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내 다리가, 3시간 만에 '마비'된다면…[남기자의 체헐리즘]
휠체어 테니스로 세계 랭킹 1위까지 오른 '고든 리드' 이야기
테니스 전설 '노박 조코비치'도 힘들어했던, 휠체어 테니스 직접 배워보니
[편집자주] 수습기자 때 휠체어를 타고 서울 시내를 다녀 봤습니다. 세상이 처음 불편해졌지요. 직접 체험해 알리는 기사를 써보기로 했습니다. 이름은 '체헐리즘', 체험과 저널리즘을 합친 말입니다. 사서 고생하며 깊숙한 이면을 알리고, 가장자리가 보이도록 힘쓰려합니다.
"만약에, 당신의 하반신이 3시간 만에 완전히 마비된다면?"
상상해본다. 평범한 날, 퇴근하고 와 씻고 식탁에 앉는다. 다 먹고 의자에서 일어나려 한다. 무릎이 갑자기 탁 풀려 쓰러진다. 아내가 "괜찮아? 넘어졌어?"하며 묻는다. 내가 대답한다. "오늘 좀 많이 걸었나? 피곤해서 그런가 봐." 이어 대수롭지 않게 덧붙인다.
"내일 아침이면 괜찮을 거야."
다음날 아침에 눈을 뜬다. 일어나서 출근하려 한다. 여전하다. 자고 나면 괜찮을 줄 알았는데. 아내를 황급히 깨운다. 내 다리가 계속 이상해. 그제야 두려움이 엄습한다. 아내가 구급차를 부른다. 병원에 간다.
그로부터 약 3시간 만에 하반신이 완전히 마비되어 버린다.
상상이라서, 내 일이 아니라서 다행인 걸까. 아닐 거다.
'만약에'란 녀석은 제멋대로 돌아다니다가, 아무 이유 없이 한 사람에게 파고들어, 평범한 삶을 송두리째 바꿔버리니까.
"아하, 저는 테니스도 아직 한 번도 못 쳐봤는데요."(기자)
유니클로 홍보팀과 홍보대행사 더시그니처에서 제안이 왔다. 약간 당황했으나 취지를 물었다. 저희가 10년 넘게 휠체어 테니스를 지원하고 있어요. 국제 대회도 열고요. 그런데 짐작하시겠으나 국내에선 관심이 너무 적습니다. 휠체어 테니스에 대한 관심도를 높이고 싶어요.
휠체어 테니스 경기장 사진을 봤다. 관중석이 텅 비어 있었다. 예상했던 대로다. 여기엔 두 가지 장벽이 있다. 휠체어(비장애인은 대부분 관심 없고)와 테니스(테니스 안 치는 사람은 무관심하고). 잘 알려볼 수 있을까.
'휠체어 테니스' 키워드로 너튜브를 검색했다. 973만 건을 기록한 영상이 있었다. 뭘까 싶었더니 익숙한 인물이 보였다. 현 세계 테니스 랭킹 1위이자 '살아 있는 전설'로 불리는 노박 조코비치 선수. 테니스를 잘 몰라도 그 이름은 들어봤다.
그 유명한 노박 조코비치가, 2017년에 자선 행사 이벤트로 처음 휠체어에 앉아 테니스를 치는 모습이었다. 상대는 당시 호주 휠체어 테니스 1위였던 딜런 알콧 선수.
결과는 노박 조코비치의 참패. 전설은 휠체어에 앉자마자 무력해졌다. 그 날카로운 백핸드도 완벽한 백핸드도, 당최 공을 쫓아가지도 못하니. 조코비치는 "가운데로만 공을 보내줘"라고 하다가 결국 휠체어에서 벌떡 일어나 달려와 스매싱을 날렸다. 둘은 서로 웃으며 안았다.
세계 테니스 1위도 좌절한 이 어려운 휠체어 테니스를, 처음 쳐보는 제가 할 수 있을까요.
다행히 훌륭한 선생님을 붙여준단다. 세계 휠체어 테니스 랭킹 5위,영국의 '고든 리드' 선수였다(헉).
테니스는 좀 더 특별했다. 스코틀랜드의 국민 영웅, 앤디 머레이를 보면 심장이 쿵쾅거렸다.
12살이었던 어느 금요일 저녁이었다. 늘 그랬듯 동네에서 애들하고 축구를 했다. 끝나고 함께 집으로 우르르 몰려갔다. 고든이 당시를 회상했다.
"의자에 앉아 있다가 일어나려 하는데 무릎이 탁 풀렸어요. 일어나질 못하겠더라고요. 친구들이 막 웃었고, 저도 웃기다며 함께 웃었어요. 복도에서 다릴 허우적거리니까 애들이 '걸어봐, 걸어봐' 그랬지요."
어머니가 의사에게 전화했다. 의사는 "축구하고 열기가 있어 그런 것 같다. 내일 아침이면 괜찮지 않을까 싶다"고 했다. 다음날 아침에 일어났는데 똑같았다.
심지어 3~4시간이 흐른 뒤엔, 하반신 마비가 완전히 오는 걸 느꼈다.
15세에 영국 최연소 휠체어 테니스 챔피언, 세계 4개 대회 그랜드슬램(호주 오픈, 롤랑 가로스, 윔블던, US오픈 우승), 리우 패럴림픽 금메달, 휠체어 테니스 세계 랭킹 1위였으며 현재도 랭킹 5위.
첫 테니스를 현재 단식 세계 랭킹 5위에게 배우다니, 심장이 쿵쿵. 두근거림과 불안이 혼재한 소리였다.
첫 연습은 '휠체어 밀기'. 수동 휠체어는 몇 번 탔었는데, 테니스 휠체어가 훨씬 부드러웠다. 턴하거나 스핀할 때 빨리할 수 있게 설계된 거란다. 왼쪽, 오른쪽으로 돌려봤다. 할만한데? 생각할 때였다. 고든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라켓은 절대 손을 떠나면 안 돼요. 무릎에다 놓고 하는 건 '치팅'이에요."
테니스 라켓을, 나도 모르게 무릎 위에 올려둔 거였다. 라켓을 쥔 채 휠체어를 다시 밀어보았다. 어려움이 3배가 됐다. 고든에게 힘듦을 토로했다(뭘 했다고). 라켓 쥐니까 바퀴가 잘 안 밀려요. 고든이 대답했다.
진단명은 '급성 횡단 척수염'. 감염 등에 의해 발생하는 척수의 염증. 인생이 완전히 뒤바뀌는 순간이었다. 고든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당연히 겁이 났지요. 근데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런 식으로 주저앉을 수 없다고, 최대한 내 몸을 써서 친구들과 놀겠다고요. 이렇게 살아야 한다면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한번 보자고요."
컴컴한 무서움을 새싹 같은 의지가 비집고 움텄다. 그러나 현실은 가혹했다. 6개월간 입원해야 했다. 학교도 못 가고 친구도 못 만났다. 침대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했다.
어마어마한 힘은 단 하나뿐이었다. 가족. 그냥 곁에 있어주는 것만으로. 병원에서 집까지는 기차 타고 1시간 거리인데, 매일 왔다갔다 했단다. 학교 이야기도 해주고, 숙제도 갖다주고, 좋아하는 축구팀 얘기도 해줬다. 그게 아녔다면 지금 많이 달라졌을 거라고.
몰랐다. 휠체어는 계속 움직여야 한단 걸. 공을 치고, 일정 지점으로 돌아온 뒤 다시 칠 준비를 한다. 8자를 그리며 계속 움직이란 거였다.
멈추면 다시 출발하는 게 더 힘들기에.
휠체어 바퀴를 움직였다. 라켓을 쥐고 하니 나아가기 너무 힘들었다. 손이 금세 뻐근해져 왔다. 속도를 내다가 갑자기 방향을 바꾸는 것도. 그냥 이렇게 도는 것만 해도 힘든데, 그러면서 날아오는 공을 보며 치라니.
포핸드와 백핸드를 처음 쳐봤다. 앞에 놓아주는 공을 치는 것까진 그럭저럭 칠만했다. 고든이 말했다.
"잘하는데요, 가능성이 있어요. 그럼 이제, 움직여서 쳐볼까요?"
올 것이 왔다. 휠체어로 움직이는 것, 그러면서 공을 치는 것, 둘을 함께하란 거였다.
'다 때려치워, 나도 더는 하기 싫어.'
처음이라 그런 날들도 있었다. 그보다 더 많은 날들은 기뻤단다.
그토록 즐겼던 테니스를 다시 할 수 있어서.'테니스를 두 다리로 칠 수 없어' 대신 '휠체어를 타고 테니스를 칠 수 있어'에 집중하고 기뻐했다.
힘겨운 날들을 지나게 해준 건, 그 길을 먼저 보여준 이들이었다.
"경험 많은 테니스 선수들을 보며, 저들이 뭘 할 수 있는가를 봤어요. 연습만 하면 저 사람들처럼 할 수 있겠다고. 마음을 다잡게 된 계기가 그랬지요."
고든 역시 그 자리에 섰다. 휠체어 테니스를 시작할 때, 막막할 때 '앞'을 보여준 이들처럼. 존경받는 위치에 왔다.
"주니어와 성인 선수들이 제게 말해요. '고든, 당신 경기를 보고 휠체어 테니스를 시작했어요.' 제가 롤모델을 보며 저렇게 되고 싶다고 시작한 것처럼요.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지만 행복합니다. 제 이야기가 많은 이들에게 영감이 되길 바라니까요."
그리 돌고 또 도는, 큰 동그라미가 만들어지는 것 같다며 환히 웃었다(고든 리드 선수 인터뷰 통역을 너무 잘해주신, 우승곤 한영통역사(오디세이 T&I 대표)님 고맙습니다).
너무 빨리 굴리니 공이 휠체어 앞에 떨어졌다. 라켓이 닿질 않았다. 고든이 조언했다.
"방금 완전히 등을 보였는데요. 움직일 때도 시선은 계속 공을 봐야 해요. 공이 떨어진다고 손을 먼저 뻗지 말고요. 두 번 정도는 바퀴를 굴릴 시간이 있어요."
'따악'하고 경쾌한 소리와 함께 건너편 코트로 넘어갔을 때, 때마침 시원한 바람이 불어 땀을 적당히 식혀주었을 때. 나도 모르게 환히 웃고 있었다. 고든은 바로 그거란 표정으로 활짝 웃으며 응원해줬다.
그 순간에, 휠체어를 탄 것도 잊었고, 눈높이가 비슷한 고든을 보며 마냥 웃게 되었다.
코칭을 마치고 고든이 티셔츠에 사인을 해주며 내게 말했다.
"기자님, 혹시 이 연습이 마지막인 건 아니죠?"(고든)
"아우, 그럼요. 오늘 정말 재밌었어요. 더 연습해서 좋은 플레이를 할 거예요."(기자)
"그럼 내년에 와서 확인하는 걸로 할게요(웃음)."(고든)
에필로그(epilogue).
기사 쓰느라 휠체어 테니스 랭킹을 자주 봤다. 이름, 나이, 국적, 이런 게 나왔다.
저절로 '대한민국 선수'를 찾고 있었다. 세계 랭킹 16위, 이름은 임호원. 태극기를 보며 자랑스러웠다.
그와 동시에 겹치는 장면은, 관객이 적어 텅 비게 느껴지던 휠체어 테니스 경기장.
'휠체어 테니스 전설'이라 불리는 쿠니에다 신고 선수(일본)의 SNS를 가봤다. 이 나라도 비슷한 상황인지.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생각보다 관중이 많아서였다.
휠체어 테니스가 활성화되길, 관심이 커지길, 우리나라도 스타플레이어가 나오길 막연히 바랐다. 그 이유는 임호원 선수의 인터뷰에서 찾았다. 의미가 이랬다.
"9살 때 다쳤어요. 병원에 있을 때 옆 병상 보호자 분이 '휠체어 테니스란 게 있는데 해봐라'라고 하셨지요. 코트장을 누비는 모습이 멋있더라고요. 다치고 나서 우울증이 있었거든요. 휠체어 테니스를 하고 다 치료했어요. 운동하며 항상 힘들지만 재밌었어요."
고든에게도 같은 고민을 털어놓았을 때, 그가 기운을 북돋아 주었다.
"기자님 인터뷰를 읽는 독자분들 중에서도, 휠체어 테니스를 처음 알게 돼 흥미 가지시는 분이 있을 거예요."
그 말을 믿고 쓰느라, 자정이 넘은 시간까지 이리 고민하고 있다.
남형도 기자 human@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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