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스트 출신 과학자가 도축장 돌며 짐승 피 받아온 이유 [BreakFirst]
3초의 정적. 여성 헬스케어 기업 이너시아의 김효이 대표(26)가 창업하겠다고 주변에 말했을 때 마주한 반응입니다. 정적 뒤에는 “왜 굳이?”라는 질문도 따랐습니다. 우려는 당시 23살의 어린 대학원생이 창업을 하겠다고 나섰기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창업 아이템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뛰어든 영역은 생리대 연구와 제조였습니다.
‘한 번 쓰고 버리는 제품에 왜 혁신적 기술이 필요해?’라는 친구들의 의구심, ‘전공을 살려 인공지능(AI) 분야로 창업하는 게 낫지 않느냐’는 교수님, 부모님의 우려까지…. 하지만 ‘내 불편함을 내 손으로 해결하겠다’는 그의 의지를 꺾지 못했습니다.
일회용 생리대에 들어 있는 휘발성유기화합물(VOCs)로 인해 생리통 등 여러 신체적 불편 증상이 생긴다는 의혹은 2017년 이후 계속됐습니다. 실제로 VOCs 추정치가 생리통이나 신체 증상과 관련됐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환경부 발표(2022년)도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연구 속도가 느려도 너무 느렸습니다.
‘친환경 물질을 쓰면서 흡수력은 더 좋게 만들 수 없을까?’ 관성적으로 사용하는 물건에 대해 ‘불편한’ 감각을 깨우는 것은 혁신의 시작이었습니다. 김 대표는 카이스트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세 명의 여학우와 함께 밤샘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과학고 조기졸업, 카이스트 학사, 석사, AI 박사과정과 ‘생리대 개발’이 쉽게 연결되지는 않는데요.
카이스트에서는 지금도 굉장히 좋은 연구가 진행되고 있지만, 그 결과가 실제 우리 삶으로 다가오는 데에는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런 생각에 공감하는 친구들 네 명이 모여서 ‘우리가 연구해서 우리 삶을 직접 바꿔보자’는 결심을 했죠. 그중 하나가 생리라는 문제였고요. ‘생리 너무 고통스럽다. 이 문제 해결하면 노벨상 수상감이다’라는 말을 저희끼리는 매일 하거든요. 저도 고등학교 시절 제 생리 기간을 전교생이 알았다고 할 정도로 생리통이 심했어요. ‘생리통을 해결할 방법은 뭘까?’가 삶의 큰 과제였거든요. 그런데 다들 불편함을 느끼면서도 이 문제를 누군가 해결해 주기만 기다리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우리의 불편함을 직접 타파하자는 목표를 가지고 이너시아를 설립하게 됐죠.
생리대를 감싸는 커버에는 유기농 순면을 사용했지만, 그 속에 들어간 흡수체에 미세 플라스틱을 사용하는 제품도 있었습니다. 미세 플라스틱을 뺀 제품의 경우 흡수력이 떨어지는 문제가 있었고요. 저희는 수술용 지혈제 성분인 셀룰로스에 주목했습니다. 친환경 물질인 셀룰로스를 써서 논란에서 자유롭고, 흡수력도 만족스러운 제품을 개발하기로 했습니다.
―의료 AI 박사과정을 밟다가 생리대를 개발하겠다고 하니 주변 반대도 컸을 것 같습니다.
교수님, 동료들에게 창업하기로 했다고 하면 “축하한다” “응원한다”고 해요. 그다음 “무슨 창업을 하는데?”라는 질문에 “생리대요”라고 하면 3초간 정적이 흐르더라고요. 당시 AI를 접목한 소프트웨어 창업이 유행하는 시기였거든요. 저희만 하드웨어, 그것도 생리대를 개발하겠다고 하니 당황할 만도 했죠. 시장조사를 위해 전국을 다니며 생리대 개발자, 생산자, 마케터들을 만났는데 악담도 많이 들었습니다. ‘생리대는 싸게 많이 만들수록 좋다’, ‘생리대 만들겠다고 한 친구들의 끝이 좋지 않았다’ 같은 말을 하더라고요.
도축장에 가 피를 구하니 ‘대체 뭐 하는 사람들이냐’ 의심도 받았죠. |
―주변 사람들의 우려를 뒤로 하고 생리대 개발에 뛰어드셨습니다.
학부생이 쓸 수 있는 공용 실험실에서 몰래 실험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대학원 수업과 과제가 끝난 오후 8시부터 새벽 4시까지가 활동 시간이었습니다. 새벽에 실험실 불이 켜져 있으니 출근하던 교수님들이 문을 벌컥 열었다가 놀라신 적도 있어요. 생리대 흡수력을 테스트하려면 피가 필요해 전국 도축장도 돌았습니다. 물과 피의 속성이 다르거든요. 전국에 2개 있는 도축장에 직접 가서 피를 공수해 왔어요. 도축장에서 일하시는 분께 “버리실 피 좀 주실 수 있을까요?” 하니 “대체 뭐 하는 사람들이냐”며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죠. “생리대를 개발하고 있는 카이스트 학생입니다”라고 말씀드리니 그제야 남은 선지나 피를 주셨어요.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어서 그만두고 싶었던 적은 없나요?
낮에는 AI를 연구하는 대학원생, 밤에는 생리대를 개발하는 창업가라는 이중생활을 이어가길 6개월. 공장에서 만든 생리대 샘플은 300개를 넘었습니다. 카이스트 대학원생들의 패기를 믿고 수억 원을 투자한 투자자는 제품 출시를 압박했습니다. 뛰어도 모자란 그 시점, 김 대표는 왔던 길을 되돌아가겠다는 결정을 내립니다. 바보 같았던 걸까요.
―6개월 넘게 개발하던 생리대를 버리고 원점으로 돌아갔다고요.
천연 소재인 셀룰로스만으로 충분한 흡수력을 구현할 수 없어서 셀룰로스에 다른 원료들을 합성해 흡수체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저희가 원하는 ‘100%의 안전성’을 보장한 결과물이 나오지 않더라고요. 인풋은 셀룰로스였는데 아웃풋은 다른 물질이 된 거니까요. 다른 원료 첨가 없이 오로지 셀룰로스만 활용해 흡수체를 만들기로 목표를 재설정했습니다. 셀룰로스의 분자 구조, 모양 등에 따라 흡수력, 재질, 사용감이 달라지기 때문에 가공 작업을 수없이 많이 반복하며 최적화에 공을 들였습니다. 그 과정에만 1년이 걸렸습니다.
―공정을 ‘최적화’했다는 게 어떤 의미인가요?
흡수체라고 해서 무조건 흡수력만 높이는 게 아닙니다. 물 흡수 비율은 낮추고, 분비물인 혈(血)의 흡수 비율은 월등히 높이는 식입니다. 물이 덜 흡수되니 덜 축축해지고, 혈 흡수를 많이 하니 덜 찝찝하겠죠? 세밀한 부분까지 조정해서 소비자의 착용감을 개선했습니다. 높은 수준의 안전성 검사도 진행했습니다. 투자금이 바닥을 보이고 있었지만 수억 원을 들여 세포독성 검사, 피부 자극 검사를 진행했어요.
―‘생리대에는 기술력이 필요 없다’고 말하던 업계 관계자들의 반응도 궁금합니다.
슬로건 하나도 내부에서 판단하지 않아요. 우선 다 출시합니다. 소비자들이 가장 정확하고 냉정하게 판단해주거든요. |
―연구자로 시작해 이론을 현실로 구현하는 개발자, 투자를 유치하고 제품을 마케팅하는 사업가로 변해왔습니다. 그 과정이 쉽진 않았을 것 같습니다.
전 연구실에서 좋은 기술을 만들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던 사람이었어요. 훌륭한 기술을 접목한 생리대를 개발했으니 투자가 붙고, 제품이 팔리는 게 당연하다고 본 거였죠. 그런데 정작 투자자들의 반응은 냉랭했습니다. “공돌이들은 물건만 잘 만들고 끝이다. 그 물건을 소비자가 정말 원하는지, 소비자들이 어떤 걸 바꾸길 원하는지 모른다”고 말하는 분도 있었어요. “기술력이 뛰어난 기업보다 판매력이 좋은 기업에 투자하는 게 낫다”고 대놓고 말하는 투자자도 있었고요. 결국 메시지는 같았어요. ‘소비자 지향적’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었죠.
―소비자 지향적인 사고방식, 어떻게 실천하셨나요?
생리대 개발한다니 피식피식 웃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
―매출의 성장세가 가파른데요.
올 1, 2월 매출이 지난해 연 매출을 넘었습니다. 월 매출은 수억 원대에 접어들었고, 일 매출만으로 3000만 원을 달성한 날도 있습니다. ‘나의 불편함에 동감하는 소비자가 어딘가에 있다’라는 확신 하나로 가망이 없어 보이는 시장에 뛰어든 건데, 제 확신이 맞았다는 걸 두 눈으로 확인하고 있어요. 창업 초반 컨퍼런스를 갔을 때 생리대를 개발한다고 하면 피식피식 웃는 사람도 있었어요. ‘쟤넨 뭐 하는 애들일까’라는 의심의 눈초리도 받았고요. 지금은 다릅니다. 좋은 제품을 개발해냈고, 또 소비자가 좋아해주고 있으니까요.
―이너시아를 어떤 기업으로 키우고 싶으신가요?
‘이너시아’의 뜻이 ‘관성’이잖아요. 여성들이 불편함을 느끼면서도 관성적으로 사용해왔던 모든 물건을 과학 기술로 하나둘씩 바꿔 나가겠다는 의미를 담았죠. 지금까지 개발을 시도했던 제품이 30개 정도 됩니다. 불편함을 느꼈던 물건이라면 모두 개발에 나설 겁니다. 어떤 여성 소비자가 ‘이 물건이 사고 싶은데 어디 걸 사지?’라고 고민할 때 주저 없이 이너시아를 선택할 수 있는 그 날을 꿈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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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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