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광암 칼럼]‘펄펄 끓는 물가’에 기름 붓겠다는 이재명 대표
李 “13조 민생회복지원금 주로 논의”
현 경제상황선 물가만 부채질할 우려
궁극적으론 민생회복 ‘지연금’ 될 것
이게 뭐 그리 어려운 일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윤 대통령의 회담 제안이 총선 참패와 지지율 폭락에 떠밀려서 하는 ‘액션’인지, 그간의 독선과 불통을 걷어내고 협치에 나서려는 ‘진심의 일보(一步)’인지는 좀 더 지켜볼 일이다. 대통령실이 무슨 의제를 내놓을지도 아직은 명확지 않다.
먼저 의제를 밝힌 쪽은 이 대표다. 이 대표는 전화로 초청을 받은 19일 당일 유튜브를 통해 “(민생회복)지원금 문제 등 이런 얘기를 주로 해야 한다”면서 “개헌 문제 이런 것들도 여야 간에 대화가 가능하면 최대한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고 했다. 여기에 더해 민주당 안에서는 “채 상병·김건희·이태원 특검법 수용을 촉구할 것”이라는 이야기도 나온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개헌이든, 동시다발 특검이든 회담 테이블에 올리지 못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민생회복지원금만큼은 이 대표가 빨리 잊어버리는 것이 경제와 민생을 위하는 길이라고 본다.
민생회복지원금은 이 대표가 이번 총선 과정에서 내놓은 공약이다. 이 대표의 주장대로 1인당 25만 원, 가구당 100만 원씩을 지급하려면 13조 원이 필요하다. 기존 예산을 조정해서 마련할 수 있는 ‘쌈짓돈’이 아니다. 국채를 발행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인데, 결국은 또 만만한 미래세대의 주머니를 털자는 얘기다.
이 대표의 민생회복지원금은 문재인 정부가 2020년 4·15총선을 앞두고 추진했던 1차 재난지원금과 일견 흡사해 보인다. 소득 수준을 가리지 않고 전 국민에게 현금을 살포한다는 점이 그렇고, 4인 가구 기준 지원금을 100만 원으로 잡았다는 점이 그렇다. 그러나 실질적으론 전혀 다르다. 4년 전에는 나름의 불가피성과 정책적 정합성이 있었지만 지금은 정반대다.
시곗바늘을 잠시만 돌려보자.
코로나19가 본격적으로 확산된 2020년 2월부터 공급망 쇼크가 글로벌 경제를 강타했다. 팬데믹 공포가 금융으로 파급되면서 3월 9일에는 전 세계 증시가 ‘검은 월요일’을 맞았다. 유가도 폭락을 거듭해 4월에는 석유 선물가격이 마이너스까지 떨어지는 전대미문의 일이 벌어졌다.
한국에서는 2월부터 자영업 점포들이 줄줄이 문을 닫기 시작했다. 가계가 지갑을 닫으면서 1분기 민간소비는 환란 이후 최악의 수준으로 곤두박질쳤다. 그나마 물가가 안정돼 있다는 것이 천행이었다.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2019년 0.4%로 54년 만에 최저치를 찍은 데 이어 2020년에도 0.5%에 그쳤다. 현금을 아무리 뿌려도 당장은 물가 걱정을 할 일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팬데믹 기간 중 살포된 현금이 불붙인 인플레이션과 전 세계가 사활을 건 전쟁을 벌이는 중이다. 한국의 올해 2, 3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두 달 연속 3%대를 찍었다. 2022년 5%대에 이어 작년 3%대 중반의 고물가를 버티면서 대응 여력을 소진한 상태에서 질질질 이어지는, 숨차고 끈적끈적한 인플레이션 국면이다. 한쪽에서는 고물가 처방약인 고금리가 숨통을 조여온다.
농산물의 경우는 사과와 배가 1년 전보다 80%가 넘게 올랐다. 이달 총선이 끝나기가 무섭게 치킨·햄버거 업체들은 ‘이젠 눈치 볼 게 없다’는 식으로 앞다퉈 인상된 가격표를 내다 붙이고 있다. 조미김 값이 오르면서 구내식당이나 백반집에서는 김 반찬이 사라지는 중이다.
앞으로도 문제다. 천재지변과도 같은 두 ‘고물가 변수’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국제유가의 경우 이스라엘-이란 간의 확전 움직임으로 19일 WTI 기준 배럴당 86달러까지 치솟았다. 4년 전 1200원대 초반이던 원-달러 환율은 1400원을 위협하고 있다. 단순한 환율 변동 효과만으로도 해외에서 들여오는 물건과 서비스 값이 4년 전보다 11.6% 비싸졌다.
지금 가장 시급한 민생 현안은 성장도, 고용도, 부동산도 아닌 물가라는 데 이견의 여지가 거의 없다.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가 그렇다. 선거가 있는 나라에서는 예외 없이 ‘바보야, 문제는 물가야’라는 아우성이 터져 나온다. 민생이 곧 물가고, 물가가 곧 민생이다.
이 대표가 주장하는 민생회복지원금의 효과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지만, 양보해서 소비 진작 효과가 있다고 치자. 하지만 일회성 반짝 효과가 사라지면 고물가에 기름을 부어 인플레이션 탈출을 더디게 만드는 부작용만 남게 될 것이다. 종합적으로 보면 민생회복‘지원금’이 아니라 민생회복‘지연금’이 맞는 이름일 것이다. 민생 협치를 하자는 영수회담 테이블에 올릴 ‘메뉴’가 아니다.
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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