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R&D에 돈 쏟아붓더니…한미약품의 놀라운 반전 [안재광의 대기만성's]
노보노디스크란 덴마크의 제약사가 2023년 8월에 유럽 증시에서 시가총액 1위에 오르는 일이 있었어요. 루이비통으로 유명한 세계 최대 명품기업 LVMH가 오랜 기간 1위였는데, 이거 제친 겁니다. 이게 끝이 아니었어요. 이듬해인 2024년 3월엔 테슬라마저 넘겼습니다. 이때 시가총액이 6000억 달러(약 820조원)에 이르렀죠.
노보노디스크는 갑자기 뜬 회사죠. 비만 치료제 ‘위고비’와 ‘삭센다’로 대박을 터뜨렸습니다. 특히 ‘위고비’는 요즘 없어서 못 팔 정도로 세계적으로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는데요. 일론 머스크도 ‘위고비’로 살을 뺐다고 털어놨죠.
이런 대박 신약은 먼 나라 얘기 같지만 한국도 가능성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에 한국에서 대박 신약을 개발한다면 이 회사가 유력한 후보가 아닐까 생각이 드는데요. 개발 중인 신약 후보만 30여 개에 달하는 신약에 진심인 기업 한미약품입니다.
한미약품은 중앙대 약대를 나온 임성기 회장이 1973년에 세운 회사입니다. 이분이 창업 이전에 약국을 했는데요. 약국 이름이 본인 이름을 딴 ‘임성기약국’이었죠. 판매하는 약도 본인 이름에서 영감을 얻어서 주로 성병 치료제를 팔았다고 해요. 약국을 할 때부터 사업 수완이 좋았던 것 같아요. 성병 환자가 약국에 들어오면 별도 공간에서 상담을 해주고, 또 약국에 가는 것조차 꺼림칙하게 여겼던 사람들을 위해서 전화 주문도 받아줬습니다. 성병을 굉장히 창피하게 생각했던 시절이었거든요.
이런 식으로 성병에 특화된 약국이란 입소문이 전국에 나면서 임성기약국은 자리를 잡고 돈도 많이 법니다. 제약사를 설립한 것도 약국 성공 이후 사업을 확장하기 위해서였어요. 남의 약만 팔 게 아니라 내 약을 팔아보자 했던 겁니다. 첫 제품으로 내놓은 게 ‘TS산’이란 것이었는데요. 복합 항생제인데 성병뿐만 아니라 방광염, 기관지염 같은 질환에 많이 처방됐습니다. TS산을 개발하자마자 엄청 팔려 나갔어요. 한미약품은 창업 5년 만인 1978년에 매출 5억원을 넘겼고요. 지금 가치로 하면 40억원쯤 번 것이죠. 1986년에는 연구센터를 세웠고 1988년에 상장도 했습니다.
임성기 회장은 생전에 연구개발에 ‘집착’이란 단어가 어울릴 정도로 대단히 진심이었습니다. “연구개발은 나의 신앙이고 목숨이다”라고까지 했습니다. 그만큼 신약을 개발하고자 하는 의지가 굉장히 강했다고 봐야겠죠. 그렇다고 글로벌 제약사처럼 약 하나 개발하는 데 수천억원씩 돈을 쓸 수는 없었고요. 단계적으로 밟아 나갔어요. 1단계는 제네릭, 그러니까 특허가 끝난 약을 빠르게 카피해서 만드는 전략으로 갔습니다. 2단계는 개량 신약. 기존에 나온 약의 단점을 보완하거나 효능을 개선하는 식으로 개발했고요. 3단계에서 비로소 세상에 없는 신약을 개발하려고 합니다.
한미약품은 현재 기존 약을 카피하거나 개량해서 매출을 주로 내고요. 여기서 번 돈을 3단계인 신약 개발에 투입하고 있어요. 한미약품의 매출 상위 약을 보면 고지혈증 치료제 ‘로수젯’, 복합고혈압 치료제 ‘아모잘탄’, 역류성식도염 치료제 ‘에소메졸’, 전립선비대증 치료제 ‘한미탐스’, 발기부전 치료제 ‘팔팔정’ 등인데요. 전부 제네릭이나 개량 신약입니다.
3단계 신약 개발에서도 돈을 법니다. 10여 년 전부터 큰 성과를 내고 있어요. 신약을 어느 정도까지만 개발한 뒤 가능성이 보이면 글로벌 제약사에 기술을 팔고 로열티를 받는 식으로 기술 수출, 라이선스 아웃을 한 겁니다.
2011년 ‘오라스커버리’ 기술 수출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무려 11건의 라이선스 아웃 계약을 했어요. 특히 2015년에는 총 계약 금액이 8조원에 이르는 5건의 기술 수출을 성공하며 대박을 터뜨렸어요. 이 기술을 가져간 제약사들이 임상 3상에 성공해서 판매까지하면 한미약품은 계약금 이외에 기술료와 로열티까지 받게 되는데요. 여기서의 반전은, 아니 우려했던 점은요. 중도에 계약이 틀어지거나 기술을 포기하는 것인데 그 일이 일어납니다.
한미약품 신약 기술을 가져간 제약사들이 줄줄이 권리를 반환한 겁니다. 특히 프랑스 제약사 사노피가 가져간 기술인 지속형 인슐린, 그리고 당뇨병 치료제 ‘에페글레나타이드’의 실패가 뼈아팠습니다. 계약 금액이 39억 유로, 5조5000억원에 달하는 초대형 프로젝트였고요. 또 상업화가 충분히 가능할 것으로 많이들 봤거든요. 여기에 더해 베링거인겔하임이 폐암 치료제 ‘올무니팁’의 임상 3상을 중단하고 한미약품과 계약 해지를 하면서 충격을 줬습니다.
그런데 다 안 된 것은 아니죠. 2012년 스펙트럼이 사 간 호중구 감소증 치료제 ‘롤론티스’, 미국에선 ‘롤베돈’으로 불리는데요. 계약 10여 년 만인 2022년 9월 미국 식품의약국(FDA) 허가를 받고 미국에서 판매되기 시작한 겁니다. 호중구 감소증은 주로 암환자가 항암제 치료를 할 때 나타나는 일종의 부작용입니다. 체내 호중구가 감소하면 면역력이 크게 떨어져서 다른 질병에 취약해지거든요. 이걸 개선하는 약이에요. 현재 이 시장은 암젠의 ‘뉴라스타’가 장악하고 있는데 롤론티스는 약효 시간이 뉴라스타에 비해 더 길다는 점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이것보다 더 크게 기대하는 게 있죠. 비알코올성지방간염(NASH) 치료제 개발입니다. 현재 미국의 MSD, 머크라고도 불리죠. 머크가 한미약품의 기술을 받아서 개발 중인 ‘에피노페그듀타이드’의 임상 2상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NASH는 술을 안 마신 사람조차 간에 지방이 쌓여 염증이 생기는 질환인데요. 세계적으로 환자가 급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치료제가 없어서 신약만 개발이 되면 잭팟이란 말이 나오고 있어요. 지금까지 나온 임상 결과는 굉장히 좋았는데요. 상업화하기까진 앞으로 꽤 긴 시간이 걸리겠지만 성공만 한다면 세계 제약 판도를 바꿀 만큼 엄청난 파장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게 하나 더 있어요. 아까 사노피가 당뇨병 치료제로 개발하려고 하다가 포기한 ‘에페글레나타이드’입니다. 한미약품은 사노피가 진행한 임상 3상 결과에서 비만 치료제로서의 가능성을 확인하고, 현재 자체적으로 개발하고 있는데요. 당뇨병 임상 3상에선 5% 수준의 체중 감소 효과를 보였다고 해요. 그런데 이땐 비만 치료제 목적이 아니었어서 식단과 운동을 철저하게 통제한 다른 비만 약과는 달랐어요. 전문가들은 비만 치료제 목적으로 임상을 다시 진행한다면 체중 감소 효과가 5%보다는 훨씬 클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비만 치료제 시장은 덴마크의 노보노디스크가 장악하고 있는데, 수요는 너무 많고 약의 공급은 적어서 글로벌 제약사들이 일제히 뛰어든 영역이죠. 특히 일라이릴리가 2023년 11월에 FDA 승인을 받은 ‘젭바운드’의 경우 체중감소 효과가 뛰어나고 가격도 위고비에 비해 20%가량 저렴해 엄청난 돌풍을 일으켰어요.
여기에 맞서 노보노디스크는 주사제인 위고비를 먹는 약 형태로 바꿔서 출시하려고 합니다. 주사로 맞는 것보다는 먹는 약이 훨씬 부담이 덜해서 판매가 잘될 테니까요. ‘아미크레틴’이란 이름으로 내놓을 계획입니다.
비만 치료제 시장이 세계적으로 급성장하고 있어서 개발만 가능하다면 매출은 많이 나올 수 있어요. 세계 비만 치료제 시장은 2020년 30억 달러에서 2023년 60억 달러로 두 배나 커졌고요. 2028년엔 270억 달러까지 성장할 것이란 전망이 나오고 있어요. 단 1%만 이 시장을 가져간다 해도 2028년 3000억원 이상의 매출을 낼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한미약품은 임성기 회장 사후에 가족 간 분쟁이 생겼어요. 임성기 회장의 부인 송영숙 회장과 장녀 임주현 부회장이 OCI와 합치려고 했고, 여기에 맞서 장남 임종윤 씨와 차남 임종훈 씨가 사모펀드와 손잡고 싸웠죠. 2024년 3월 주주총회 결과 OCI와 통합은 무산됐습니다. 한미약품은 앞으로 어떤 길을 걷게 될까요. 어떤 길을 가더라도 과거 임성기 회장이 가려고 했던 길, 신약 개발의 꿈을 잃지 않길 기대해 봅니다.
안재광 한국경제 기자 ahnj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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