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을 은폐하면 벌어지는 비극들 [전쟁과 문학]
인디애나폴리스함 사건의 진실
전쟁 끝날 무렵 참사에 여론 들끓어
사고 축소하고 덮으려던 미군 사령부
당시 함장에게 모든 책임 덧씌워
12세 어린 소년이 밝혀낸 진실
함장 자살로 세상 떠난 뒤의 일
해병대 채 상병 사건 진실 밝혀야
진실은 하나고 거짓은 여러 개다. 거짓이 쏟아지기 시작하면 진실이 드러나는 건 쉽지 않다. 역사에서 이런 일은 한두번 반복된 게 아니다. 1945년, 종전을 앞뒀던 미 해군의 인디애나폴리스함 사건이 대표적이다. 수십년 후 어린 소년에 의해 진실이 드러났지만 거짓 희생양이 됐던 군인은 이미 세상을 떠난 후였다. 우리라고 이런 일이 없을까.
1945년 6월 미군은 처절한 전투 끝에 오키나와를 점령했다. 그러나 일본은 항복을 거부하고 결전을 부르짖었다. 연합군 수뇌부는 고뇌에 빠졌다. 일본을 점령하려면 70만명의 인명 피해가 발생한다는 보고서가 나왔다. 연합군사령부를 더 초조하게 만든 건 시베리아를 거쳐 연해주로 이동 중인 소련군이었다.
태평양의 섬들을 징검다리를 건너듯 하나씩 점령하면서 나아가는 연합군보다 육로로 진격할 소련군 속도는 훨씬 빨랐다. 소련은 만주와 중국 북부, 한반도까지 손쉽게 점령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 전에 일본의 항복을 받아낼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미국은 원자폭탄 투하를 결정했다.
1945년 7월 16일, 미 해군 인디애나폴리스함은 원자폭탄에 쓰일 고농축 우라늄을 운송하는 임무를 맡고 출항했다. 화물의 정체는 당시 함장 찰스 버틀러 맥베이(1898~ 1968년) 대령 외에 아무도 알지 못했다.
인디애나폴리스함은 대잠對潛(적의 잠수함을 상대하는 일) 장비를 갖추고 있지 않았다. 그런데도 해군사령부는 '호위 구축함을 붙여 달라'는 맥베이 함장의 요구를 거절했다. 사령부는 우라늄 수송은 1급 기밀이므로 여러 척의 함선이 같이 움직이면 일본군이 눈치챌지도 모른다고 일축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출항한 인디애나폴리스함은 마리아나 제도 티니안섬에 무사히 당도했다. 우라늄을 육군 항공대에 넘긴 인디애나폴리스함의 다음 행선지는 필리핀 레이테섬이었다. 이번에도 호위함을 붙여 달라는 맥베이 함장의 요구는 거부당했다.
종전을 앞둔 미 해군은 온통 축제 분위기였다. 인디애나폴리스함 승무원들도 마찬가지였다. 레이테섬으로 항해하는 인디애나폴리스함 승무원들은 음악을 들으면서 만찬을 즐겼다. 그들은 레이테섬에서 종전을 맞이하고 고향에 돌아가게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그들의 전쟁은 그렇게 쉽게 끝나지 않았다.
당시 일본 해군 함대는 거의 전멸했지만 필리핀 해역에 소수의 잠수함이 남아 있었다. 1945년 7월 30일 새벽 0시 15분 필리핀 근해에서 잠항하던 일본군 잠수한 I-58은 인디애나폴리스함을 포착했다. I-58 함장 하시모토 모치쓰라(1909~2000년) 중좌는 어뢰 발사를 명령했다. 6발의 어뢰 중 2발이 인디애나폴리스함을 강타했다.
공격을 받은 인디애나폴리스함은 다급히 구조 신호를 발신했다. 이 구조신호는 I-58에도 수신됐다. 미군 구축함이 몰려올 것을 우려한 I-58은 곧 침몰 해역을 벗어났다. 하지만 구조 신호를 받은 미군 정보부는 그것을 아군을 유인하려는 일본 해군의 계략으로 오판했다. 심지어 한 기지의 통신 장교는 술에 취한 채 구조신호를 묵살했다.
함선이 급격히 기울자 맥베이 함장은 전원 퇴선 명령을 내렸다. 두 동강이 난 인디애나폴리스함은 12분 만에 침몰했다. 1196명의 승무원 중 생존한 900여명이 구명조끼와 구명보트, 부유물에 의지한 채 구조를 기다렸다. 인디애나폴리스함이 격침된 해역은 식인 상어가 출몰하는 곳이었다. 부상자들이 흘린 피 냄새를 맡은 수십 마리의 상어들이 생존자들을 덮쳤다.
생존자들은 공포에 질려 부상자들을 떨쳐냈고 상어들은 버려진 부상자들을 물어갔다. 날이 밝았지만, 이번에는 태양의 열기와 극심한 갈증이 생존자들을 괴롭혔다. 식량과 의약품도 금방 고갈됐다. 일부 장교는 부유물과 보트를 독차지하려고 부상병들을 밀어냈다. 생존자들은 저체온증, 탈수, 과다출혈, 식인 상어의 공격으로 속절없이 죽어갔다.
침몰 5일 후에야 생존자들은 정찰비행 중인 카타리나 수상기에 발견됐다. 구조된 생존자는 불과 316명이었다. 전쟁 막바지에 벌어진 이 참사가 알려지면서 미국 여론이 들끓었다.
유족들의 항의와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여론에 당황한 미군 사령부는 이 사고를 덮으려고 했다. 그러러면 적당한 희생양이 필요했다. 모든 비난이 맥베이 함장에게로 쏠렸다.
미군 사령부는 맥베이 함장이 호위 구축함을 요구한 사실과 구조신호를 보낸 사실을 은폐했고, 어뢰 공격을 받았을 때 회피 기동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만 부각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침몰한 700여척의 군함 중 함장에게 책임을 전가한 것은 인디애나폴리스함이 유일했다. 맥베이 함장은 불명예제대는 면했으나 비난 여론에 시달렸다. 결국 그는 1968년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인디애나폴리스함의 비극은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죠스'의 모티브가 됐다. 그리고 이 영화를 보고 자란 한 소년이 진실을 규명했다. 1998년, 12살 소년 헌터 스콧은 역사 탐방 과제를 수행하다가 '죠스'의 모티브가 된 인디애나폴리스함 사건에 흥미를 가졌다.
스콧은 150명이 넘는 인디애나폴리스함 생존자들을 직접 만나 인터뷰하면서 맥베이 함장이 최선을 다했으며, 구조 신호를 무시한 해군의 방심이 비극의 원인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스콧의 인터뷰가 언론에 공개되자 맥베이 함장의 명예회복을 지지하는 탄원 운동이 미국 전역에 번졌다.
일본 잠수함 I-58의 함장 하시모토 중좌가 미국 의회에 보낸 편지도 큰 몫을 했다. 1999년, 당시 91세의 고령인 하시모토는 편지에 인디애나폴리스함의 구조 신호를 수신한 사실과 인디애나폴리스함이 어뢰를 피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음을 상세히 적었다. 하시모토는 미국 의회에 편지를 보낸 이듬해에 사망했다. 보안이 해제된 해군 문서에 적힌 내용도 하시모토의 증언과 일치했다.
마침내 2000년 빌 클린턴 대통령은 맥베이 함장을 복권하고 생존자들에게 은성무공훈장을 수여했다. 생존자들은 눈물을 흘리며 맥베이 함장의 영전에 훈장을 바쳤다. 한때는 적이었지만 군인의 명예를 지키고자 했던 하시모토의 증언과 12살 어린 소년의 용기로 맥베이 함장과 생존자들은 55년 만에 명예를 되찾았다.
2016년 반 피블스 감독의 영화 'USS 인디애나폴리스'가 개봉됐고, 2017년에는 해저 5500m에 가라앉은 인디애나폴리스함의 잔해가 공개됐다. 진실 규명과 명예회복에는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인디애나폴리스함의 비극과 훗날의 진실 규명 노력은 문학 텍스트가 아니라 실화다. 그럼에도 문학 텍스트를 소개하는 이 지면에 거론하는 건 외면하기 어려운 현실 때문이다. 구명조끼도 입지 않은 채 수해복구를 하다가 한 병사가 숨졌고, 사건을 수사하던 장교는 항명죄를 뒤집어썼다. 책임자인 국방부장관은 공수처의 조사를 앞두고 호주 대사로 임명돼 출국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은 정권 심판 여론을 자극했고, 총선에서 분노한 민심이 표출했다. 인디애나폴리스함의 실종된 진실은 수십년이 지나서야 밝혀졌다. 지금 현실에서는 진실이 오래 표류하지 않기를 기원한다.
이정현 평론가 | 더스쿠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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