 페어플레이가 가능할 리 없고, 굳이 인간을 그 자리에 앉혀 놓을 이유도 없다. 도처에 ‘야매’ 심판관이 넘치는 시대. 범죄자들이 더욱 뻔뻔히 정권과 심판을 부르짖는다. 목청이 커질수록 그들의 속내는 선명해진다. “우리가 빠져나갈 건 그것밖에 없는 거예요.” 제대로 심판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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