尹, 방향은 옳다? 미안하지만 방향이란 게 아예 없었다

박세열 기자 2024. 4. 20.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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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열 칼럼] '자기 최면'은 위험하다

윤석열 대통령은 취임 1년을 맞은 작년 5월 10일, 국민의힘 지도부 등과 오찬을 함께했다. 그 자리에서 "무너진 것을 다시 세우는 데는 시간과 노력이 많이 들지만, 대한민국은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확신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우리 국민들이 변화와 개혁 체감하기에 시간이 좀 모자랐다. 2년 차에는 속도를 더 내서 국민들이 변화를 직접 체감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다짐했다.

"선거는 내 얼굴로 치르는 것"이라고 장담하던 대통령은 11개월이 지난 후 108석의 처참한 성적표를 받아들인다. 장고에 들어갔던 대통령이 엿새만에 육성으로 한 말은 취임 1년을 맞았을 때 한 말과 토시만 다르지 사실상 똑같았다.

"올바른 국정의 방향을 잡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음에도, 국민께서 체감하실 만큼의 변화를 만드는 데는 모자랐다."

심지어 비공개 회의에서 참모들에게 이번 총선 결과를 "어머니가 주시는 사랑의 회초리"에 비유했다. 1년간 대통령의 인식이 전혀 바뀌지 않았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지만, 이 정도면 거의 '자기 주문'에 가까운 것 아닌가 싶다.

대통령이 틀렸다. "올바른 국정의 방향"을 잡은 게 아니라, 아예 방향 자체가 없었던 것이다. 물론 자아 붕괴를 예방하기 위해선 '내가 틀렸다'고 인정하는 것보다 '방향은 옳았다'고 자기 최면을 거는 게 훨씬 쉬운 일이다. '나는 틀리지 않았다'고 강변하는 건 역으로 이 정부와 대통령이 가진 불안증을 드러내 주는 일이다.

국정 운영 방향 자체가 없었다는 건 여러 사례로 증명된다. 건전 재정 한다면서 IMF 구제금융 사태 때도 늘렸던 R&D 예산을 대폭 삭감한 일을 보자. "나눠먹기식, 갈라먹기식 R&D는 제로베이스에서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며 실체조차 불분명한 '과학계 카르텔'을 타파한다고 했다. 하지만 선거를 코앞에 둔 지난 3일 갑자기 '방향'을 180도 회전시키더니 "내년도 R&D 예산은 역대 최고 수준을 목표로 하고 있다"(대통령실)고 했다.

'15% 삭감'에서 '역대 최대치'로 널뛰기한 근거를 대통령실은 "작년 지적됐던 연구 지원 방식의 비효율 부분에 대해선 우리 각고의 노력을 통해, 또 연구자들의 헌신적·희생적 협조를 통해 많은 조정이 이뤄졌다"고 설명했는데, 정작 카르텔의 실체는 무엇이었고, 그것은 어떻게 타파됐는지, 어떤 '많은 조정'이 이뤄졌는지 구체적인 수치와 성과는 단 한번도 제시된 적이 없다.

작년 6월 윤 대통령은 대입 수학능력시험의 '킬러 문항'을 없애라고 지시하며 뜬금없이 '사교육 카르텔' 타파를 내건 바 있다. 그해 2024학년도 수능 시험은 고약한 난이도의 '불수능' 평가를 받았다. 작년 사교육비는 1조2000억 원 증가해 27조 1000억원을 찍었다. 교육부와 통계청이 낸 수치로 보면 역대 최고치를 갈아치웠다. 염치가 있다면 작년에 학생수가 줄었는데도 사교육비가 되레 늘어난 결과를 두고 '카르텔 타파 성과'라느니 '올바른 국정의 방향'이라느니 말할 수 없다.

'방향 잃음'의 정점을 찍은 건 정부공직자윤리위원회가 지난달 29일 이 정부 초대 경찰청 국가수사본부장을 지낸 남구준 전 본부장이 '사교육 카르텔' 관련 수사를 받는 입시업체 메가스터디의 사외이사로 취직하는 걸 승인한 일이었다. 대통령은 '카르텔 타파'로 방향을 잡았는데, 결과는 엉뚱하게 '카르텔 강화'로 귀결된 모양새다. 여기에 무슨 방향성이 있단 말인가.

몇 가지 더 예를 들어보자. 2023년 3월 주 최대 69시간 노동을 골자로 하는 안을 '방향'을 발표했는데, 대통령이 불과 열흘 만에 "주 60시간 이상 근로는 무리"라고 '방향'을 틀었다. 2022년 7월 '만 5세 초등학교 입학안'(초등학교 학제 개편안)이 갑작스레 튀어나왔다. '혁명'과 같은 정책 방향에 모든 교육 주체들이 경악했고, 결국 '방향'을 내놓은지 4일만에 철회됐다. 박순애 교육부총리는 임명 재가 35일 만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연금·교육·노동 개혁은 지난 2년간 윤 대통령의 단골 레파토리였다. 연금 개혁안은 그 흔한 수치 하나 내놓지 못했고, 교육 개혁은 대통령 손이 타는대로 족족 실패했다. 노동 개혁은 '줄줄이 스톱' 상태에서, 조직적 실체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건폭' 몇 명 입건한 게 전부인데다, 선거를 앞두고 야심차게 내놓은 의료 개혁은 미궁 속으로 빠지고 있다. 최대 하이라이트는 '건전재정' 한다면서 '대규모 감세'를 감행해 역대급 세수 펑크를 낸 일이다. 이건 정부 내에서 서로 다른 '방향성'이 맞달려 정면으로 충돌한 꼴이었다.

'방향 없는 정치'는 '검찰 정치'를 연상케 한다. 검찰이 공무를 수행하는데 무슨 방향성이 있겠는가. 가만히 있다가 사건이 걸리면 공개 수사로 전환하고 압수수색 영장을 들이밀며 '카르텔'을 치면 그만이다. 기소할 만한 건수가 발견되면 기소하고, 그게 안되면 뭉개고 간다. 기소돼 무죄가 나와도 검찰은 책임질 일이 없다. 그때그때 '범죄자'를 만드는 식으로 검찰 수사하듯 국정 운영을 해 놓고 이제 와서 '방향은 옳았다'고 우기면 유권자들은 허탈해 진다. 방향이 없는데 방향이 옳다고 하면 두 단계를 뛰어 넘는 비약이 된다.

하지만 윤 대통령은 현실을 깨닫는 대신, 자기 최면을 걸기로 한 것 같다. 인간은 누구에게나 '자기 방어 기제'가 있다. 그런데 대통령직에 앉아서 '자기 방어 기제'를 작동시키면, 유권자는 적잖게 당황하게 된다. 대통령은 왜 이번 총선에서 참패했는지 '유권자의 표심 방향'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대통령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 중 친윤석열계 박수영 의원은 이런 말을 했다. "참패는 했지만 4년전보다 의석은 5석이 늘었고 득표율 격차는 5.4%로 줄었습니다. 뚜벅뚜벅 전략, 또는 가랑비 전략으로 3%만 가져오면 대선에 이깁니다. 의정활동에 충실한 것이 정답입니다." 헌데 계산법이 틀렸다. 국민의힘 의석수는 2024년 3월 현재 114석(국민의힘 101석, 위성정당으로 분할된 국민의미래 13석)이다. 지난 21대 총선 103석(미래통합당+미래한국당)에서 시작해 국민의당, 무소속, 민주당 탈당파 등을 흡수, 지역구, 비례대표 의원 수를 늘려 114석까지 끌어올렸는데, 이번에 108석을 얻어 총 6석을 잃었다는 게 팩트다.

유권자들이 국민의힘 의석 6개를 빼앗은 셈인데, 이걸 두고 21대 총선 당선 의석 기준을 들이밀어 "의석수를 늘렸다"고 아전인수 하는 걸 보면 아직 정신을 못 차린 게 분명하다.

게다가 '야당'으로서 대선에 이긴 경험을, 여당으로 임해야 할 차기 대선에 대입하고 있는 건 그 '방향성' 자체가 틀렸다. 설마 대통령을 탈당시켜 스스로 '야당'이 된 후 2022년식 대선 전략을 재가동해 또 다시 집권할 수 있을 것이란 의미인가? 108석의 의미는 '탄핵 저지선에서 8석이나 더 얻었네'가 아니고, '8석만 이탈하면 탄핵 저지선이 무너질 수 있겠네'라는 것이다.

"어머니가 주시는 사랑의 회초리" 식의 낭만적 감상에 젖어 있는 대통령의 1년 전 상황 인식과, 현재 상황 인식은 달라진 게 전혀 없다. 지난 2년간 봐 왔던 '무오류의 대통령'은 변할 생각도, 변할 수도 없는 것 같다. 이제부터 달라진 정치 지형 하에서 벌어질 모든 일들은 온전히 대통령의 책임이 될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10일 오후 경기 수원 팔달구 서호 잔디광장에서 열린 제28회 농업인의 날 기념식에서 어퍼컷 세리머니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박세열 기자(ilys123@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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