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선후 野 독주…한국 정치에서 ‘협치’ 가능할까[핫이슈]

김병호 기자(jerome@mk.co.kr) 2024. 4. 22.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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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턴가 정치권에서 ‘협치(協治)’라는 단어가 유행이다. 총선에서 집권 여당이 패하고 나니 협치란 단어가 더 많이 등장한다. 하지만 말만 요란할 뿐 실제 쓰임은 요원하다. 개인적으로 협치라는 단어에 거부감이 좀 있다. 정치인들이 ‘국민’ ‘민생’과 함께 습관적으로 내뱉는 실없는 소리로 들린다. 여야 간 ‘협업’ ‘협조’ 라고 하면 될 것이지, 굳이 ‘협치’라고 해서 실행도 못할 것을 그럴듯하게 포장하려는 모양새가 맘에 들지 않는다.

다들 협치를 입에 달고 살지만 뭐를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각론으로 들어가면 막힌다. 각자마다 협치의 개념과 방법, 수준 역시 다르다. 야당 출신 ‘박영선 총리·양정철 비서실장’ 기용설까지 나왔지만 대체로 부정적이다. 이런 걸로는 민주당을 움직일 수 없으니 협치가 아니라며 토를 단다. 대통령이 국정을 책임지고 국회는 정부를 견제하는 시스템 하에서 서로 협조는 있을지언정 ‘통치’와 ‘책임’을 함께 하는 협치는 불가능하다는 목소리도 있다.

협치를 위해서는 다수 의석을 가진 야당 변화가 절실한데 총선 이후 행태를 보면 과연 협치라는 게 가능할지 의심부터 든다. 더불어민주당 등 야당은 23일 가맹사업거래공정화법(가맹사업법) 개정안과 민주유공자예우법(민주유공자법) 제정안을 본회의에 직회부하는 안건을 단독 처리했다. 지난 18일 양곡관리법 개정안 등 정부·여당이 반대하는 5개 법안을 직회부한데 뒤이은 것이다. ‘채상병 특검법’, ‘이태원 참사 특별법’ 등도 기어이 처리하겠다고 한다.

민형배 민주당 전략기획위원장은 22일 “협치라는 말을 머릿속에서 지워야 된다”며 “협치를 대여(對與) 관계의 원리로 삼는 건 총선 압승이란 민심을 배반하는 행위”라고 말했다. 차기 국회의장에 도전하는 정성호 민주당 의원은 “(의장이) 기계적으로 중립만 지켜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며 “대통령이 거부권을 갖기 때문에 법사위원장은 야당이 가져야 한다”고도 했다. 민주당은 국회의장은 물론 17개 상임위원회 위원장 직을 모두 맡겠다고 벼른다. 야당의 이런 자세로는 온전한 협치는 하세월이다. ‘말로만 협치’라는 비난이 나올 수밖에 없다.

협치할 기반 부족한 한국 정치
국민이 원하는 협치는 여야가 당리당략에 매몰돼 싸우지 말고 순조롭게 협력해서 일하는 모습일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를 금주 만나기로 했지만 그것이 협치라는 것으로 얼마나 이어질지는 모른다. 윤 대통령 입장에서 “나도 할 만큼 했다” 라거나, 이 대표한테는 총선 후 높아진 위상을 뽐내기 위한 ‘사진찍기’에 그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분명한 점은 우리 정치가 상대방에 너무나 불관용한데다 다수당의 ‘승자 독식’의 당위가 굳어지고 있어 협치할 기반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정치권은 ‘협치’를 ‘국민을 위해서’라는 표현 만큼이나 숱하게 써왔지만 현실에선 상대방과 협업해본 경험 자체가 부족하다.
윤석열 대통령이 1일 서울 중구 이화여고 유관순기념관에서 열린 제105주년 3·1절 기념식을 마치고 나오며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악수하고 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2017년 5월 취임식 직후 국회 야당 사무실을 찾아가 “야당은 국정 운영 동반자”라며 협치를 강조했다. 하지만 소득주도성장, 52시간 근무제, 최저임금인상, 대북·외교정책을 놓고 야당과 각을 세우면서 협치할 공간은 사실상 없었다. 특히 2020년 총선에서 여소야대가 실현되자 협치는 더욱 말뿐이고 다수 의석 폭거로 국회는 난장판이 됐다. 준연동형 비례대표제,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설치,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 관련 법안 통과는 협치가 아니라 다른 이득과 맞바꾸거나 적당히 타협한 야합(野合)으로 불렸다.

협치의 한 방편으로 연립내각을 구성하려 해도 의원의 정당 기속이 심한 한국 정치문화에서는 쉽지 않다. 2020년 국회 입법조사처 보고서를 보면 국내 정당은 기율이 강해 야당 인사가 내각에 참여하기 어렵다. 당 기율이 약하면 야당 의원이 자율과 독립성을 갖고 내각 참여가 용이하지만 기율이 강할수록 의원의 선택 여지가 줄어든다. 또 정당 공천을 못 받으면 재선이 어렵기 때문에 당보다 연립정부에 헌신하는 것은 좋은 선택이 아니다. 보고서는 “연립정부를 제도화한 국가에서조차 각료로 참여한 인사들은 소속 당에서 공격받고 퇴출됐다”고 했다.

尹 취임후 국회 읍소 초심 돌아가야
야당이 다수 의석 레버리지를 포기하지 않을 것인 만큼 윤 대통령이 먼저 변화를 보이는 게 필요하다. 따라서 이 대표한테 어렵게 전화를 걸어 만남을 요청한 것은 잘 한 일이다. 이 대표의 ‘국민 1인당 25만원’ 민생회복지원금 제안에 대해서도 윤 대통령 입장 표명이 있을 것이다. 새 국무총리를 뽑는데 국회 동의가 필요한 만큼 영수회담에서 논의할 목록 중 하나는 총리를 원활히 뽑을 수 있도록 야당 협조를 구하는 일이다. 헌법상 대통령의 명을 받아 내각을 통할하는 총리에 대해 국회가 신뢰를 보내는 것이야말로 정부와 여소야대 국회 간 협치의 시작이다. 총리를 앞세워 부처별 정책을 집행하려 하는데 초입 단계부터 막힌다면 협치를 운운하기도 민망하다. 형식적이긴 하지만 전 정부처럼 ‘여·야·정 국정 상설협의체’ 같은 것을 재가동해서 야권과 정례적인 대화 창구를 만드는 것도 고려할만 하다. 딱히 성과는 없더라도 정부가 야당과 이만한 노력을 한다는 점을 국민에 보여줄 수 있다.
민주당, 윤석열 대통령과 한동훈 전 법무장관 공수처 고발 (과천=연합뉴스) 신준희 기자 = 더불어민주당 검찰독재정치탄압대책위원회 박찬대 공동위원장(오른쪽부터)과 김승원 법률위원장 등이 17일 검찰특활비와 관련해 윤석열 대통령과 한동훈 전 법무부 장관을 고발하기 위해 정부과천청사 내 공수처로 들어가고 있다. 2024.4.17 hama@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윤 대통령은 2022년 5월 취임 후 엿새 만에 국회를 찾아가 추가경정예산안 통과를 도와달라며 읍소했던 초심으로 돌아가야 한다. 윤 대통령은 시정연설을 하며 “국회 도움이 절실하다”, “국회 협조를 간곡히 요청드린다”, “도와주실 것을 부탁드린다”며 몸을 낮췄다. 당시 2차 세계대전 때 영국 보수당(처칠)과 노동당(애틀리)이 연립내각을 구성해 초당적 협력한 사실도 거론했다.

윤 대통령은 임기 5년 전체를 여소야대 국회 속에 보내야 하는 유례없는 국면을 맞고 있다. 22대 국회에는 민주당뿐 아니라 조국혁신당, 개혁신당까지 가세해 대정부 공세를 강화할 것이다. 조국 대표와 이준석 대표는 채상병 특검법 처리에 공동 대응 입장을 밝히며 벌써 압박한다. 추미애, 이언주 같은 목소리 큰 민주당 의원들도 새로 포진했다. 지난 2년 간 야당 폭거를 경험한 윤 대통령으로선 그들과 타협하거나 아쉬운 소리를 하기 싫겠지만 남은 임기를 버티려면 취임 때 모습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한국형 협치모델 만들면 성공한 셈
차제에 윤 대통령은 거대 야권을 상대하는데 있어 ‘한국형 협치’ 모델을 만들어보면 어떤가. 지금처럼 말뿐인 협치가 아니라 갈등과 분열이 커진 한국 정치문화에서 국민 통합과 야당 협조를 이끌어낼 수 있는 방식을 찾아내는 것이다. 훗날에 이런 협치로 그때 난국을 타개했다는 무용담을 들을 수 있게끔 협치란 이런 것이라는 모범답안을 내놨으면 한다. 윤 대통령과 여당이 협치란 바로 이런 것이라는 사례를 제시할 수 있다면 여소야대 국회 속에서 나름 성공한 정권으로 기록될 것이다.

김병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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