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칼럼] 상속세, 눈치 아닌 미래를 보라

장우진 2024. 4. 22. 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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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우진 산업부 재계팀장

최근 들어 상속세를 감당하지 못해 알짜 기업을 매각하거나, 또는 공동 경영을 추진하는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 최근 오너가 분쟁으로 관심을 끌었던 한미약품이나 부광약품, 한샘 등이 대표적인 예다. 이들은 그래도 소위 '먹고 살 만한' 기업이라 대안을 찾을 기회라도 있었지만, 매각 대상을 찾기 어려운 중소기업 창업주들은 눈물을 머금고 사업을 접어야 할 만큼 우리나라의 상속세는 가히 재앙급이다. 국내 현행법상 상속세 최고세율은 50%로 세계 최고 수준이며, 일정 규모 이상 기업들은 최대주주 할증과세가 적용돼 실제 상속세율은 60%에 달한다.

현재의 상속세 최고세율은 1997년 45%, 2000년 50%로 오른 뒤 24년째 그대로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재계는 상속세율 인하를 요구했지만 번번이 무산됐다. 최근 총선에서도 여소야대 정국이 유지돼 세법 개정의 가능성은 여전히 미지수다.

윤석열 정부는 올해 초 코리아 디스카운트(한국 증시 저평가) 해소를 위한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을 추진했고, 이에 기업들은 지나친 상속세율을 낮춰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상속세를 내기 위해 최대주주들이 보유 주식을 대량으로 팔게 되면 기업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재계 1위 삼성마저도 천문학적인 상속세 부담 때문에 주식 담보 대출까지 끌어다 쓰고 있는 지경이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홍라희 여사,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 이서현 삼성물산 사장은 지난 2021년 12조원에 달하는 상속세를 부과받았다.

상속세를 내기 위해 이 회장을 제외한 세 모녀는 계열사 지분만 5조원 가까이 처분했다. 이부진 사장은 최근 삼성전자 지분 4400억원가량을 시간외대량매매(블록딜) 방식의 매각을 추진한다는 소식도 전해졌다.

효성의 경우 조석래 명예회장이 타개하면서 상속세만 수천억원에 달할 것이란 예상이 나온다. 지난달 주주총회의 뜨거운 감자였던 한미-OCI간 통합 추진도 상속세 재원 마련이 배경이었다. 오뚜기, 세아 등은 '상속세 모범 납부'의 대표 사례로 소위 '착한 기업' 타이틀을 얻었지만 그렇다고 자금 부담이 없던 것은 아니다.

현장에서 만나 본 재계 관계자들은 기업의 중장기 성장 가치를 담보하려면 안정된 경영권 보장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법인세·상속세율 인하 등의 세법개정이 화급하다는 얘기다.

특히 가업 승계의 걸림돌로 꼽히는 과도한 상속세율은 중소·중견기업뿐 아니라 대기업들도 쉽게 해소하기 어려운 난제로 거론된다. 기업의 주가 차익부터 때로는 경영권까지 노리는 행동주의펀드들도 한국의 상속세 제도에 대해서는 반대 입장을 표하고 있는 것이 이를 방증한다.

실제 다수 기업들의 총수일가는 계열사 주식을 처분해 재원을 마련하거나, 보유 주식을 담보로 대출을 받고 있다. 이는 상속세액 납부 부담을 넘어 지배구조 개편과 승계 작업을 어렵게 하는 요인으로 꼽힌다. 일부에서는 이러한 상속세율 인하 요구를 놓고 '대기업 편들어주기'라는 비판도 제기한다. 소위 '재벌가(家)'로 자금력이 풍부한 만큼 상속세율 인하는 '부자 감세'라는 질타이다. 24년간 해묵은 과제가 풀리지 못한 데에는 이를 '눈치' 보는 시선이 깔려 있다.

그러나 세계 각국이 인공지능(AI) 등 첨단 기술력 확보를 위해 수백조원의 국가 보조금까지 쓰고 있는 판에, 정작 기술 개발에 앞장서야 할 우리 대기업 총수들은 상속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배구조를 어떻게 바꿔야 할지 골몰하고 있다. 최소한 경쟁국 수준만 돼도 이 같은 걱정은 한시름 덜 수 있는데, 우리 기업들은 상속세라는 족쇄를 차고 글로벌 기업들과 경쟁하고 있는 처지다.

대한상공회의소가 지난달 28일 정부와 국회에 제출한 '2024년 조세제도 개선과제 건의서'에 따르면 G7 국가들은 상속세를 폐지하거나 최고세율을 인하해 왔다. 미국은 상속세 최고세율을 55%에서 35%까지 낮췄다가 2012년 40%로 고정했다. 독일은 2000년 35%에서 30%로 낮췄고, 이탈리아는 2001년 상속세를 폐지했다가 재정부족 문제로 2007년 이후 4%를 유지하고 있다.

국민들이 가장 바라는 것은 부자들을 끌어내려 다 같이 못 사는게 아니라, 모두 잘 먹고 잘 사는 것이다. '경영하기 좋은 환경'은 기업 경쟁력 확보, 민간소비 증대에서 일자리 창출까지 선순환이 이뤄지는 밑바탕이 된다. 주요 경제단체들이 총선 직후 "민생을 살리는 국회" "초당적 협치"를 당부한 것은 이 같은 간절함에서 비롯된 점임을 되새기길 바란다. jwj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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