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가 되게 해주세요” 부처에게 빌었던 이유

한겨레 2024. 4. 20.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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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S] 신지은의 옛날 문화재를 보러 갔다
‘진흙에 물들지 않는 연꽃처럼’ 기획전
“여성은 성불 안돼” 불교 세계관
출산·보살핌 등 고정된 이미지만
출가하는 석가 떠나보내는 아내
‘그림 속 통곡’ 온전한 감정 드러내
석가모니의 출가에 슬퍼하는 태자비 구이의 모습을 담은 ‘석가출가도’의 일부. 라인지역 사진 아카이브, 호암미술관 제공

호암미술관의 ‘진흙에 물들지 않는 연꽃처럼’(6월16일까지)은 동아시아 불교미술 안팎에 남은 여성의 자취를 조망하는 전시다. 이 전시는 지난해 호암미술관이 재개관한 뒤 처음 열리는 고미술 기획전이라 일찍부터 입소문이 나며 기대를 모았다. 한국을 비롯해 세계 곳곳에 소장된 불상과 불화, 자수, 나전칠기, 복식 90여건을 모았는데, 그 가운데는 박물관이나 미술관에서도 만나볼 기회가 드문 작품이 많아 눈길을 끈다.

국내 전시에서 처음 공개된 백제의 금동관음보살입상. 호암미술관 제공

국내 전시에서 최초로 공개되는 여러 작품 중 특히 눈여겨볼 만한 것으로 작은 공간에 단독으로 전시된 ‘금동관음보살입상’이 있다. 20세기 중반 이후 소재를 알 수 없다가 근래에 다시 모습을 드러내며 화제가 된 이 백제 조각상은 말끔한 젊은이 같은 용모에 머금은 ‘백제의 미소’로 유명하다. 본래 한 벌이었으나 일본과 독일로 흩어져 있던 조선 15세기의 불화 ‘석가탄생도’와 ‘석가출가도’를 처음으로 한 전시에서 같이 선보이는 꾸림새, 한점 한점이 반가운 옛 불화들로 한 벽을 가득 채우는 호방한 연출도 중요한 볼거리다.

한쪽 벽면이 진귀한 불화들로 가득찬 전시 공간. 호암미술관 제공

고결하거나 불결하거나

이 전시는 불교미술 속에 드러난 여성과 여성스러움의 이미지를 찾는 것으로 출발한다. 단순히 한 분야 안의 ‘여성 관련’ 작품을 모아 소개하기에 그치지 않고, 젠더라는 현대적인 관점을 통해 좀 더 적극적으로 새로운 의미에 접근해간다. 옛 불교 조각과 그림에서 여성의 이미지는 주로 어머니가 아이를 낳고 기르거나, 사람들에게 보살핌을 제공하는 상황을 표현할 때 쓰였다. 당시 사회가 여성에게 기대했던 이상적인 역할도 그러한 것이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부처와 보살은 본래 남성으로 여겨지지만, 관음보살처럼 중생을 굽어살피는 자비로운 존재를 보여줄 때는 여성에 가까운 생김새로 묘사한 것이 그 예이다.

반면 여성의 육체가 출산과 양육의 기능을 수행하지 않는 상태일 때는 몹시 비참하게 묘사되기도 했다. 육신에 대한 집착을 버리기 위해 죽어서 썩어가는 시신을 단계별로 관찰하는 수행인 구상관(九相觀)을 그림으로 표현할 때에는 으레 젊고 예쁜 여성의 몸을 소재로 활용했다. 이 역시 당시 사람들이 더러움과 끔찍함을 가장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이었기 때문일까. 지옥에서 형벌로 고통받는 여성의 영혼들 역시 벌거벗은 몸으로 그려진다.

이렇게 고결함과 불결함으로 양분된 이미지 사이를 오가던 눈에 들어와 걸리는 한 사람이 있다. 앞서 소개했던 조선시대 불화 ‘석가출가도’ 속에서 흐느끼는 한 여성, 석가모니의 아내 태자비 ‘구이’다. 이 작품은 왕실 후원으로 제작되었으리라 여겨지는 정교한 그림으로, 석가모니가 안락한 삶이 보장된 태자의 신분을 버리고 출가한 사건을 담았다. 석가모니가 궁을 나온 석가모니가 스스로 머리를 깎는 모습과 그 뒤 시종이 태자의 옷과 말을 챙겨 돌아오는 모습, 소식을 듣고 탄식하는 왕의 모습 등 그의 출가 뒤에 남겨진 혼란이 그려졌다.

그 소용돌이의 한가운데 바닥에 몸을 던져 우는 태자비 구이가 있다. 그는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악기들과 주인 잃은 빈 의자 사이에서 처절하게 통곡한다. 그 광경은 이 작품과 한 세트를 이루는 ‘석가탄생도’ 속 석가모니의 어머니 마야부인의 모습과 대조를 이룬다. 출산 직후에도 머리카락 한올 흐트러지지 않고 반듯하게 정좌해 있던 마야부인과 달리, 구이는 남편이 떠난 괴로움과 슬픔을 몸도 가누지 못할 만큼 솔직하게 표현한다. 성스러운 어머니도 부정한 육체도 아닌, 마음을 가지고 살아 숨 쉬는 온전한 한 인간으로서의 한 여성을 비로소 마주하게 되는 애틋한 순간이다.

석가모니의 어머니 마야부인의 꼿꼿한 자세를 그린 ‘석가탄생도’. 오치아이 하루히코, 호암미술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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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생 기다리며 공덕을…

충남 청양군 장곡사에 있는 금동약사여래좌상에서 나온 발원문. “남자가 되게 해달라”(중생정녀성남)는 소원이 적혀 있다. 호암미술관 제공

전시는 여성의 후원이나 참여로 제작된 불교미술 작품들을 소개하며, 예술적 발전의 기여자로서 여성의 위치도 재조명한다. 부처의 모습을 담은 미술품을 만드는 과정에 힘을 보탠 이들을 기록한 발원문에는 다양한 여성들의 이름과 바람이 적혀 있다. 그런데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감지금니 묘법연화경’이나 ‘장곡사 금동약사여래좌상’에서 나온 발원문에는 눈에 띄는 소원이 있다. “여자가 남자가 되게 해달라”, 즉 다음 생에는 남자로 태어나게 해달라는 것이다.

당시 불교는 모든 존재가 성불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었지만, 한편으로는 여성의 몸으로는 부처가 될 수 없다고 가르쳤다. 그래서 여성들은 이번 생에 출가하여 깨달음을 얻는 길 대신, 성불할 수 있는 남자로 태어나는 다음 생을 희망해야 했다. 그러면서도 그 간절한 소원을 이루기 위해 기다리는 삶을, 다른 이들을 돌보고 각종 불사에 참여하는 공덕으로 채워갔다.

그러므로 오늘날 문화재로 남아 전해지는 수많은 불교미술 작품들은 부처가 되고자 했던 여성들이 겪어야 했던 좌절 이후의 이야기들을 담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수백년 전 쓰인 글자들 속에 남은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마음을 읽는 일은, 연꽃이 핀 연못가에 서서 수면 아래의 진흙 바탕을 상상하는 기분이 들게 한다. 물 아래에서 이 찬란한 성과들을 피워 올렸던 그들은 과연 성불의 염원을 이루었을까.

진흙에서 피어난 연꽃에 비유한 전시 제목은 최초의 불교 경전으로 꼽히는 ‘숫타니파타’에서 따온 것이다. 연꽃은 불교미술에서 빠질 수 없는 중요한 상징으로, 부처와 보살이 앉고 서는 자리마다 보드랍게 피어나 귀한 존재들을 떠받친다. 다만 현실에선 연꽃도 꽃송이만으론 존재하지 못한다. 연못 밑 진흙에 뿌리를 내리고 그 물기와 양분으로 탐스러운 꽃을 피워 올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같은 뿌리에서 뻗어 나온 세 줄기의 연꽃이 아미타 부처와 관음보살, 지장보살을 가뿐하게 받치고 있는 조선시대 작품 ‘금동아미타여래삼존좌상’은 ‘진흙에서 피어났으나 진흙에 물들지 않은’ 연꽃의 의미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일지 모른다.

연꽃 세 줄기가 아미타 부처, 관음보살, 지장보살을 받치고 있는 금동아미타여래삼존좌상. 클리블랜드미술관 제공

호암미술관을 품고 있는 전통 정원은 전시가 시작된 3월부터 매화와 벚꽃 등 봄꽃들이 차례로 자리를 채웠다. 정원 가운데 연못에 가득 피어날 연꽃은 지금도 물 아래에서 다가올 계절을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다음을 기약해야 하는 부조리 때문에 이번의 최선을 포기해버리지 않는 우뚝한 믿음. 그 자리에 깃드는 구원과 희망의 말쑥한 얼굴을 미리 그려보게 되는 봄이다.

문화재 칼럼니스트
박물관과 미술관의 문화재 전시나 전통문화를 주제로 한 전시를 소개합니다. 우리 문화재를 사회 이슈나 일상과 연결하여 바라보며, 보도자료에는 나오지 않는 관람 포인트를 짚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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