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의 후계자 해본 소감은”…집안 기둥도 뽑는다는 ‘이것’ 전수받았다는데 [전형민의 와인프릭]

전형민 기자(bromin@mk.co.kr) 2024. 4. 20.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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쟝 니콜라 메오. [사진 제공=신세계L&B]
어느 분야나 그렇겠지만 와인 분야에서 전설(Legand)로 불리는 것은 어렵습니다. 일정 경지에 도달하면, 그 이후부터는 지극히 개인의 취향과 개성의 문제로 이어지기 마련이어서 모두에게 두루 최고로 인정 받는 것이 정말 극히 드물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업계에는 모두가 동의할만한 전설들이 존재합니다. 최근 소개한 미국 캘리포니아 보리우 빈야드(Beaulieu Vineyards)의 안드레 첼리스트체프(Andre Tchelistcheff)나 현대 샴페인의 기초를 다진 미망인들, 클리코와 포므리·볼랭져 등도 그런 전설의 범주에 속하죠.

와인의 전체 역사를 통틀어 보면 전설이라 불리는 인물들은 늘 존재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지역을 구분해 따지자면 프랑스 동부 부르고뉴(Bourgogne)야 말로 가히 전설들의 지방이라고 할만합니다. 거짓말을 조금 보태면 우리집, 앞집, 옆집, 뒷집… 죄다 전설로 불리거든요.

부르고뉴의 전설을 너머, 교황, 신이라고까지 불리는 앙리 자이에의 생전 모습.
부르고뉴가 현대에 들어 전설들의 놀이터가 된 까닭은 여러가지가 있습니다만, 이 사람이 큰 영향을 미쳤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습니다. 전설들의 전설, 현대의 부르고뉴 와인 스타일을 정립한 앙리 자이에(Henri Jayer)입니다.

굳이 와인 애호가가 아니더라도, 부르고뉴 와인에 빠지면 집안 기둥 뿌리 뽑는다라는 말은 한번쯤 들어보셨을 겁니다. 그만큼 부르고뉴 와인값이 비싸기 때문인데, 부르고뉴 매니아들은 ‘이것도 따지고 보면 7할은 영감(앙리 자이에)이 너무 맛있는 와인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라고 투정할 정도로 현대 부르고뉴 와인에서 그의 존재는 절대적입니다.

와인 이야기를 찾고 쓰는 사람으로서 앙리 자이에와의 인터뷰는 꿈에서라도 해보고 싶은 일입니다만, 아쉽게도 그는 이미 세상을 떠났습니다. 다행스러운 점은 그의 양조 철학과 기풍은 여전히 그의 제자들에 의해 전해지고 있다는 것이죠.

오늘 와인프릭은 부르고뉴의 전설 아니, 부르고뉴의 신 또는 교황이라고 불리는 고(故) 앙리 자이에의 자타공인 수제자이자 부르고뉴에서 가장 유명한 와이너리 중 하나인 메오-까뮈제(Meo-Camuzet)를 소유한 쟝 니콜라 메오(Jean-Nicolas Meo)와의 인터뷰를 준비했습니다. 니콜라는 4월초 15년 만에 공식 방한했습니다.

전세계에서 가장 비싼 와인은?
와인의 가격은 천차만별입니다. 한 병에 수백만원을 거뜬히 넘기는 초고가가 있는가하면, 유통 거리를 생각하면 ‘도대체 이걸 팔아서 돈이 되나’ 싶을 정도에 판매되는 와인도 있죠. 가격들을 보다보면 한번쯤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세상에서 가장 비싼 와인은 뭘까?

빈티지와 지역, 세트 여부 등 기준에 따라 정답의 편차가 있습니다만, 와인을 좀 안다 하는 애호가들은 대체로 이 와인이 떠올릴 겁니다.

도멘 드 라 로마네 콩티(Domaine de la Romanee-Conti), 줄여서 DRC라고 부르죠. 흔히 12병들이 한 벌이 1억원 이상을 호가한다고 알려진 이 와인은 간단히 설명하면 프랑스 동부, 부르고뉴 지방의 본 로마네 지역에서 자란 피노 누아(Pinot Noir) 포도만으로 양조한 와인 입니다.

부르고뉴와 피노누아, 두 단어는 와인 애호가에겐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단어입니다. 고급 와인, 섬세한 와인의 대명사로 쓰이기 때문인데요. DRC는 그 중에서도 수많은 전문가들에게 세계 최고라고 인정 받는 와인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적게는 수십, 많게는 수백년 간 견고한 아성을 구축한 DRC의 명성에 부르고뉴의 전설, 앙리 자이에가 흠집을 냈습니다. 직접 개간한 부르고뉴 본 로마네 마을 끄트머리의 밭, 크로 파랑투(Cros Parantoux)에서 생산된 와인이 와인 서쳐(Wine searcher) 순위에서 DRC를 제치고 병당 1만5000유로(약 2210만8800원)에 팔리면서 입니다.

부르고뉴 지방 본 로마네 마을 북서쪽 끄트머리에 위치한 크로 파랑투(Cros-Parantoux) 와이너리의 모습. 앙리 자이에는 돼지감자를 심던 이 밭의 암반을 다이너마이트로 폭파시키고 여기서 포도를 키워 세계 최고의 와인을 만들었다. 왼쪽 돌담은 이렇게 폭파시킨 암반 조각을 모아 쌓은 것.
억만금이 있어도 살수 없다
앙리 자이에의 와인이 비싸게 거래되는 이유는 여러 가지지만, 희소성이 가장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가 현대 부르고뉴 와인의 스타일 형성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 선구자인 탓에 그의 와인을 가장 정점으로 간주하는데다, 이미 작고해 더 이상 생산되지 않기 때문이죠.

실제로 그의 와인은 이미 돈이 많다고 해서 덜컥 살 수 있는 물건이 아닙니다. 사고 싶다면 우선 웨이팅 리스트에 이름을 올리고 기다려야 하고, 그 순서가 1년이 될 수도, 영영 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 때문에 부르고뉴의 여러 와이너리들은 어떻게든 그와의 인연을 마케팅에 활용하려고 합니다. 그에게 양조를 배웠다거나, 그가 와인을 컨설팅 해줬다거나, 이도 저도 아닌 경우에는 그와 밭을 맞대고 있다는 것조차 마케팅의 대상이 됩니다.

하지만 정작 전문가들이 진정으로 인정하는 적통 제자는 2명 뿐입니다. 그의 상속자이자 처조카인 에마뉘엘 후제(Domaine Emmanuel Rouget)와 그가 소작농으로 봉직하면서 와인을 만들어온 와이너리, 메오 까뮈제의 오너이자 현 와인 메이커인 쟝 니콜라 메오죠.

젊은 시절 쟝 니콜라 메오(좌)와 앙리 자이에(우). 앙리 자이에는 젊은 시절 메오-까뮈제의 소작농이었다. 쟝 니콜라 메오가 와이너리를 상속받기로 하면서 그의 스승이자 멘토가 됐다.
쟝 니콜라 메오는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입니다. 세 형제의 막내던 그는 어렸을 때 양조에 뜻을 두지 않고 파리에서 경제학을 공부했습니다. 와인 업계에서 일을 하게 될 것이라곤 꿈에도 생각치 못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공부를 끝낼 무렵이던 1980년대 후반, 아버지로부터 와이너리를 물려받으라는 연락을 받고 일주일 간 고민 끝에 와이너리를 물려받게 됩니다. 그는 당시에 대해 “나는 수학을 잘했다. 만약 당시 도멘(Domaine·와이너리)을 선택하지 않았다면 은행원이 됐을 것”이라고 회상했습니다.

재밌는 것은 그가 도멘에 들어오기로 결정했을 때, 와인에 대해서는 무지한 상태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붙여준 멘토이자 스승이 바로 직전까지 메오 까뮈제의 밭을 소작농(Metayage)으로 일궈온 앙리 자이에 입니다. 니콜라는 “아버지는 앙리 자이에에게 내 스승이 되어달라고 요청했고, 그렇게 우리의 인연이 시작됐다고”고 소개합니다.

제자에게 당시로서는 살아있는 전설이었던 스승은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니콜라는 “좋은 기억이 있다”며 자신의 첫 양조 빈티지였던 1989년의 기억을 소환했습니다. 그 해는 기후 자체가 포도 재배에 적합한 뛰어난 빈티지였습니다.

앙리 자이에가 양조중인 와인을 첫 테이스팅 후 잔뜩 긴장한 채 뒤에 있던 그를 돌아보고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거봐, 네가 믿음을 가지고 만들면 좋은 와인을 만드는 것은 어렵지 않아”라고.

이후로도 수년 간 앙리 자이에는 니콜라에게 양조를 가르쳤습니다. 니콜라는 “그는 훌륭한 멘토이자 스승이자 컨설턴트였다”면서 “몇 가지 질문을 미처 그에게 물어보지 못해서 아쉽다. 그땐 ‘내가 그보다 낫다’고 생각했다”고 추억했습니다.

메오 까뮈제 밭과 쟝 니콜라 메오.
와인메이커는 포도밭의 지휘자
수제자로서 스승의 와인에 대한 평가는 어떨까요. 니콜라는 “스승과 난 비슷한 입맛을 가졌고, 특히 그는 미식을 즐겼다”며 “그의 와인에는 동네 레스토랑의 음식과 페어링을 고려한 미식가적인 스타일이 녹아있다”고 말했습니다. 와인만으로 즐기는 것보다, 자신이 좋아했던 주변 식당 음식과의 조화까지 고려한 앙리 자이에의 소박하고 겸손한, 인간적인 너그러움이 돋보이는 대목입니다.

특히 니콜라는 포도밭 관리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는 “양조는 스타일이 정해져 있고, 밭을 통해 재료가 생산된 뒤의 일”이라며 “부모가 아이의 재능이 제대로 발현되도록 코칭하듯, 우리도 포도밭을 적절하게 코칭해줘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양조자로서 획기적인 양조기법을 만들어내기보다 자연으로부터 주어지는 떼루아를 잘 관리해 와인의 원재료인 훌륭한 포도를 만들어내는 게 기본이라는 주장이죠.

연장선에서 그는 와인메이커로서 자신을 지휘자와 작곡가 중 지휘자에 가깝다고 했습니다. 스스로를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이 아닌, 만들어지는 것을 잘 가꾸고 관리하는 사람으로 설명한 것입니다.

이는 스승인 앙리 자이에의 평소 생각과도 맥이 닿습니다. 부르고뉴 와인 권위자인 백은주 작가의 책 <부르고뉴 와인>에 담긴 앙리 자이에와의 인터뷰에는 그 역시 “좋은 와인을 만들기 위해서는 우선 좋은 포도가 있어야 하고, 훌륭한 양조가 이전에는 우선 훌륭한 포도 재배자가 돼야 한다”며 포도밭 관리의 중요성을 강조한 부분이 나옵니다.

지구 온난화로 시시각각 기온이 상승하고 있는 환경에는 어떻게 대처할 수 있을까. 니콜라는 이를 위해 포도밭에 식재한 포도나무를 만생종(늦게 영그는 품종) 유전 특성의 나무로 바꿔 심는다고도 귀띔했습니다. 평균 기온이 지나치게 올라가 포도가 너무 빨리 익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이런 품종 변화를 통해 2~3주의 시간을 벌 수 있다”고 말합니다.

메오 까뮈제 와이너리. [메오 까뮈제 홈페이지 캡쳐]
전설의 가르침…핵심은 나만의 스타일
니콜라는 앙리 자이에의 가르침의 정수를 묻자 “자이에는 줄곧 자신만의 스타일을 가지고 와인의 캐릭터를 살리라고 했다”고 말했습니다.

스승과의 만남 이후로도 약 30여년, 거의 반평생을 부르고뉴 와인 생산에 바친 초로의 니콜라에게 ‘소비자들이 당신의 와인에서 어떤 점을 느끼길 바라느냐’고 조심스레 물었습니다. 지금까지 말한 앙리 자이에의 가르침을 당신은 잘 따르고 있느냐는 물음을 한 스푼 담아서요.

니콜라는 슬며시 옅은 웃음을 짓더니, 진지한 표정으로 “순수한 과실미와 피네스(섬세함)을 반드시 느껴주면 좋겠다”고 당부했습니다. 언뜻 공존하기 어려워보이는 두 감각이 와인 한 잔에 안에 고스란히 담겨있고, 이것이 스승의 가르침 중 핵심인 ‘자신만의 스타일’이라는 설명입니다.

다행히 그의 의도는 와인을 통해 잘 전달된 것 같습니다. 평론가들이 포도 송이의 줄기를 철저하게 배제하고, 잘 익은 과실만 양조하는 것, 또 양조된 와인은 필터링을 하지 않은 채 병입하던 앙리 자이에의 철학을 이어받은 니콜라가 그 철학을 한 단계 발전시켰다는 평가를 내놓고 있으니까요.

쟝 니콜라 메오가 인터뷰를 끝내고 자신의 와인과 포즈를 취하고 있다.
니콜라에게 천정부지 치솟는 요즘 부르고뉴 와인의 가격에 대해 물었는데, 그는 대뜸 “비정상”이라며 인상을 찌푸렸습니다. 가격이 오른다는 것은 자신의 와인이 그만큼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는 뜻일텐데, 예상 외의 단정적인 답변에 조금 놀랐습니다. 그동안 만나본 부르고뉴 양조자들과 조금 달랐죠.

그는 “결코 정상이 아니다. 부르고뉴 와인을 투자나 투기로 생각하는 경향 때문에 가격이 5배까지 뛰기도 한다”며 “직접 비정상적인 가격을 조절을 해보려고 직접 시장에 개입을 시도했지만 결국 실패했다”고 덧붙였습니다. 부르고뉴 와인이 비싸질수록 자신의 벌이가 좋아지겠지만, 그것보다는 작품이 단순히 가격적으로만 소개·설명되는 것에 대한 장인으로서의 안타까움이 느껴지는 대답이었습니다.

인터뷰를 마치며, 예순을 목전에 둔 니콜라의 10년 후 와인이 궁금해졌습니다. 10년 뒤 다시 인터뷰를 하게 된다면 그때는 스승인 앙리 자이에가 아닌 쟝 니콜라 메오 본인만의 이야기가 펼쳐질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전설이라 불리는 최고의 스승에게서 양조의 정수를 배웠고, 딱히 스승을 목표로 하지 않았지만 스승에게 배운 것을 자신에게 맞게 조금씩 변주하기 시작한 니콜라. 어느새 성큼 찾아온 봄날의 한 가운데서 그의 표정처럼 진중하고 부드럽게 피어오르는 메오 까뮈제 와인을 한잔을 즐겨보는 것은 어떨까요.

와인은 시간이 빚어내는 술입니다. 인류의 역사와 함께 와인의 역사도 시작됐습니다. 그만큼 여러 가지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품고 있는데요. WSET(Wine & Spirit Education Trust) 국제공인레벨을 보유한 기자가 재미있고 맛있는 와인 이야기를 풀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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