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락도 락이다'…고통 속 찾아오는 <삶을 견디는 기쁨> [책GPT]

심가현 2024. 4. 20.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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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GPT> 시간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 명작 · 주목할 만한 신간을 소개합니다. 스포일러에 예민한 분은 독서 후 읽기를 권장드립니다.

◇ INFP 추정 노벨 문학가의 사색

헤르만 헤세 <삶을 견디는 기쁨>

‘데미안’과 ‘수레바퀴 아래서’로 알려진 20세기 독일의 대문호 헤르만 헤세. 그 시절 성격유형검사 MBTI가 있었다면 그의 결과는 INFP가 아니었을까 짐작해 봅니다. 바깥 세상보다 내면 세계 탐닉을 즐기는 내향형 (I), 눈앞의 현실보다 추구하는 이상과 가능성에 집중하는 직관형 (N), 사실 자체보단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감정에 천착하는 감정형 (F), 빈틈없는 계획보단 무엇도 정해지지 않은 자유함을 만끽하는 인식형 (P). INFP의 별명은 '열정적인 중재자'라고 하죠. 그 역시 누군가는 비현실적이라고 치부해버릴 수 있는 이상을 가슴에 간직한 채 세상과 조용히 싸워나갔습니다.

헤세는 사회적으로는 노벨문학상 수상이라는 성공을 거둔 세계적인 작가지만, 개인적으로는 남다른 감수성으로 기쁨만큼 고통에도 예민했고 자살에 대해 긍정할 만큼 자살 충동에 자주 시달리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그가 정의한 고통은 삶의 선생님이자 성장을 위한 통과 의례. 순례자의 마음으로 부지런히 아파하는 사이 삶은 예술로 승화했습니다.

<삶을 견디는 기쁨>에는 헤세가 자신 내부의 가장 깊은 곳을 들여다보며 사색한 기록을 담은 산문·시 48편이 직접 그린 그림과 함께 수록돼 있습니다. 솔직한 문체로 써 내려간 내면의 기록은 100년 전 대문호라기보다는 나와 같은 고민을 가져본 친구의 일기장 같기도 합니다. 심리학자 융은 헤세의 글을 두고 '폭풍이 이는 밤을 비추는 등대의 불빛'이라고 극찬했다고 합니다. 먼저 고된 시절을 지나온 그가 비추는 불빛이 가리키는 곳이 궁금하다면 시간을 내 책을 펼쳐 보기를 추천드립니다.

◇ 게으르게, 자주 기뻐하고 기꺼이 고통받으며

① 작은 기쁨
"일터로 향하면서 좋은 글귀를 읊조리거나 콧소리로 아름다운 노랫가락을 흥얼거리는 죄수는 도처에 널린 화려한 아름다움과 달콤한 유혹에 심신이 지쳐 있는 사람보다 마음속 깊이 아름다운 것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이다."

자유로운 상태에서 스스로 기분 좋은 생각을 떠올릴 수 없는 사람은 죄수만도 못한 신세라는 것. 그의 철학을 관통하는 첫 번째 정신은 '작은 것들에 대한 애정', 다르게 말하면 사소한 기쁨을 맛보는 능력입니다. 삶을 풍요롭게 하는 건 화려하고 거창한 쾌락이 아니라 작은 즐거움이고, 따분해보이는 주위 세계에도 수수께끼같은 원석이 가득하며 관건은 그를 알아차릴 수 있는 눈이라는 시각입니다. 작은 즐거움이란 예컨대 머리 위 하늘과 구름. 길가에 핀 꽃 같은 것. 매일 볼 수 있는데다, 어제와 오늘이 다르고 평생 공짜입니다. 값비싼 것들을 소유하지 않고도 사소한 일을 반짝거리는 눈으로 담을 수 있는 내면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그의 글은 '부자가 되는 법'보다는 '부자로 사는 법'을 알려주려는 듯합니다.

② 무위의 미학

"화요일에 할 일을 목요일로 미루는 일을 한 번도 하지 못한 사람이 나는 불쌍하다. 그는 그렇게 하면 수요일이 몹시 유쾌하다는 것을 아직 알지 못한다."

헤세는 우리에게 부족한 건 돈과 명예, 계획이 아니라 찰나적인 유희를 즐기는 성향, 우연에 대한 개방적인 태도, 그리고 변덕스러운 운명에 대한 신뢰라고 외칩니다. 상상력과 대척점에 있는 것 중의 하나가 '효율'일 것입니다. 작은 일을 크게 확장해 감탄하는 상상력은 효율을 추구하는 목표 지향적 삶에서는 꽃피지 않습니다. 그는 바쁜 일상 속 숨을 고르고 한 그루의 나무와 한 뼘의 하늘이라도 애정을 가지고 들여다보면 그 모습이 어제와 같지 않고, 집집마다의 지붕 모양도 마찬가지라고 강조합니다. 여유를 즐기며 생활을 구성하는 것들 저마다의 개성을 발견하는 일이 대단한 곳으로의 여행보다 값지며 '그처럼 사소한 것들'이 삶의 전부라고 말입니다.

③ 고통은 선생님

"새로 태어나고 싶은 사람은 죽을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 헤세는 그를 찾아오는 고통을 원망하기보다 '행복과 함께 우리의 삶을 지탱해 주는 것'이라고 재정의합니다. 그 역시 스스로가 온몸으로 고통받는 시기를 지나온 후에야 얻은 깨달음일 것입니다. 그는 가벼운 감기로 어느 날 갑자기 푹 쓰러지는 사람은 언제나 '건강하기만' 한 사람들이며, 고통받는 것을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라며 고통이 사람을 부드럽게도 만들고, 강철처럼 단단하게도 만든다고 역설합니다.

같은 원리로 잠 못 드는 고통, '불면증'에 대해서도 '경외심을 배울 수 있는 최고의 학교'라는 관점을 제시합니다. '고통 선배'인 그의 내면을 엿보는 일은 우리의 잠 못 이루는 밤을 조용히 위로합니다.

"자신의 육신과 생각을 다스리고 위로하는 방법에 대해 '잠 못 이루는 밤'만큼 제대로 가르쳐 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누군가를 부드럽게 감싸고 배려해 주는 것은 스스로 그런 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중략)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사물을 바라볼 줄 알며, 정신적인 아픔을 이해하고 인간적인 취약점을 감싸주는 것은 참담한 고요 속에서 누군가의 방해도 받지 않고 온전히 혼자만의 생각에 잠겨 있는 외로운 시간을 보내 본 사람만이 할 수 있다."

④ 자연에 대한 경외

헤세에게 자연은 경외의 대상이자 영감의 원천. 힘든 시기에는 자연으로 나가 적극적인 자세로 그것을 즐기는 것보다 더 좋은 약이 없다고 강조합니다. 이는 인간이 다른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자연의 일부라는 인식에서 비롯되는 듯합니다. 그는 삶의 잔혹함과 죽음을 간직한 자연의 혼돈을 자기 마음 속에 받아들일 수 있어야만 비로소 그곳에서 의미를 찾으려고 노력할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다가오는 절망을 받아들이는 일만이 '인간만이 가진 유일한 능력'이며 '나에게만 왜 이런 시련이' 식의 생각은 인간이 자기 자신을 너무 중요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착각에서 비롯된다는 그의 일침은 차가우면서도 위로가 됩니다.

◇ 마치며
”이제 나의 친구들은 더 이상 우리가 사랑했던 동화 속의 주인공들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고흐의 불꽃같은 삶도, 니체의 상처입은 분노도 스스로의 현실엔 더이상 도움될 것이 없다 말한다. 전망 좋은 직장과 가족 안에서의 안정과 은행 구좌의 잔고 액수가 모든 가치의 척도인가. 돈, 큰 집, 빠른 차, 여자, 명성, 사회적 지위 그런 것들에 과연 우리의 행복이 있을까.
-신해철 <나에게 쓰는 편지>

그의 사색은 가수 신해철이 읊조리던 오래된 노래의 내레이션을 떠올리게 합니다. 하루하루 닥친 일들을 해치우며 일상을 버텨내기 바쁜 우리 마음 한 켠에도 100년 전 헤르만 헤세가, 30년 전 신해철이 품었던 물음표가 하나씩은 있다고 믿습니다. 우리의 행복이 돈, 큰 집, 빠른 차가 아닌 어디에 있는지. 예기치 못하게 찾아오는 고통은 어떻게 이겨내야 하는지, 삶을 견디는 기쁨은 어떻게 얻는 것인지…. 헤세가 떠난 후에도 생생히 살아있는 글을 통해 그처럼 세속적 가치가 아닌 스스로의 목소리에 귀기울이는 시간을 가졌으면 합니다.

헤세는 "혼돈을 새롭게 정비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건 오늘날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그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내면으로 겪는 경험에서 이루어진다"고 했습니다. 인생은 탐구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탐구하는 것이라고 했던가요. 책으로 접하는 타인의 지혜가 선물처럼 '고통을 견디고 기쁨을 느끼는 능력'을 향상시켜줄 수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삶의 무의미에 좌절하는 어느 날 참고할 나침반이 되어줄 것입니다.

[심가현 기자 gohyun@mb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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