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의 손으로 쌓아올린 기적”... 소녀상, 평화를 새기다

이나경 기자 2024. 4. 20. 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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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평화의 소녀상 건립 10주년 전시회
인권운동가 故 안점순 할머니 ‘기억의 방’
2017년 독일 ‘순이’ 등 역사 기록 한곳에
日 야지마 쓰카사 작가의 사진 작품도
“계속되는 전쟁… 연대의 마음 이어지길”
지난 15일 수원시가족여성회관 갤러리에서 개막한 '수원 평화의 소녀상 건립 10주년 기념 전시회'에는 살아 생전 용담 안점순 선생의 모습과 세계 곳곳에 건립된 평화비의 모습이 지도에 표현돼 있다. 이나경기자

 

1940년대 어느 날, “방앗간 앞으로 몇 살부터 몇 살까지 여자 아이들은 다 모여라”라는 방송이 울려 퍼졌다. 열 네 살 소녀 순이 역시 엄마 손을 붙잡고 방앗간 앞으로 모였다. 쌀가마를 재는 저울에 마을 여성들이 한 명씩 올라섰고, 일정 몸무게가 넘은 이들은 영문도 모른 채 트럭에 올라탔다.

11세부터 27세까지 여성들은 이유도 모른 채, 아는 이 하나 없는 땅에 끌려가 지옥 같은 시간을 보내야 했다. 전쟁이 끝나자 일본군은 여성들을 버리고 도망쳤다. 무작정 걷던 순이는 우연히 광복군을 만난 꿈에 그리던 복사골 집으로, 가족의 품 안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안점순’이다.

1991년 8월14일 김학순 할머니가 국내 최초로 공식석상에 나와 일본군성노예제 피해증언을 했다. 위안부 문제가 피해 당사자의 입을 통해 세상에 본격적으로 드러난 순간이었다. 그로부터 2년 뒤 막내 조카가 안점순 할머니를 피해자로 신고하고, 조카를 따라 수원에 내려온 뒤에도 할머니는 세상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피해자 지원단체가 끊임 없이 문을 두드렸다. 열네 살의 기억에서 60여년이 지난 용기의 발걸음은 마침내 2002년 75세의 나이에 안점순이라는 이름으로 그녀를 세상에 나오게 만들었다.

■ 가장 취약한 존재였던 ‘소녀’의 날갯짓…‘수원시민’과 만나다

2014년 수원 평화의 소녀상 제막식에 참석했던 안점순, 김복동, 길원옥 할머니의 모습. 수원평화나비 제공

안점순 할머니, 용담 선생은 그때부터 강인한 인권 운동가의 길을 걸었다. 일본 대사관 앞 수요시위에 참석하고, UN 인권위원회 여성폭력문제특별보고관에게 진정서를 제출하며 ILO(국제노동기구)의 국제심포지엄에도 참여했다. 2015년 한일합의 무효의 의지로 위로금 수령을 거부하기도 했다.

할머니의 활동은 수원 시민에게 큰 감명을 남겼다. 2014년 3월 오로지 수원 시민들의 자발적인 움직임으로 수원평화비건립추진위원회가 만들어졌다. ‘평화의 소녀상’으로도 불리우는 ‘평화비’는 일본군성노예제 문제의 역사적 사실을 기억하고, 전시 성폭력의 비극이 재발하지 않기를 바라는 염원 속 국내와 세계 곳곳에 존재한다. 수원 평화의 소녀상은 오롯이 시민의 노력으로 이뤄졌다는 특별함을 갖는다.

2014년 수원 평화의 소녀상 제막 당시 안점순 할머니와 시민들의 모습. 이번 전시에선 사진으로 기록된 할머니와 시민들이 함께 걸어온 발자취를 만날 수 있다. 수원평화나비 제공

수원지역의 어린 학생들은 천원부터 만원까지 주머닛 속 꼬깃꼬깃하지만 소중한 마음을 내밀었다. 그렇게 건립기금 7천여만원이 모여 수원시청 맞은편 올림픽공원에 평화의 소녀상이 건립됐다. 이를 계기로 ‘수원평화나비’가 창립되고 매월 첫번째 수요일마다 평화비 앞에서 ‘수원 수요문화제’가 열리고 있다.

안점순 할머니와 수원시민, 평화나비 그리고 수원시의 노력은 끝나지 않았다. 2016년 수원시는 자매결연을 맺은 독일 프라이부르크시에 소녀상 건립을 제안했고, 이때 역시 수원시민의 정성이 담긴 모금이 이뤄졌다. 일본의 방해로 무산됐지만 2017년 독일 중남부 레겐스부르크 인근 네팔 히말라야 파비용 공원에 ‘순이’라는 이름의 평화의 소녀상이 세워질 수 있었다. 이듬해인 2018년 안점순 할머니는 평화의 메시지를 남기며 영면에 들었다. 할머니를 기억하며 수원시가족여성회관에는 순이가 열네 살의 나이에 올라야 했던 저울을 포함해 할머니의 시간과 여러 위안부 피해 생존자들의 메시지가 담겨 있는 ‘기억의 방’이 자리하고 있다.

전시에서 만나볼 수 있는 2017년 독일에 '순이' 평화비를 제막하던 당시 용담 안점순 할머니 등 시민들의 모습. 이나경기자

■ 우리가 기억해야 할 역사, ‘나비의 작은 날개짓, 연대의 바람으로’

지난 15일 수원시 팔달구 수원시가족여성회관에서 개막한 ‘수원 평화의 소녀상 건립 10주년 전시회’는 안점순 할머니와 수원시민이 함께한 따뜻하면서도 강력한 연대의 시간과, 우리가 결코 잊지 말아야 할 역사의 기록을 되새길 수 있는 공간이다. ‘기억의 방’ 바로 위에 위치해있다.

전시에서는 2014년 수원 평화의 소녀상이 처음 만들어지던 때, 2017년 독일에 ‘순이’가 만들어지던 환희의 순간 등을 만날 수 있다. 사진 속에는 평화비가 건립되기까지 안점순 할머니 등 어르신들과 이들 곁을 지킨 어린 청소년부터 청년, 학부모 단체 등 수많은 시민의 기쁨의 발자취가 담겨 있다. 수원여성회, 수원청년포럼, 수원청소년인권센터, 수원시안경사회, 수원참교육학부모회 등 숱한 시민단체가 그 곁을 지키고 있었다. 이와 함께 수요문화제, 수요집회(수요시위) 등의 발자취도 볼 수 있다.

역사 기록물도 만나볼 수 있다. 야지마 츠카사 작가는 일본 와세대 대학에서 역사학을 전공한 아사히 신문의 사진기자 출신이자 2003년부터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관련 활동을 해 온 인물이다. 전시에는 일제에 의해 중국내 위안소로 동원된 후 해방 후에도 고향으로 귀국하지 못한 네 명의 할머니와 당시 중국에서 위안부 건물로 사용됐던 실제 건물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긴 사진작품이 전시돼 있다.

■ 제국주의의 유린, ‘인권’에 관한 이야기

일본 아사히 신문 사진기자 출신인 야지마 츠카사 작가가 위안부 할머니의 모습을 담은 사진 작품을 들여다 보고 있다. 이나경기자

가해국 일본의 남성이 위안부 문제에 이토록 관심을 갖고 오랜 시간 활동해 온 이유에 대해 그는 “위안부는 ‘인권의 문제’라는 공통된 시각을 갖는다”고 말한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 위안소에 끌려가 성노예 생활을 강요당한 여성은 조선인뿐만이 아니다. 중국, 필리핀, 태국, 베트남 등 일본 제국의 손이 닿는 수많은 아시아 태평양 식민지 여성을 대상으로 한 인권문제이자 전쟁범죄다.

야지마 츠카사 작가는 “역사를 왜곡하려는 시도는 일본뿐만 아니라 국내에도 있다”며 “역사는 기억과 계승이 중요하다. 피해 당사자 중심에서 정확히 역사를 기록하기 위해 이 사람들의 얼굴, 이름 하나하나에 주목했다”고 전했다.

그가 만난 이들이 담긴 사진 작품에는 만주 공장서 일하면 큰 돈을 벌 수 있다는 직업소개에 속아 18세에 중국으로 끌려간 리수단 할머니, 11남매 중 막내로 태어나 가족을 돕기 위해 음식점서 일하다 직업소개소에 의해 팔려간 박서운 할머니 등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그들이 털어놓은 사연에서 돈을 벌게 해주겠다는 말에 속아 타지로 끌려갈 수밖에 없던 소녀들의 안타까운 시간을 만날 수 있다.

■ 잊지 말아야 할 기억과 평화의 연대

지난 15일 수원 평화의 소녀상 건립 10주년 기념 전시회에서 개막을 기념하며 참석자들이 나비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날 현장에는 윤미향 국회의원, 박란자 수원특례시 복지여성국장, 박옥분 경기도의회 의원(더불어민주당, 수원2), 이성호 수원평화나비 공동대표 겸 수원평화의소녀상건립10주년기념사업취진위원회 집행위원장 등이 참석했다. 이나경기자

이날 개막식에 참여한 김희경 수원여성회 공동대표는 “평화비는 전쟁범죄를 드러내는 가장 아름답고도 강렬한 저항”이라며 “가장 취약한 존재였던 소녀들에게서 평화의 이야기가 다시 시작되듯 위안부 문제도 세계 곳곳에서 계속되는 전쟁에도 연대의 마음이 이어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기념전시회는 수원시가족여성회관에서 다음달 4일까지 이어지며 광교홍재도서관(4.22~4.28), 수원시청로비(4.29~5.3), 호매실도서관(4.14~4.21) 등 3곳에서도 동시에 열린다.

수원 평화의 소녀상 건립 1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는 시민의 손으로 수원에 평화비가 세워진 지 10년을 기념해 다양한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지난 3월1일 진행된 ‘갑진년 삼월일일, 내가 안점순이다! 내가 임면수다!’ 공연에 이어 5월1일에는 제85차 수요문화제 및 수원평화의 소녀상 건립10주년 기념식이 수원평화비 앞에서 열릴 예정이다. 다음달부터 10월까지는 ‘기억의 방’ 견학 및 학교와 현장 강의 등 인권 교육이 열릴 예정이다.

이나경 기자 greennforest21@kyeong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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