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시대에 소환된 인문학"…한세예스24문화재단 인문학 지원 계속된다
2019년 스티븐 슈워츠먼 블랙스톤 최고경영자(CEO)가 1억5000만 파운드(약 2217억원)를 기부해 화제가 됐다. 영국 가디언에 따르면 당시 르네상스 시대 이후 단일 기부로 최고액이었는데, 투자처가 더 의외였다. 세계 최대 사모펀드 운용사를 경영하는 CEO가 거액의 기부금 사용처로 지정한 곳은 다름 아닌 ‘인문학 연구소’였다.
그가 인문학에 투자한 이유는 인공지능(AI) 때문이었다. 당시 그는 “철학과의 ‘인공지능 윤리 연구소’에 투자해 AI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사회문제를 인문학의 관점에서 연구해달라”고 말했다.
한국에도 올해로 3회째 인문학연구 지원사업을 펼치는 재단이 있다. 김동녕 한세예스24홀딩스 회장이 2014년 사재를 출연해 설립한 한세예스24문화재단이다. 2022년부터 매년 순수 인문학 과제 10편을 선정해 각 1200만원씩 총 1억2000만원 규모의 연구비를 지원하고 있다.
기업이 미술이나 음악 등 문화예술에 투자하는 메세나 활동은 국내에서도 여러 사례를 찾을 수 있다. 하지만 방언학이나 고전학 등 순수 인문학까지 지원하는 기업은 드물다. 국가 예산에서도 인문 사회가 차지하는 비중은 미미하다. 2024년 교육부가 발표한 인문사회 분야 학술연구 지원 예산은 4220억원으로 과학기술 분야 R&D 예산(26조5000억원)의 약 1.5% 수준이다.
명정 한세예스24문화재단 사무국장은 “연구원, 강사, 교수 등 다양한 직책에서 인문학 발전을 위해 힘쓰는 학자들이 비용 걱정 없이 연구에 매진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연구비 지원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한세예스24문화재단이 인문학에 주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다시 인간 본연에 대한 탐구가 필요해졌기 때문이다. AI 기술이 빠르게 발전하는 과정에서 인간적인 관점, 윤리적 판단력 등에 대한 기준이 필요한데 ‘인간 본질’에 대한 철학적 정의가 선행돼야 한다.
젠슨 황, 샘 올트먼, 일론 머스크 등 빅테크 CEO들이 인간 지능 수준의 ‘AGI(범용인공지능)’에 대한 정의나 등장 시점을 모두 다르게 말하는 이유 또한 “인간성에 대한 정의가 과학자마다 모두 다르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명정 사무국장이 설명하는 인문학 지원사업의 취지도 ‘AI 시대의 인간성’과 맞닿아 있다. 그는 “과학기술의 빠른 발달로 인간이 점점 풍요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게 된 것은 반가운 일이지만 인간 본연에 대한 탐구는 점점 부족해지는 것 같다”며 “한세예스24문화재단의 중요한 목표는 인간을 탐구하는 순수 인문학이 재도약하고 발전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방언학부터 고전까지···인문학에 진심인 한세
2022년과 2023년 진행된 인문학연구지원 사업에서는 미술사, 불교, 철학, 고전문학, 인도사상 등 다양한 연구 분야가 선정됐다. 연구 필요성과 목적, 연구 내용 및 방법 등을 중심으로 연구 주제의 문제 의식과 기여도, 선행 연구 및 연구 계획서의 완성도 등을 종합해 선정작을 결정했다.
언어학 중에서도 사람들의 관심이 적은 방언학도 지원하고 있다. 하영우 전주대 국어교육과 교수는 2017년 섬진강 유역의 방언학을 연구하던 중 제대로 된 연구 지원이 없어 연구에 큰 어려움을 겪었으나 이 사업 대상자로 선정돼 연구를 이어갈 수 있었다.
하 교수는 “한세예스24문화재단의 인문학연구지원사업은 여타의 학술 지원과 달리 온전히 연구에만 집중할 수 있는 지원체계를 갖추고 있어 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하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구례, 광양, 하동으로 구성된 섬진강 유역은 전남과 경남의 접경지대여서 다양한 방언 특성을 보인다. ‘ㅣ, ㅔ, ㅐ, ㅡ, ㅓ’와 같은 단모음을 대상으로 음향음성학적 측면의 공간 구조와 세대에 따른 방언 변이를 탐구한 하 교수는 “섬진강 유역의 노년층은 현재까지도 /ㅔ/와 /ㅐ/를 구분해서 발음하고 있지만 청소년층은 방언 변이로 두 모음을 구분하지 못하고 모음의 공간 구조도 달라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하 교수는 앞으로도 각 지역의 말들이 만나 이뤄지는 다양한 한국어의 특성을 지속적으로 탐구할 계획이다.
K-콘텐츠의 원형이 되는 고전문학 연구도 최종작으로 선정됐다. 송미경 한국항공대 인문자연과학부 조교수는 ‘한국 고전 서사문학에 나타난 책방형(冊房形) 인물의 형상과 특징’에 대한 내용을 다룬 연구를 펼쳤다. 한국 고전문학은 최근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끄는 K-콘텐츠의 원형이며 인간의 본질과 사회의 얽힘 등을 서사를 통해 드러낸다는 점에서 더욱 시의성 있다.
송 교수는 “작품에 등장하는 보조 인물이나 주변 인물의 형상, 그들이 빚어내는 삶의 양상에 부여된 구체성과 현실감이 인간과 사회의 얽힘에 관한 경험적 인식의 밀도를 보여준다”며 “지방관을 따라 내려가 문서나 회계 일을 보며 비서 역할을 한 책방(冊房)은 고전 서사 문학에서 수령과 불가분의 관계인 만큼 작품 속 형상도 수령과의 관계 구도에 따라 달라지는 양상을 보인다”고 설명했다.
두 교수는 인문학에 대한 관심 확대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송 교수는 “인문학은 인간, 인간의 삶, 인간다움의 근본과 의미, 가치를 묻고 탐구하는 학문이다”며 “우리가 사는 세상은 빠르게 변화하고 있으며 가까운 미래조차 정확히 예측하기 어렵지만 불확실성과 불안정의 시대에 유연함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인문학이다”고 말했다. 하 교수 역시 “인문학은 모든 응용 분야의 시작이자 학문의 출발점으로 존중받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세계 각국으로 사업 확대할 것···음악 분야까지 진출
한세예스24문화재단은 인문학 지원뿐만 아니라 아시아 예술의 가치를 높이는 여러 사업을 펼치고 있다.
2015년부터는 베트남, 인도네시아, 태국, 미얀마, 필리핀 등 아세안의 젊은 문화예술인을 발굴하고 지원하는 ‘국제문화교류전’ 사업을 진행했다. 2022년에는 국내 최초로 근현대 문학 작품을 우리말로 번역한 ‘동남아시아문학총서’를 출간했다.
명정 사무국장은 “한세예스24문화재단은 인문학연구지원 사업 외에도 젊고 트렌디한 작가와 미술 작품을 국내에 소개해 국내 대중의 관심을 환기해왔고 앞으로도 국가 간 예술 교류에 활기를 불어넣는 활동을 지속하겠다”고 말했다.
2024년에는 새로운 예술 분야로의 외연 확장에도 나선다. 백수미 신임 이사장과 함께 성악 중심의 ‘한세예스24문화재단 클래식 공연’도 진행한다. 오는 9월에는 디트리히 피셔 디스카우의 마지막 제자이자 왕족의 바리톤이라 평가받는 독일 성악가 베냐민 아플의 첫 내한 콘서트를 개최할 예정이다.
명 사무국장은 “재단의 새로운 음악 공연을 통해 인간의 삶과 사회 이슈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풍성한 문화 경험을 제공할 계획이다”며 “문화예술이 사회에 미치는 긍정적 영향을 확대해 그에 대한 관심이 사회공헌으로 이어지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임나영 인턴기자 ny924@hankyung.com
Copyright © 한경비즈니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