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희의 정치사기] 尹 대통령이 정조의 막후정치에서 배워야 할 점

김세희 2024. 4. 20. 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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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가 1799년 1월 20일 심환지에게 보낸 편지 일부<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참으로 호로자식이라 하겠다", "과연 어떤 놈들이기에 감히 주둥아리를 놀리는가", "입에서 젖비린내 나고 미처 사람 꼴을 갖추지 못한 놈."

조선 22대왕 정조가 신하에게 보낸 비밀편지에 늘어놓은 인물평이다. 상당히 격정적이다. 당대 성군으로 손꼽히는 정조가 과연 이런 내용의 편지를 보냈을까하는 의구심도 든다. 그러나 실제 그가 썼다. 편지를 받은 상대를 알면 더 충격적이다. 정적(政敵)으로 알려진 심환지다.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은 2009년 이런 놀라운 사실이 담긴 비밀편지를 세상에 공개했다. 정조와 심환지는 1796년 8월20일부터 1800년 6월15일까지 총297통의 편지를 주고 받았다. 정조가 심환지가 속한 노론 벽파(僻派,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가 죽임을 당했을 때 찬동했던 정파)와는 적대적인 관계를, 남인 시파(時派, 사도세자를 옹호한 정파)와는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는 통설은 깨진 셈이다.

오히려 시파 중심으로 조정의 권력 구도가 흘러갈 것을 염려해 벽파에게 분발을 촉구하는 글귀도 확인된다. 정조는 1797년 4월 11일 보낸 편지에서 "요사이 벽파가 탈락한다는 소문이 자못 성행한다 하는데, 내허외실(內虛外實)에 비한다면 그 이해 득실이 과연 어떠한가. 이렇게 한 뒤라야 우리 당(黨)의 광사(狂士)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1800년 5월 30일 편지에선 "경들처럼 이렇게 두려워하고 모호해서야 장차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라며 더 노골적인 감정을 드러냈다.

자신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정치 현안을 심환지의 입을 통해 관철시키기도 했다. 정조는 편지로 미리 심환지에게 의도를 전하고, 조정에서 심환지가 자신의 주장인 것인 양 말하도록 한 뒤 윤허하는 형식을 취했다. 1797년 지방수령들이 백성들에게 나눠 줄 쌀을 수탈하고 있다는 첩보를 들은 뒤, 심환지에게 이 문제를 당상관과 삼사 관원이 모인 자리에서 언급하라고 한 사례가 대표적이다. 실제 <정조실록> 1797년 10월 7일조를 보면, 우참찬 심환지가 정리곡을 돈으로 나눠주고 쌀을 받아들이는 폐단을 먼저 발언하자, 정조가 이를 칭찬하며 표피 1장을 내린 기록이 있다.

심지어 인사 문제도 자주 조율했다. 자신의 최측근인 정약용의 인사도 의논할 정도였다. "정(丁, 정약용)을 서반(西班)으로 보내지 않은 것은 선을 권하는 뜻이 전혀 아니다. 한두 가지 일 때문에 반세(半世)의 원한과 유감이 날로 심해지니, 이러한 것들을 어찌 유념하지 않겠는가. 참판(홍명호)이 들어올 것이니, 이번 정사에서 서반으로 보내도록 하는 것이 어떠한가?"(1797년 6월 27일)

정약용이 천주교 신자라는 비방을 받아 동부승지를 사양하는 상소를 올렸던 일을 우회적으로 언급한 뒤, 다른 사람으로 대체하는 방향을 제시한 것이다.

이처럼 편지는 정조와 심환지 등 벽파 중신들이 밀착된 정치적 동반자였다는 막후의 진실을 전하고 있다. 정조는 남인 영수인 채제공 등 다른 당파 중신들과도 비밀편지를 통해 현안을 조율했다. 국왕으로서 어느 한 정파만을 지지할 수 없었던 현실을 직시한 뒤, 각 정파의 대립되는 입장을 모두 포용하면서 정국의 주도권을 잡아간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19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에게 다음주 중 만나자고 제안했다. 취임한 지 710일만이다. 윤 대통령이 이 대표의 단독회동 제안을 계속 거절해 온 점에 비춰봤을 때, 만남이 내키진 않았을 것이다. 자칫 대장동 등 7개 사건에 10개 혐의로 기소된 피의자와 정치적 '거래'를 하는 것 아니냐는 말을 들을 수도 있다. 그러나 지난 4·10 총선에서 여당인 국민의힘이 패배한 뒤, 현실적으로 민주당과 협치하지 않고서는 국정 운영자체가 어렵다는 현실을 직시한 것으로 보인다.

윤 대통령은 원치 않는 현실에 직면할 수 있다. 이 대표가 회동 자리에서 채상병 순직 사건 수사 문제, 김건희 여사 특검 문제 등을 거론할 수 있다. 이 때 윤 대통령은 그 동안 어떤 일이 있었는지 이 대표에게 설명하고 이해를 구해야 한다.

정부·여당과 야권과의 최대 쟁점 사안인 대통령실 비서실장과 국무총리 인선 문제도 협의할 필요가 있다. 윤 대통령 입장에선 자신의 최측근을 뽑거나, 이번에 낙선한 인물들을 구제하고 싶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소야대' 지형은 21대 국회보다 더 심각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일방통행 인사를 단행하면, 국민 여론은 더 악화할 수 있다.

윤 대통령이 이처럼 협치에 전향적인 모습을 보이면 막힌 국정 현안을 풀어갈 수 있다. 윤 대통령이 추진하는 노동·연금·교육·규제 개혁은 민주당 협조 없이는 추진이 불가능하고, 고물가·고금리 대책도 마찬가지다. 당장은 의대 증원에 따른 의료 파행 사태부터 민주당과 머리를 맞대고 힘을 합쳐 풀어가야 한다. 조선의 왕 정조가 막후 정치를 통해 현안 해결을 어떻게 해나갔는 지 배우길 바란다.

다만 배우지 말아야 할 점도 있다. 정조가 심환지에게 보낸 편지 중에 "큰 아들이 과거 시험에서 300등 안에만 들면 합격시키려고 했는데 (아들이 그러지 못해) 심히 안타깝다"고 적은 내용이 있다. 이런 건 본받질 않길 바란다.

김세희기자 saehee0127@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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