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살 처음 만난 루쉰…나림은 그의 문학에 한없이 심취
- 中 민족의 영혼으로 추앙한 인물
- 그의 작품 접하고 벼락맞은 느낌
- 전집 읽기 위해 백화문까지 익혀
- 인문성에 깊이 공감해 연구 몰두
- 루쉰 시각으로 세상을 보려 하니
- 우익은 “용공분자 ”좌익은 “반동”
- 양 진영 공격받아 곤경 처하기도
- 슬픔이 창작 동력, 지사적 문학 …
- 나림과 루쉰, 서로 닮은 점 많아
사람과 책과의 만남이 사람과 사람과의 만남보다 더욱 결정적인 경우가 있다. 이병주와 루쉰의 만남이 바로 그런 경우다. 벼락 맞은 것 같은 첫 만남 이후 이병주는 끊임없이 루쉰과 대화했다. 루쉰의 시각으로 시대를 봤고, 에세이스트 루쉰의 통찰과 레토릭을 교본으로 삼았다. 시종 족탈불급(맨발로 힘껏 뛰어도 따라잡을 수 없음)을 느꼈다. 루쉰은 따라 하기는 힘들고 그렇다고 버릴 수도 없는 참 버겁고 거북한 교사였다.
루쉰(魯迅 1881-1936)은 중국 근현대 문인 중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다. 중국 문인들은 ‘민족의 영혼’으로 추앙한다. 루쉰은 작가로서 골기(骨氣)와 학자로서 깊이, 문인으로서 인격과 문격(文格)을 두루 갖춘 대재(大才)다. ‘광인일기’와 ‘아큐정전’은 백화문(白話文) 운동의 대표작이다.
루쉰의 소설과 에세이는 혁명 시기를 강단 있게 살아낸 한 인간의 기록으로, 그리고 절절한 휴머니즘으로 근현대 문학의 고전이다. ‘중국소설사략’은 최초의 중국 소설사다. 서양 근대의 소설 개념을 넘어 중국의 소설은 신화 전설부터 시작했다고 당당하게 기술한다.
루쉰은 지사로서의 문인 이전에 진지하고 꼼꼼한 고전학자이기도 했다. 나림이 루쉰을 만난 것은 도쿄에서 공부하던 스무 살의 어느 날이었다. 그날을 정확히 기억하는 이유는 일본이 미국 영국에게 요란하게 선전포고를 한 날이기 때문이다. 1941년 12월 8일, 하와이 진주만 기습에 성공했다는 뉴스를 크게 보도하는 도쿄 거리는 상당히 들떠 있었다. 그날 오후 간다(神田)의 서점에서 ‘루쉰 선집’ 문고판을 구입했다. 200페이지 남짓 얇은 책이라 두 시간 안 걸려 완독했다. 그리고 루쉰에게 빠졌다. 사람을 사로잡는 무서운 힘을 가진 작가임을 절감한 것이다.
당시 나림은 프랑스 문학도답게 “랭보와 말라르메 등 프랑스 상징주의 문학에 미쳐있었는데, 루쉰을 읽고 부끄러워졌다.”. 바로 이웃에 이런 문학이 있는데 이때까지 뭘 했나 하는 뉘우침에 프랑스 문학과 잠시 결별하고 루쉰에 몰두했다. 고서점에서 ‘대 루쉰 전집’을 구했으나, 구어체 문장으로 쓰여 있어 한문 지식만으론 역부족이었다. 중국인 동학에게 백화문을 배워 그 장벽을 넘었다.
▮루쉰의 시각으로 보다
일본은 일찍부터 루쉰 연구열이 대단했다. 1927년 단편소설 ‘고향’이 번역된 뒤 모든 소설과 대부분 산문이 여러 형식으로 출판됐다. 루쉰의 작품은 중국의 특수성을 넘어 동아시아적 보편성이 있었고, 전통과 근대 사이를 고민하는 한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더해 혁명적 열정 또는 사회주의 리얼리즘 맥락으로 러시아 작가 고리키와 루쉰을 비교하는 풍조마저 있었다.
나림은 교직에 있던 시절 루쉰을 다시 읽었다. “진주 시절 나는 술을 마시지 않으면 루쉰에 빠져 있었다. 한다는 말이 주로 루쉰에 관한 것이었고, 루쉰 연구가 내 평생 과업이 될지도 모른다”고 했다. 해방정국은 루쉰 같은 스승이 절실한 시기였다. 나림은 루쉰의 시각으로 좌익과 우익을 봤다. 그 결과는 우익에게는 용공분자로, 좌익한테는 악질 반동으로 몰렸다. 가장 너그러운 평가가 회색분자였다. 사람다움을 견지하며 인간의 사이에 서 있었더니 양쪽에서 다 돌이 날아와 얻어맞는 신세가 된 것이다. 루쉰도 비슷한 비난을 받고 곤경에 빠진 적이 있다.
20여 년 후 진주 시절 친구 음악가를 만났더니 그의 첫 질문이 “아직도 루쉰 연구하고 있나?”였다. 나림은 루쉰 따라 하기 끝에 필화(筆禍)를 겪었다. “필화의 원인은 루쉰을 충전하게 배우지 못한 나의 성실성 부족과 기량 미흡에 있다”고 겸손했지만, 친구에겐 “중공이 루쉰을 너무나 신격화하며 이미지를 흐려놓고 있어 루쉰의 의미를 활달하게 파악하기 어렵다. 그래서 차일피일하고 있다”고 얼버무렸다. 친구는 소련이 베토벤을 숭상한다고 베토벤을 외면해야 하느냐며 얼굴을 찌푸렸다.
친구 김점덕은 성악가이자 음악평론가였고, 나림이 가장 즐겨 듣는 곡이 베토벤의 교향곡 ‘운명’이었다. 사실 나림이 ‘루쉰과의 대화’를 쓴 이유 중 하나도 마오쩌둥을 비롯한 공산당 지도자들이 루쉰을 과도하게 띄우고 자기편으로 삼고 있는 현실에 대한 반감이었다. 루쉰 자신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심각한 왜곡이다. 나림이 루쉰에 깊이 공감한 것은 혁명성보다 인간성 내지는 인문성 때문이었다. 농사를 예로 들자면, 나림이 생각하는 혁명의 문학이란 좋은 씨를 뿌리고 때맞춰 잡초를 뽑아주며 쟁기질을 깊게 하라는 것이다. 인간의 문학은 좋은 씨를 뿌리든 잡초를 열심히 제거하든 토양이 산성화되어 있으면 아무 소용이 없으니 토양 비옥화 작업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인간의 문학, 혁명의 문학
혁명의 문학이 그해 그해 작물에 집중하는 것이라면, 인간의 문학은 대지의 생산성에 집중하여 긴 흐름으로 보람을 기대하는 것이다. 루쉰의 소설은 눈앞의 혁명 성과보다 인간의 본질 문제에 중점을 두었다. 선동보다 은유와 풍자로 인간다움을 깨우친다. 마오쩌둥은 루쉰을 혁명의 문화 아이콘 삼아 사상가이자 혁명가로서 숭상했다. 마오쩌둥은 옌안(延安) 시절 쓴 ‘심원춘 설’에서 자신을 칭기즈칸과 송 태조 등 역대 가장 인정받는 다섯 황제와 비교하여 그들의 장단점을 열거한 뒤 진정한 풍운 인물은 당대의 나밖에 없다는 자부심을 드러낸 바 있다.
자만심이 뚝뚝 묻어나는 시다. 그런 그가 유독 루쉰에게만은 “루쉰은 중국의 첫 번째 성인이다. 공자도 아니고 나도 아니다. 나는 그의 학생이다”며 겸손했다. 루쉰의 책을 성경으로 읽었다. 그러던 마오쩌둥이 반우파 투쟁이 한창이던 때에는 루쉰이 살아있었더라면 감옥에 갇혀 글을 쓰고 있거나 상황을 알고 아무 소리 않고 가만히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나림은 이 대목에서 사르트르의 ‘스탈린의 망령’을 인용한다. 사르트르는 혁명의 전과 후 상황이 현저하게 달라지는 과정을 그렸는데 나림은 루쉰이 그나마 공산혁명 전 1936년 타계한 것이 명성을 위해 다행한 일이라고 말한다. 사르트르는 혁명 전에는 당과 인민의 이해가 일치하고 노동자와 농민의 이해가 일치하며 정치인과 문화인의 이해가 일치하지만, 혁명 후에는 그 이해관계에 분열과 대립이 발생해 결국 인민을 위한다는 당이 인민을 억압하게 된다고 했다. 루쉰이 만약 문화대혁명 시기까지 생존했더라면 과연 어떤 선택을 했을까.
궈머뤄(郭沫若)처럼 자아비판 자기부정을 하며 연명했을까 아니면 라오서(老舍)처럼 홍위병의 박해를 못 이겨 호수에 몸을 던졌을까. 나림은 자기 소신에 철저했던 루쉰은 결코 타협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선동선전에 동원되지도 않았을 테고, 폭정에 동조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혁명 전 일치의 시대에만 살아 인간주의적 문학자의 자질과 혁명적 논객의 면목이 절묘하게 조합되는 모습만으로 남게 된 것이다.
▮공통점
나림과 루쉰의 공통점이 많다. 현실에서 밀려난 시절 느꼈던 적막감과 슬픔이 창작 동력이 된 것도 유사하고, 힘 있는 간결체 문장을 쓰는 것도 아주 닮았다. 평범 속에서 의미를 조명해 내는 진실함과 성의도 비슷하고, 시대의 파도를 넘지 못하고 낙백(落魄)한 인물들을 애틋하게 여겨 작품화한 대목도 비슷하다. 무엇보다 먹으로 쓴 거짓말은 피로 쓴 사실을 덮을 수 없다는 지사적 문인으로서도 동지다. 니체에 심취했던 것도 같다. 나림은 루쉰의 소설 ‘아큐정전’을 10번 이상 읽었다. 엄청난 분량의 잡감문(雜感文)을 정독했다. 루쉰은 장편소설 1편 없이 중편 1편과 단편 32편, 그리고 잡감문만으로 대문호가 된 희귀한 경우다. 잡감문이란 에세이다. 루쉰의 글을 읽으면 잡(雜)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잡을 잡스럽다는 부정적 의미로 풀면 잡문은 정문(正文)과 대조되며 그만큼 격이 떨어진다. 하지만 잡에는 절충하고 융합한다는 긍정적인 의미도 있다. 말하자면 집대성한다는 뜻이다. 제자백가의 잡가(雜家)가 바로 그런 뜻의 학파다.
오늘날 르네상스 맨이란 존재가 바로 ‘잡놈’이다. ‘잡놈’, 어려운 경지다. 잡감이란 문체는 루쉰에겐 문학성을 지닌 논문이다. 나림도 기막힌 잡감문을 많이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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