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던 경성]윤극영 ‘반달’히트 이끈 라디오의 힘

김기철 학술전문기자 2024. 4. 20.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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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라이브러리 속의 모던 경성]1924년12월 조선일보 시험방송서’반달’연주…1933년 조선어 제2방송, 동요 매주 2회 편성
1930년대는 윤극영, 윤석중, 정순철, 홍난파 등이 만든 동요가 대유행하면서 동요의 전성시대를 구가했다. 동요 전성시대를 이끈 주역 중 하나는 라디오였다. 1933년4월부터 조선어방송을 시작한 경성방송국은 매주 2회 동요프로그램을 방송해 동요 보급에 커다란 공을 세웠다.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 정다운

1931년 월간지 ‘동광’(제22호)에 실린 홍종인의’반도 악단인 만평’은 당대 조선인 음악가들의 활약과 평가를 담은 귀중한 글이다. 한국음악사 연구자들이 단골로 인용하는 기록이기도 하다.

김인식, 김형준, 이상준 같은 서양음악 1세대부터 출발, 성악의 현제명 안기영 이인선 박경희(朴慶姬) 윤심덕·성덕, 피아노의 김영환 김원복, 바이올린의 홍난파,계정식,안병소, 첼로 안익태까지 당시 주목받던 음악가들을 망라했다. 여기에 당시 스물여덟인 윤극영(1903~1988)이 동요작가론 이례적으로 이름을 올렸다. 동덕여고보 교사였던 정순철과 함께였다. 창작 동요를 서양 음악의 한 장르로 인정했고, 그 분야 대표주자로 윤극영과 정순철을 꼽은 셈이다.

‘벌써 6,7년 전 일본 동요의 직역(直譯)이 많이 유행하며 어린이들의 잡지에 동요곡이 많이 실리울 때 이 노래가 한 번 발표되자 크게 유행하였다. 확실히 어떤 때는 ‘푸른 하늘’의 시대를 지었었던 것이다.’

홍종인은 ‘반달’을 ‘창작곡으로 동요 작곡에 한 기축을 지은 귀여운 노래’라고 평가했다.

1926 년 출간된 윤극영 동요작곡집 '반달'.'설날' '고드름' 등 10곡이 실렸다.

◇'푸른 하늘 은하수...’, 1924년 11월 잡지‘어린이’에 발표

‘반달’은 소파 방정환이 펴낸 잡지 ‘어린이’(제2권11호·1924년11월)에 처음 발표됐다.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에’로 시작하는 가사와 악보를 실어 쉽게 따라부를 수있게 했다. 1926년 윤극영의 첫 창작동요집 ‘반달’의 머릿곡으로도 실렸다. 학계는 윤극영의 ‘반달’이 발표된 1924년을 한국동요의 출발로 보고, 올해를 창작 동요 100년으로 기념한다. 작년 12월 한국동요문화협회 주관으로 ‘창작동요100년사’라는 책이 나왔다.

◇1924년12월 첫 라디오방송서 ‘반달’선보여

‘반달’은 발표 직후부터 화제를 모았다. 라디오 전파를 타고 울려퍼진 첫 동요였기 때문이다. 조선일보는 1924년 12월17일~19일 최초의 첫 민간 라디오 시험방송을 실시했다. 수표동 조선일보 사옥 이상재 사장실에서 방송을 진행했다. 청중들은 600미터쯤 떨어진 종로2가 우미관에 모여 스피커로 방송을 들었다. 첫날인 17일 오후1시와 저녁 두차례 시험방송이 이뤄졌는데, 우미관에 인파가 너무 많이 몰려 방송이 두세 시간 연기되는 곡절을 겪었다. 성악가이기도 한 윤극영은 저녁에 출연, 자작곡 ‘반달’을 불렀다. 바이올리니스트 홍난파도 함께 출연했다.

‘벽두에 본사 편집국장 민태원씨의 례사가 시작되며 뒤를 이어서 성악가 윤극영씨의 동요 ‘반달’과 홍영후씨의 ‘바이요린’ 독주가 있었으며 뒤를 이어서 정악전습소원의 관현악 합주와 조동석씨의 단소독주가 있었는데 불행히 첫날에는 용산 육군 무선전신국에서 강한 전파가 흘러오는 영향을 받아 완전한 성공을 못함은 가장 유감이었스나 하는 수없는 일이었었다.’(‘강연에 심취한 학생’, 조선일보 1924년12월18일)

윤극영이 간도에서 귀국해 독창회를 갖는다는 소식을 전한 조선일보 1934년4월27일자

◇색동회 창립멤버

경기고보를 나온 윤극영은 1920년 경성법학전문학교에 들어갔다. 1년만에 휴학하고 1921년 도쿄로 건너가 동양음악학교와 도쿄음악학교에서 성악을 전공했다. 당시 도쿄에 유학왔던 방정환과의 만남이 인생을 바꿨다. 어린이 노래를 만드는 데 평생을 바치기로 결심한 것이다. 윤극영은 방정환이 1923년 5월 도쿄에서 설립한 ‘색동회’에 참여했다. 그해 9월 관동대지진으로 귀국한 윤극영은 이듬해 8월 최초의 어린이 합창단 ‘다알리아회’를 조직했다.

◇'설날’ ‘고드름’ 앞서 발표

윤극영이 ‘반달’에 앞서 ‘설날’, ‘고드름’을 먼저 발표했다는 사실은 덜 알려져있다. ‘까치 까치 설날은 어저께구요, 우리 우리 설날은 오늘이래요.’ 윤극영이 잡지 ‘어린이’ 1924년1월호에 발표한 ‘설날’은 지금까지도 불리는 히트곡이다. ‘고드름 고드름 수정고드름’으로 시작하는 ‘고드름’은 다음호인 1924년2월호에 선보였다. 꼭 100년 전, 지금도 널리 불리는 어린이 애창곡 3편이 한꺼번에 탄생한 것이다. 이 노래들은 1926년 출간된 첫 창작동요집 ‘반달’에 실렸다. 신문도 주목했다.

‘작곡가로 조선악단에서 이름이 있는 ‘따리아회’주간 윤극영씨는 오랫동안 ‘따리아회’에서 어린이들의 동요교육을 위하야 노력하여 오든 중 금번에 따리아회 어린이들을 위하야 윤극영씨가 작곡한 여러가지 재미있는 동요 수십여 가지를 모아서 윤극영동요작곡집 ‘반달’을 출판하였다는데 이 ‘반달’이라는 작품집은 조선사람의 손으로 된 동요작곡집으로 처음일뿐만 아니라 그속에 있는 여러가지 동요가 전부 조선 정조(情調)가 흘러 조선 어린이들의 마음에 맞는 좋은 동요집이라 한다. 제책과 징정과 인쇄가 미려한 이 동요작곡집이 책사에 나오기는 8일오후이라는데 정가는 50전이라한다.’(‘조선 정조 농후한 동요작곡집’,조선일보 1926년2월8일)

한국 동요의 아버지 윤극영

◇라디오 인기 힘입은 ‘반달’

‘반달’의 대유행은 식민지 조선의 애잔한 정서를 담은 곡조와 쉬운 노랫말 등에 크게 힘입었다. 윤극영에 이어 정순철이 1929년 펴낸 동요집 ‘갈닙피리’(총 10곡)엔 윤석중이 노랫말을 쓴 ‘우리 애기 행진곡’이 맨 마지막에 실렸다. ‘엄마 앞에서 짝짜꿍’으로 시작하는 동요 ‘짝짜궁’이다. 윤석중은 당시 열여덟살로 양정고보생이었다.정순철(1901~?)은 천도교 2대 교주 최시형의 외손자로 도쿄 음악학교를 다닌 음악도였다. (’양정고보생 윤석중·동학 최시형 외손자 정순철, 국민동요 ‘짝짜꿍’만들다’, ‘모던 경성’ 2022년 5월4일)

정순철은 1932년에도 동요집 ‘참새의 노래’를 냈다. 같은 해 ‘윤석중 동요집’도 나왔는데, 윤극영과 합작한 ‘우산 셋 나란히’ ‘맴맴’ 등 히트곡이 실렸다. 홍난파도 1929년과 1933년 각각 ‘조선동요 100곡집’ 상,하권을 펴내 동요의 시대를 열었다. ‘고향의 봄’을 비롯, ‘퐁당퐁당’ ‘달마중(달맞이)’같은 한국인 모두가 부를 수 있는 노래가 실렸다. 이렇게 창작 동요는 1920년대 싹 틔우기 시작해 1930년대 만개했다.

◇1930년대 만개한 창작 동요

일제시대 국악 발전에 라디오가 기여했다는 사실은 국악연구자들 사이에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라디오가 동요 보급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은 간과돼왔다. 1927년2월 출범한 경성방송국은 세계 대부분 라디오 방송처럼 음악프로그램 비중이 상당히 높았다. 특히 1933년 4월26일 조선어 채널(경성방송국 제2방송)이 출범하면서 조선 청취자가 선호하는 전통 음악과 창작 동요의 비중이 커졌다. (’라디오 놓고 충돌한 新舊 세대갈등’, 모던 경성 2023년 3월23일)

박용규 교수 연구에 따르면, 1930년대 하루 4개 정도 편성된 오락 프로그램 중 3개 이상이 음악이었는데, 판소리, 잡가, 아악 같은 전통음악이 절반에서 70%를 차지했고, 서양음악은 20%~30%를 차지했다. 동요프로그램은 서양음악으로 분류했다.

◇매주 2회 동요프로그램 편성

조선일보에 실린 라디오 편성표를 살펴보면, 조선어방송인 제2방송이 생긴 1933년 4월 이후 동요 프로그램은 매주 1~2회(회당 25분~30분), 오후 6시에 주로 편성했다. 예를 들어, 1933년 6월은 7회, 7월은 5회 동요프로그램이 방송됐다.

1930년대 전통음악과 서양음악, 동요 프로그램은 대부분 출연자가 방송국에 나와서 실시간으로 연주했다. 동요는 학교나 단체 합창단이 주로 출연, 제창과 독창을 불렀고, 독창자가 나서는 경우도 있었다. 윤극영의 ‘반달’은 1933년~1939년 매년 서너차례씩 꾸준히 라디오 방송을 탔다. 홍난파의 ‘낮에 나온 반달’과 앞서거니 뒷서거니 경쟁했으나 ‘반달’의 우세승이었다. 방송에 출연한 연주자들이 ‘반달’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이렇듯 갓 태어난 창작 동요는 1930년대 라디오란 첨단 문명의 이기를 맞아 순풍에 돛단듯 항해를 시작했다.

◇참고자료

홍종인, 반도악단인만평, 동광 제22호, 1931.6

박용규, 일제하 라디오 방송의 음악프로그램에 관한 연구-1930년대를 중심으로, 언론정보연구 47권2호, 서울대 언론정보연구소,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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