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은 좀 그렇지만, 그런 작품 아니에요 [K콘텐츠의 순간들]

조경숙 2024. 4. 20.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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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툰 〈시월드가 내게 집착한다〉는 원작을 ‘초월 각색’했다는 평을 받는다. 모든 걸 포기하게 하는 시대이지만 그럼에도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은 마음’은 작품을 통해 이어진다.
웹툰 <시월드가 내게 집착한다>는 라피레온 대공가의 며느리가 된 주인공의 이야기를 다뤘다. ⓒNaver 웹툰 갈무리

“제목은 좀 그렇지만, 그런 작품 아니에요.” 자신이 좋아하는 작품을 홍보하는 사람들은 으레 이런 말을 한다. 웹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웹툰들의 제목이 웹소설 문법에 맞게 문장형 등으로 지어진 제목이 많다 보니, 독자들도 왠지 낯선지 이런 말을 꼭 덧붙이곤 하는 것이다. 예컨대 〈언니, 이번 생엔 내가 왕비야〉라거나 〈무림세가 천대받는 손녀딸이 되었다〉 등. 글자로만 읽는 건 아무 무리가 없지만, 입으로 작품 제목을 말하는 순간엔 나도 때때로 쑥스러워지곤 한다.

이런 방식으로 제목이 지어지는 데에는 웹소설계 나름의 이유가 있다. 장르의 주요 설정을 한눈에 보기 쉽게 한 것이다. 제목에 ‘이번 생엔 내가 왕비’라고 했으니 지난 생이 있다는 뜻이겠고, 그렇다면 주인공이 과거로 회귀하는 회귀물임을 쉽게 알 수 있다. 게다가 제목 서두에 ‘언니’라는 단어가 있는 만큼, 자매간의 전쟁이 이 작품의 핵심 플롯이라는 사실도 예측할 수 있다.

웹소설의 작명법을 이렇게 길게 설명하는 이유는, 오늘 소개하는 작품의 제목이 〈시월드가 내게 집착한다〉이기 때문이다. 동명의 웹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이 작품은 원작을 ‘초월 각색’했다는 평을 받는다. 작화와 연출을 통해 기존 원작 서사의 매력을 한층 더 업그레이드했다는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이 작품은 작화의 완성도가 높을 뿐만 아니라 섬세하고 미묘한 캐릭터 표정 연출이 일품이어서, 보는 내내 독자의 마음까지 두근두근 설레게 한다.

웹툰 〈시월드가 내게 집착한다〉는 라피레온 대공과 주인공 ‘페레샤티’가 결혼하는 것으로 본격적인 막을 연다. 많은 작품의 주인공이 그렇듯 페레샤티 역시 과거로 회귀했다. 이전 생에서 그녀는 믿었던 남편과 친정 가족들에게 배신당해 그들에게 독으로 살해당했다. 배신감과 절망 속에 죽어가던 기억이 선명한데, 눈을 떠보니 그녀는 살해당하기 이전의 과거로 돌아와 있었다. 페레샤티는 가족들의 손에서 벗어나기 위해 새로운 전략을 짠다. 바로 당대 최악의 전쟁광이라 불리는 라피레온 대공에게 1년간의 계약 결혼을 제안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기간 동안 대공가로부터 신변의 보호를 받으며 어떻게든 생존과 복수의 길을 찾으려 한다.

한편 라피레온 대공가에는 비밀이 하나 있으니, 그들 몸에 독성을 지닌 피가 흐른다는 것이다. 일반인들은 라피레온 가문 사람들의 피를 한두 방울만 접촉해도 금방 죽고 만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페레샤티에게는 이 독성이 통하지 않는다. 처음에는 페레샤티의 제안이 터무니없다고 여겨 여러 차례 거절했던 라피레온 대공조차 이런 페레샤티의 모습을 보고 1년간의 계약 결혼을 선뜻 수락한다.

라피레온 대공가는 대대로 돈과 권력을 모두 손에 쥐고 있었으나 저주로 인해 온전한 평안과 행복을 누리기 어려웠다. 피를 지닌 본인조차 몸이 약해지면 피에 의해 치명상을 입곤 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라피레온 대공가의 사람들은 발작하듯 피를 쏟는 경우도 허다했으며, 일반인들에 비해 수명이 짧았다. 그뿐이랴. 소중한 사람들이 자신의 피 때문에 죽게 될까 봐 늘 전전긍긍하며 몸에 작은 상처가 나 있는 부위가 없는지 신경 쓰며 장갑을 항시 착용했다. 작중 라피레온 대공의 누이 세르시아는 손가락 끝에 난 아주 자그마한 상처 때문에 남편과 아이를 모두 잃었다. 상처가 난 줄조차 인식하지 못했을 만큼 아주 작은 생채기였지만, 거기에서 나온 핏방울이 가족의 생명을 앗아간 것이다.

언제 죽을지도, 언제 죽일지도 모르는 상황인 터라 대공가 사람들은 늘 경계심으로 신경이 바짝 곤두서 있다. 그런 집안에서 페레샤티는 저주가 통하지 않는 유일한 사람으로, 그들이 안도할 수 있는 동시에 그들에게 새로운 ‘당위’를 전파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발작은 당연하며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치부하는 이들에게 “이렇게 아파하는데, 뭐라도 해야죠!(20화)" 하며 소용 없을 병간호라도 발 벗고 나서고, 저주를 푸는 방법을 알아내고자 문헌과 자료를 몽땅 꺼내 읽는다. 그렇게 페레샤티는 차츰 라피레온 대공가의 어둠을 걷어내는 한줄기 빛이 된다. 본래는 그녀 자신의 안위를 위해 들어온 집안이었지만, 반대로 이 가문 자체가 페레샤티를 통해 구원받게 된 것이다.

작품의 첫 화에선 냉철하고 쌀쌀하기 그지없던 대공이 사랑스럽게 페레샤티에게 스킨십을 할 뿐만 아니라 라피레온 대공가의 식구들이 페레샤티를 쫓아다니며 저마다 자신의 진심과 사랑을 고백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라피레온 대공가에 속한 아주 어린 아이부터 최강 권력을 지닌 선대 대공비까지 모두 페레샤티에게 모여들어 원하는 것을 말하라고 재촉한다. 제목 그대로 ‘시월드가 집착’하는 풍경이다.

결혼은 이야기의 결말이 아닌 서막

이 작품은 정성스럽게 직조된 로맨스이지만, 한편으로는 새로운 판타지 세계 안에서도 여전히 ‘시월드’를 의식하고 시가족의 전적인 사랑을 갈구하는 K 며느리의 여정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존재 자체로 인정받지 못하는 건 기본값이고, 능력으로 사랑을 쟁취하고 나아가 가족의 일원으로 인정받기 위해 떠나는 머나먼 모험물 말이다. 조건 없는 사랑이나 의도 없는 결혼은 판타지 세계에서조차 판타지로 취급된다. 페레샤티가 이전 생에서 조건 없이 사랑했던 남편이 사실 그녀의 유산과 신분을 노리고 접근한 사기꾼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이전에는 주인공이 우여곡절을 겪은 후 결혼으로 골인하곤 했지만, 이제 결혼은 이야기의 결말이 아니라 서막으로 옮겨졌다. 조건과 목적을 위해 떠밀리듯 결혼식을 올리는 캐릭터가 태반이다. 결혼은 사랑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사실을 그 누구보다도 바로 로맨스 판타지 작품들이 가장 적나라하게 재현하는 셈이다. 그럼에도 이 작품들은 갈구한다, 남편의 사랑과 시가족의 인정을. 심지어 친정 가족도 마찬가지다. 페레샤티의 친정 가족들이 오랜 시간을 함께 보냈음에도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것처럼, 오랜 가족조차 조건 없는 사랑의 대상이 되진 않는다. 가족이라 생각했던 이들이 이해관계 앞에 차갑고 매정하게 돌아서는 이 세계관 안에 있는 이상, 페레샤티가 새 가족을 얻기 위해 무엇보다 자신의 쓸모를 먼저 찾아야 했던 건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사랑을 위해 쓸모를 찾고, 쓸모를 찾으며 간절히 사랑을 갈구하는 이 작품은 역설적으로 사람들이 얼마나 사랑을 그리워하는지 여실히 느끼게 한다. 결혼도 포기하고, 아이도 포기하고, 모든 걸 포기하게 하는 시대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은 마음’은 작품을 통해 이어지는 듯하다. 이 마음이야말로 우리 시대가 말하지 않는(혹은 못하는) 시대정신 아닐까.

조경숙 (만화 평론가)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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