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핵 위기’ 링컨, 초심 다지는 272 단어 연설로 내부 결집 [노석조의 외설]

워싱턴 D.C./노석조 기자·조지타운 방문연구원 2024. 4. 20.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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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년 전 ‘게티스버그 연설’ 현장
전쟁 길어지자 反링컨 목소리 커져
’노예 폐지·국가 통합’ 전쟁 목표 강조하며 분란 다잡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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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3년 11월 19일 링컨(빨간 실선) 대통령이 게티스버그에서 연설하기 직전 정부 관료와 장병 등에 둘러싸여 있는 모습. /링컨 기념관

19일(현지 시각) 오전 8시 워싱턴 D.C.와 노던 버지니아 일대는 비가 부슬부슬 내렸습니다. 운전대를 잡고 펜실베이니아 주(州) 게티스버그 국립 군사 공원으로 향했습니다.

남북전쟁 당시 남부연합군의 로버트 E. 리(Lee) 장군의 이름을 딴 도로 등을 거쳐 80여 마일을 달렸습니다.

게티스버그 국립 군사 공원은 남북 전쟁 중이던 1863년 11월 19일 최대 격전이자 남북 전쟁의 승패가 갈린 게티스버그 전투를 기리는 곳입니다.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라는 문구가 담긴 링컨의 그 유명한 ‘게티스버그 연설’의 현장이기도 합니다.

바람이 불고 평소보다 쌀쌀한 날씨였지만, 게티스버그에는 관광객들로 북적였습니다. 중·고등학생들이 스쿨버스를 타고 와서 견학 중이었습니다. 전투복 차림의 미군 장병 수십명이 열과 오를 맞춰 전적지를 둘러보고 있었습니다.

공원은 차를 타고 돌아다녀도 찬찬히 보다보면 수시간은 족히 걸릴 정도로 넓고 볼 거리가 많았습니다. 군데 군데 160여년 전 남북 전쟁 당시에 사용하던 포를 그대로 재현해 놓았습니다.

설명을 듣다보니 ‘리틀 라운드 탑(Little Round Top)’과 ‘데블스 덴 (Devil’s Den)’은 6·25 전쟁 때의 백마고지 전투와 다부동 전투를 떠올리게 했습니다. 리틀 라운드 탑 언덕은 연합군(북군)에게 전술적 우위를 제공하는 고지였습니다. 북군은 이 언덕을 사수하면서 남군의 공격을 막아내 승기를 잡았습니다.

데블스 덴은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남군과 북군이 피비린내 나도록 치열한 전투를 벌인 곳입니다. 집채만한 암석이 언덕과 계곡 곳곳에 박혀 있는 거친 지형인데, 이 곳에서 잔혹하게 육탄전을 벌이며 싸웠다고 합니다.

19일 게티스버그 국립 군사 공원에 세워진 링컨 흉상과 그의 연설 기념비. /노석조 기자·조지타운대 방문연구원

무엇보다 링컨의 흉상과 그의 게티스버그 연설 기념비가 세워진 곳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게티스버그 연설은 미국 역사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 중 하나로 평가됩니다. 미국 정치와 교육 과정에서 반복적으로 인용되고 학습됩니다.

미국의 정체성과 가치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세대가 지나도 계속 할 수 있게 합니다. 게티스버그 연설은 시대를 초월한 메시지입니다.

이날 먹구름이 끼고 바람이 부는 것이 날씨가 을씨년스러웠습니다. 그래선지 161년 전 게티스버그 전투의 전사자 봉헌식에서 링컨이 비장하게 연설하는 분위기가 더 실감나게 상상됐습니다.

당시 링컨은 대통령으로서 최대 위기였습니다. 연설하기 석달 전인 1863년 8월 남북 전쟁의 사망자는 총 25만여명에 달했습니다. 전쟁 발발 2년이 넘은 시기로 북부에서는 반전(反戰) 분위기가 커져만 갔습니다.

링컨을 원망하는 사람도 많아졌습니다. 당시 평화주의를 내세운 미 민주당은 공화당의 링컨을 어떻게든 끌어내리려 했습니다. 탄핵 절차가 실제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정부 내에서도 반링컨 여론이 커질 정도로 링컨의 지지세는 갈수록 꺾였습니다.

민주당은 전쟁을 계속하려는 링컨을 비난하며 남부와 휴전 협정을 맺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런 와중 링컨의 징병 소집 명령은 큰 논란이 됐습니다. 뉴욕에서 징병 반대 폭동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당시 펜실베이니아 주지사는 링컨에게 이런 우려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만약 지금 선거가 치러진다면 그 결과는 아주 좋지 않을 겁니다. 징병제는 큰 거부감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민주당 지도자들은 편견과 증오를 선동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사람들 마음에 독을 풀어넣었습니다. 우리에게 불리하게 작용하고 있습니다.”

게티스버그 연설은 이런 상황이 지속되는 가운데 이뤄진 것이었습니다. 링컨은 주지사·국무장관·하버드총장 출신의 에드워드 에버렛이 2시간이란 긴 연설을 한 뒤에 두번째로 했습니다. 링컨의 연설은 2분 남짓으로 단 272단어 밖에 되지 않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링컨은 게티스버그 언덕에서 정부 관료, 그리고 장병들로 둘러싸인 상태에서 연설했습니다.

“여든 하고도 일곱해 전, 우리의 선조들은 자유 속에 잉태된 나라,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믿음에 바쳐진 새 나라를 이 대륙에 낳았습니다. 지금 우리는 그 나라, 혹은 그같이 잉태되고 그같이 헌신된 나라들이 오래도록 버틸수가 있는가 시험받는 내전을 치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전쟁의 거대한 격전지가 되었던 싸움터에 모였습니다. 우리는 그 땅의 일부를, 그 나라를 살리기 위하여 이 곳에서 생명을 바친 이들에게 마지막 안식처로서 바치고자 모였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그들에게 해 줘야 마땅하고 옳은 일인 것입니다.

(중략)

지금 이 자리에서 말하는 것을 세상은 주목하지도, 오래 기억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용사들이 이곳에서 한 일은 결코 잊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 살아남은 이에게 남겨진 일은 오히려, 이곳에서 싸운 이들이 오래도록 고결하게 추진해온, 끝나지 않은 일에 헌신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남은 일은 오히려, 명예로이 죽은 이들 뜻을 받들어, 그분들이 마지막 모든 것을 바쳐 헌신한 그 대의에 더욱 헌신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분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하고, 신의 가호 아래, 이땅에 새로운 자유를 탄생시키며, 국민을 위한, 국민에 의한, 국민의 정부가 지구상에서 사라지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and that government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 shall not perish from the earth).”

링컨 대통령과 게티스버그 연설 원고 이미지. /링컨 박물관

전쟁에 지친 장병들과 각료들에게 애초 우리의 전쟁은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믿음’을 지키기 위한 것 아니었냐고 재확인하는 연설이었습니다. 흩어지는 마음을 다잡자는 외침이었습니다.

연설은 짧았지만, 강렬했습니다. 군의 사기를 살리고 평화를 내세운 휴전 유혹에서 벗어나게 했습니다. 리더의 말과 글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줍니다.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연설 기념비에서 다시금 연설을 읽어보는데 ‘지금 이 자리에서 말하는 것을 세상은 주목하지도, 오래 기억하지도 않을 것입니다’라는 대목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2~3분이란 짧은 연설을 하면서 이런 말까지 하다니 링컨이 조금은 자신감을 잃었던 것 아닐까, 의기소침했던 건 아닐까 하는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연설은 그의 예상과는 달리 161년이 지나서도 두고두고 힘있는 연설로 전 세계에서 회자됩니다. 연설이 진솔했고, 무엇보다 절박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많은 한국인이 미 동부를 여행하지만, 좀처럼 게티스버그는 찾지 않는다고 합니다. 한국 정치인들이 종종 워싱턴 D.C.나 뉴욕을 찾는데, 한번쯤 게티스버그를 들러 링컨의 리더십을 배우는 계기를 가지면 어떨까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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