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세화, 세상을 평화롭게 만들려 전진한 사람”

김가윤 기자 2024. 4. 21.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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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을 수놓은 보랏빛 라일락 아래 엷은 미소를 띠고 어딘가 먼 곳을 바라보는 고 홍세화 장발장 은행장(한겨레 전 기획위원)의 영정이 자리 잡았다.

이백윤 노동당 대표는 추모사에서 "홍세화는 늘 낮은 곳으로 임했다.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이 세상을 논평하고 비판했다. 하지만 일선에 서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며 "녹색 깃발을 든 전태일이 되어, 그리고 배제당하는 이유를 하나씩 품고 사는, 소수자라고 불리는 모든 다수자가 선생님의 길을 따라 함께 오르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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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홍세화 선생 발인 및 영결식
18일 별세한 홍세화 장발장은행장 영결식이 21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신촌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서 열려 참석자들이 헌화하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4월을 수놓은 보랏빛 라일락 아래 엷은 미소를 띠고 어딘가 먼 곳을 바라보는 고 홍세화 장발장 은행장(한겨레 전 기획위원)의 영정이 자리 잡았다. 비 그친 하늘이 쾌청했다. 홍세화 선생의 영정은 몸 담았던 한겨레 사옥 옥상 정원을 시작으로, 8층 논설위원실, 7층 편집국 등을 차례로 돌아봤다. 고인은 날카롭게 한겨레를 비판했지만, 가슴 속엔 늘 ‘구독 신청서’를 품고 다닐 정도로 한겨레를 아꼈다. 영정을 든 가족은 한겨레 시민 주주 7만여명의 이름이 적힌 동판을 한참 동안 바라봤다.

한국사회에 ‘똘레랑스’를 전했던 작가이자 언론인, 사회운동가인 고 홍세화 장발장 은행장의 영결식 및 발인이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 영결식장에서 21일 아침 치러졌다. 유족과 추모객들은 홍 선생의 영정을 들고 한겨레 사옥을 한차례 둘러본 뒤, 서울시립승화원을 거쳐 고인이 영면할 경기 남양주 마석 모란공원으로 향했다. 고인의 마지막 길엔 한겨레신문 구성원과 이백윤 노동당 대표,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 등 옛 동료, 활동가, 정치인 등 100여명이 배웅에 나섰다.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은 영결식에서 “홍세화, (이름) 그대로 세상을 널리 평화롭게 만들기 위한 전진했던 위대한 사람이었다. 홍세화 선생이 보여준 뜨거운 휴머니즘은 세상 사람 모두에게 밝은 거울이자 청명한 목탁 소리가 되어 우리 삶의 지표로 자리 잡을 것”이라며 “세화야 잘 가라”라는 말로 오랜 벗의 마지막을 기렸다.

학창시절 반독재 투쟁에 나섰던 고인은 ‘남민전’ 사건에 연루돼 1979년 고국을 떠나 프랑스에서 장기간 망명 생활을 했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출간한 에세이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는 한국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후 2002년 완전히 귀국해 한겨레신문사에 입사해 기획위원으로 일했다. 회사를 떠난 뒤 정당인으로 2011년 진보신당 공동대표 등을 지냈고, 2015년부터는 사회단체 ‘장발장 은행’의 은행장을 맡았다. 이 밖에도 학벌 없는 사회 공동대표, 학습협동조합 가장자리 이사, 소박한 자유인 대표 등 그가 가진 다양한 직함은 대부분 한때 난민이었던, 그 자신과 같은 한국 사회의 어느 소수자 곁에 있기 위한 것이었다.

18일 별세한 홍세화 장발장은행장 유가족이 21일 오전 영결식을 마친 뒤 고인이 재직했던 한겨레신문사 사옥을 들러 일했던 곳들을 영정사진과 함께 둘러보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이백윤 노동당 대표는 추모사에서 “홍세화는 늘 낮은 곳으로 임했다.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이 세상을 논평하고 비판했다. 하지만 일선에 서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며 “녹색 깃발을 든 전태일이 되어, 그리고 배제당하는 이유를 하나씩 품고 사는, 소수자라고 불리는 모든 다수자가 선생님의 길을 따라 함께 오르겠다”고 말했다.

고인은 한겨레신문 ‘1호 영업사원’으로도 불렸다. 최우성 한겨레신문 대표이사는 “자택으로 찾아뵈었을 때 ‘나만큼 한겨레를 따끔하게 비판하는 사람이 있느냐, 건강하게 나아서 다시 한겨레를 비판하는 칼럼을 쓰겠다’고 했는데 그 약속을 영영 지키지 못하게 돼서 한편으로는 야속하다”고 말하며 울먹였다. 고인은 지난 14일 녹색병원에서 한겨레와의 마지막 인터뷰를 끝낸 뒤 ‘아, 이제 숙제가 하나 끝났다’는 혼잣말을 했다고 한다. 그 뒤로 병세가 악화해 나흘 뒤 동료들 곁을 떠났다.

김가윤 기자 gay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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