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제주’에서 배 타고 또 섬으로…여행 속 여행의 재미 [ESC]

한겨레 2024. 4. 20. 10:05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최갑수의 작은 마을 여행
제주 함덕·우도·비양도
아무 계획 없이 김포공항 출발
맨발로 함덕해변 ‘여백의 충만함’
성산항에서 10분…우도 해안 절경
다리 연결된 비양도 ‘백패킹 성지’
제주 동쪽 바다를 조망할 수 있는 지미오름에서 바라본 우도.

어느 겨울, 강릉에서 한 달 정도를 지낸 적이 있다. “바다가 보이는 곳에 살아보고 싶다”고 어느 글에 쓴 적이 있는데, 그 글을 읽은 독자가 “방 한 칸 내줄 테니 머물고 싶은 만큼 머물다 가시라”고 선의를 베풀어주셨다. 힘들게 여행하는 가난한 여행작가지만, 선물처럼 안겨 오는 이런 선의가 가난과 고단을 잊게 한다.

“바다가 보이는 곳에 살고 싶다”고 썼지만 사실 내가 살고 싶은 곳은 제주도다. “제주도에 살고 싶어요”라고 하면 많은 이들이 훈수를 둔다.(생각보다 쉽지 않다는 둥, 현실은 다르다는 둥) 그래도 제주에 한 번은 꼭 살아보고 싶은 로망이 있다. 그렇다고 제주에 아주 정착하겠다는 건 아니고, 작은 집 하나를 연세로 얻어서 내가 지금 살고 있는 경기도 파주와 제주를 왔다 갔다 하며 지내고 싶다. 세상 편한 소리 한다고 하겠지만, 꿈이라도 꿔보는 거지 뭐.

아기자기하고 예쁜 제주의 동쪽

가끔 제주도에 간다. 불쑥, 아무 계획 없이, 갑자기, 뜬금없이 김포발 제주행 비행기에 올라탄다. 비행기 요금은 부산 가는 케이티엑스(KTX)보다 싸고 걸리는 시간은 비슷하다. 제주공항에 도착하고 나서야 ‘어디로 가볼까?’ 하고 목적지를 알아볼 때도 있다. 이런 대책없는 여행이 가능한 이유는 내가 작가이고, 조그만 1인 출판사를 운영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하는 일은 노트북만 있으면 3박4일 정도는 그럭저럭 버틸 수 있다.

지난 9일, 이번에는 함덕을 찾았다. 제주 동쪽에 자리한, 성산포 가는 길에 있는 동네다. 1132번 국도를 타고 삼양해수욕장을 지나 동쪽으로 계속 가면 닿는다. 버스로 1시간 정도 걸린다. 개인적으로 제주 서쪽보다는 동쪽을 좋아하고 바다보다는 중산간이 좋다. 제주 서쪽이 거칠고 투박한 풍경을 보여준다면, 제주 동쪽은 아기자기하면서 예쁜 풍경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바다보다는 중산간에 있을 때 제주에 있다는 걸 더 실감하곤 한다. 함덕은 여행객들이 많이 찾는 월정리에 취재 가는 길에 몇 번 지나친 적이 있는데 한번도 가본 적은 없다. 숙소는 함덕해수욕장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마일리지로 예약했다. 마일리지는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것이다.

숙소에 짐을 풀고 함덕해변으로 나갔다. 날씨는 흐렸지만 바다는 옥색이었다. 바닷속 패사층(조개껍데기가 바람과 파도에 부서져서 만들어진 모래층)이 만들어내는 빛깔이라고 한다. 봄 바다를 즐기러 온 여행객들이 한가롭게 해변을 거닐고 있었다. 백사장 모래를 손에 쥐어 봤는데 너무 고와서 꼭 밀가루를 만지는 것만 같았다. 나는 신발을 벗어 손에 쥐고 바지를 종아리까지 걷고 맨발로 모래밭을 걸었다. 뭐랄까, 맨발로 해변을 걷는 건 공백 혹은 여백을 만드는 일이 아닐까 싶다. 우리 모두는 열심히 살고 있다.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숨차게 달린다. 이렇게 무작정 달리다 보면 뭔가 소중한 걸 잊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이건 좀 아닌 것 같아’ 하며 고개를 갸웃하기도 한다. 슬럼프가 찾아오기도 하고 번아웃에 빠지기도 하고 심하면 우울증에 걸릴 때도 있다. 그건 아마도 잠깐 멈추라는 신호일 것이다. 예전에는 꽉 찬 일정표가 내 능력을 말해주는 것 같아 보기 좋았는데, 이젠 숨 쉴 틈 없는 일정표를 보고 있으면 잘못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가끔 내게 묻곤 한다. 일도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제일’ 중요한 건 아니잖아. 일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지 않을까. 가령 맨발로 해변을 걷는 것 같은….

손수건으로 발바닥에 묻은 모래를 닦고 해변 오른쪽으로 난 언덕을 올랐다. 서우봉이다. 물소가 바다에서 막 기어 올라온 모양이라고 해서 이렇게 부른단다. 제주도 386개 오름 중 하나다. 서모오름 또는 서산이라고도 부른다. 높이는 고작 111m. 정상에 오르면 함덕해변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다. 서우봉을 지나 함덕해수욕장으로는 올레길 19코스가 통과한다. 정상에 닿았을 무렵 빗방울 몇개가 후드득 떨어져서 서둘러 내려갔다.

숙소 가는 길, 근사한 카페가 있어 들어갔다. 옛 돌집을 개조해 카페로 꾸몄다. 지붕은 보라색이다. 치즈케이크와 당근케이크가 맛있는 집이라고 해서, 와인 한잔과 치즈케이크를 시켜놓고 앉아 있다. 창문을 빗방울이 친다. 아직 성수기 전이라 카페는 한가하다. 살다 보면 오늘 하루가 어떻게 갔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바쁜 날이 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전력 질주한 느낌이 드는 그런 날, 결승선을 통과하자마자 탈진하고 마는 400m 달리기 선수처럼,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소파에 쓰러져 버리는 그런 날, 승패 같은 건 중요하지 않고 최선을 다했다는 그 느낌이 소중하고 감격스러울 뿐인 그런 날 말이다. 반면 하릴없이 빈둥대고 게으른 하루가 너무 뿌듯하게 느껴지는 날도 있다. 아무것도 한 게 없지만 왠지 모를 충만함이 밀물처럼 가슴 속 가득 차오르는 하루. 오늘은 후자다. 내가 한 건, 비행기를 타고 제주에 와서 맨발로 바닷가를 거닐다 비 내리는 창밖을 보며 와인을 홀짝인 게 다인데, 하루를 너무 알차게 잘 보낸 것 같단 말이지.

제주에서 가장 작은 오일장 풍경

다음 날 아침, 함덕해변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카페에 앉아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세금계산서를 발행했다. 거기까지 가서 웬 세금계산서냐고 하시겠지만, 그래도 일은 해야 하니까. 한시간 정도 노트북 키보드를 두드리며 칼럼도 하나 써서 전송했다. 먹고 살아야 하니까. 가끔 어떤 이들은 일과 삶을 분리하는 게 이상적인 삶이라고 하는데, 글쎄 난 잘 모르겠다. 지금까지 일하고 살아오며 느낀 건, 일과 삶은 절대로 분리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 일은 더 좋은 삶을 유지할 수 있게 해주고, 삶은 일을 더 보람 있게 만들어준다. 일에서 느끼는 불안과 삶에서 느끼는 불만족은 이 둘을 정확하게 나누려고 하는 데서 오는 게 아닐까 싶다. 아무튼 ‘일하는 틈틈이 놀고, 노는 틈틈이 일하면 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해야 할 최소한의 일을 끝내고 의자에 기대 창밖의 바다를 바라보고 있으니 슬슬 배가 고프다. 뭘 먹을까. 어제저녁은 와인과 치즈케이크로 대충 때웠는데, 오늘 아침은 제대로 된 음식을 먹도록 하자. 제주에 왔으니 제주 음식이면 더 좋겠지. 그래서 정한 음식이 고기국수다. 때마침 오늘이 함덕 오일장이 서는 날이다. 함덕에는 1일과 6일이면 장이 선다. 크기는 400평 남짓. 제주 오일장 중 가장 작단다. 점포 수도 40여개다.

함덕오일장 생선가게.

장은 아담하다. 그렇지만 이 세상의 모든 시장이 그러하듯 ‘없는 것 빼고는’ 다 있고 ‘있어야 할 것’도 다 있다. 생선 가게에는 싱싱해 보이는 생선들이 가득하고, 밭에서 직접 수확한 채소와 과일도 넉넉하게 진열되어 있다. ‘몸빼 바지’를 걸어놓은 옷 가게도 있고 농기구를 비롯해 각종 공산품을 파는 가게도 있다. 그리고 고기국수를 파는 식당도 있다. 멸치국수 5000원, 고기국수 7000원. 오전 10시 반이지만 어르신은 벌써 제주 막걸리를 놓고 순댓국을 들고 계신다. 고기국수를 주문하니 뽀얀 육수에 삶은 중면을 담고 그 위에 투박하게 썬 고기를 푸짐하게 올린 국수 그릇이 앞에 놓인다. 김치와 깍두기, 미역무침, 무채나물이 반찬으로 따라 나왔다. 어르신이 앉은 테이블에는 반찬 두어가지가 더 올라가 있지만, 그건 막걸리 안주 또는 현지인 ‘어드밴티지’라고 생각한다.

☞한겨레S 뉴스레터 구독하기. 검색창에 ‘한겨레 뉴스레터’를 쳐보세요.

☞한겨레신문 정기구독. 검색창에 ‘한겨레 하니누리’를 쳐보세요.

함덕오일장에서 먹은 고기국수.

비양도 거느린 우도

고기국수를 먹고 종달리 가는 버스에 올랐다. 지미오름에 올랐다가 우도에 가볼 요량이다. 나는 가끔 여행을 와서 또 다른 여행을 한다. 함덕으로 여행을 왔는데, 함덕에서 우도로 여행을 가는 것이다. 여행작가 생활을 하며 터득한, 여행을 두배로 즐기는 나름의 노하우다. 함덕에서 지미오름이 있는 종달리까지는 버스로 딱 1시간이 걸린다.

지미오름에서는 제주 동쪽 바다를 조망할 수 있다. 지미(地尾)란 이름은 ‘땅의 꼬리’란 뜻이다. 정상까지는 약 30분 정도가 걸리는데, 조금 가파르다. 정상에 오르면 성산일출봉과 우도가 가깝고, 두문포 마을의 푸르고 붉은 마을의 지붕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게 내려다보인다. 우도를 오가는 여객선이 흰 포말을 일으키며 지나가고, 한라산을 정점으로 제주 동쪽의 오름 군락들이 첩첩이 겹친다. 내가 제주에서 가장 좋아하는 풍경이다. 제주에 왔다는 걸 실감하고, 저 어디쯤 집을 구해 1~2년 살아볼까 하는 생각도 가져본다.

우도는 성산항에서 3.9㎞ 떨어져 있다. 여객선을 타고 10~15분이면 도착한다. 다 아시다시피, 우도는 하늘에서 내려다본 섬이 꼭 소가 누운 것 같다고 해서 이름 붙었다. 완만한 언덕과 태고의 신비를 간직한 해안 절벽, 홍조단괴(얕은 바다에 사는 해조류 중 하나인 홍조류가 작은 모래알갱이에 붙어 성장하며 공 모양으로 커진 것)가 부서져 생긴 독특한 해변 등 자연경관에 인간이 일군 진초록 밭과 검은 돌담, 알록달록한 지붕이 어우러져 제주 본섬과 또 다른 풍경을 보여준다.

자전거를 한대 빌려 우도 일주에 나섰다. 대부분의 여행자들이 천진항을 등지고 시계 방향으로 도는데, 가장 먼저 만나는 곳이 홍조단괴해변이다. 한때 서빈백사나 산호사해변으로 불리다가, 백사장을 이룬 알갱이가 산호가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우도에 있는 눈부시게 하얀 망루등대.

조금 더 달리면 눈부시게 하얀 등대가 나온다. ‘망루등대’라고 불린다. 등대 옆에는 봉수대가 있다. 조선 시대 군사 통신수단으로, 위급한 사태를 알리는 역할을 했다. 현무암 계단을 따라 봉수대에 올라가도 된다. 등대 옆 바다에는 원담(독살)을 재현했다. 전통 어업 방식으로, 밀물 때 바닷물을 타고 온 물고기가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가두는 일종의 돌 그물이다. 하트 모양으로 쌓아서 여행객에게 인기다.

등대를 지나면 곧 하고수동해수욕장이다. 해녀와 인어공주 조형물이 유명하다. 해수욕장 주변으로 이국적인 카페가 늘어서 ‘사이판 해변’이라는 별명이 있다. 어제와 달리 날씨가 좋아 바닷물에 발을 담근 여행객들이 많다. 하고수동 다음 코스는 비양도다. 제주도가 우도를 거느린다면,우도는 비양도를 거느린다. 그러니까 비양도는 섬 속의 섬 속의 섬인 셈. 여행을 와서 여행을 왔는데, 그곳이 섬 속의 섬 속의 섬이다. 우도와 짧은 다리로 연결되어 있는데, 비양도는 ‘백패킹 성지’로 불린다. 비양도 망대 근처에 있는 연평리야영지는 백패커라면 누구나 한번쯤 텐트를 치고 싶어 하는 곳이다. 7~8년 전만 해도 텐트를 들고 전국을 쏘다녔지만, 이젠 침대가 좋다. 다 해야 할 때가 있는 법. “그나마 관절이 성할 때 많이 돌아다니라”는 선배들의 말을 실감하는 요즘이다.

우도봉과 검멀레해변을 지나 선착장에서 배를 기다리며 땅콩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다. 우도는 땅콩이 많이 나는데, 땅콩 가루를 잔뜩 뿌린 아이스크림이 유명하다. 아이스크림은 고소하면서도 달콤하고 부드럽다. 내일은 무얼 할까. 오전에는 칼럼을 하나 써서 보내야 하고, 새 책 디자인 시안을 확인해야 한다. 그러고 나서는 바닷가를 걷겠지. 제주에 사는 지인에게 물어보니 함덕에 맛있는 베이글샌드위치를 파는 집이 있다고 한다. 거길 가봐야겠다. 돼지국밥과 해장국을 잘하는 집도 있다고 하는데 오늘 저녁 함덕으로 돌아가서는 거길 가야겠다.

어제와 오늘은 꼭꼭 숨겨두었던 비상금을 꺼내 쓴 것 같은 날들이었다. 내일도 그렇겠지. 우리 인생에 이런 비상금 같은 날이 며칠쯤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아끼고 아끼며 모았던 비상금으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내가 사고 싶은 것을 사듯, 열심히 일을 하며 모아 둔 시간으로 내가 살고 싶은 날을 내게 선물하는 거지. 자, 그러기 위해서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비상금을 차곡차곡 모아야 하지 않을까. 그나저나 함덕 정도면 살아볼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여행 정보

함덕해변에 있는 카페 보라지붕. 제주당근케이크와 바스크치즈케이크가 맛있는 곳.

함덕해변에 있는 보라지붕(0507-1326-6827)은 제주당근케이크와 바스크치즈케이크가 맛있는 곳. 구옥을 최소한으로만 고쳐 카페로 사용하고 있다. 함덕해수욕장에서 가까운 진미돼지국밥(064-783-9825)은 깔끔하고 푸짐한 돼지국밥을 맛볼 수 있다. 아침 식사도 가능하다. 해녀김밥본점(0507-1342-3005)은 오징어먹물과 꼬막을 넣고 볶아낸 밥에 제주 톳을 넣어 만든 김밥으로 유명하다. 전복김밥, 딱새우김밥 등도 판다.

‘세피베이글’의 수제베이글.

세피베이글(0507-1323-6932)은 수제베이글 맛집이다. 함덕 오일장이 열리는 날에는 고기국수와 순대국밥 등을 먹을 수 있는 식당이 문을 연다. 김녕에 있는 좀녀네집(064-782-8584)은 해녀들이 직접 잡은 싱싱한 해산물과 전복죽이 맛있는 곳.

성산포항종합여객터미널에서 우도 가는 배를 탈 수 있다. 환경보호를 위해 일반 렌터카는 숙박객만 가져갈 수 있다. 장애인과 만 65살 이상 노약자, 임산부, 6살 미만 영·유아를 동반한 경우에는 렌터카 입도가 허용된다. 우도 땅콩 아이스크림은 어느 카페에 들어가도 맛있다.

글·사진 최갑수 여행작가

Copyright © 한겨레.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크롤링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