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어다!” 바다에서 영화 ‘매드맥스’가 펼쳐졌다

김성윤 기자 2024. 4. 20. 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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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출발 신호에 전속력 질주
저도어장 문어잡이 현장
2024년 4월 5일 문어잡이 배들이 대진항을 나와 저도어장을 향하고 있다./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오전 7시, 해양경찰 경비함정이 출발 신호를 울렸다. 귀가 찢어질 듯한 엔진음이 바다를 뒤덮으며 어선 142척이 일제히 전 속력으로 물살을 갈랐다. 영화 ‘매드맥스’ 질주 장면의 해양 버전 같았다. 결승점은 어로한계선 너머 1800m 북쪽에 있는 동해 저도어장. 고성군수협 최영희 조합장은 “오늘(4월 5일)은 저도어장이 올해 처음 열리는 날”이라며 “문어잡이 포인트를 선점하려고 어선들이 저렇게 튀어나가는 것”이라고 했다. ‘아무튼, 주말’은 어업지도선을 얻어 타고 문어잡이 현장을 취재했다.

◇동해 대문어의 고향 고성 저도어장

저도(猪島)는 강원도 고성군 현내면 해안에서 930m 떨어진 작은 돌섬. 웅크리고 앉은 돼지처럼 생겼다. 섬을 기점으로 북쪽으로 500m, 동쪽으로 1500m 직사각형 모양인 동해 최북단 저도어장은 작지만 해삼·성게·미역·홍합 등 어족 자원이 풍부하다. 특히 문어가 크고 많이 잡히기로 유명하다. 최 조합장은 “저도 주변 바다 바닥이 암반이라 바위 틈새에 몸을 숨기고 사는 문어 서식지로 최적인 데다, 수온이 낮고 물살이 세지 않아 육질이 부드럽고 향이 좋다”고 했다.

저도어장은 어로한계선(북위 38도 33분)을 벗어난 38도 34분에 있다. 북방한계선(NLL)에서 3㎞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우리 어선이 북한 경비정에 피랍되는 사건이 속출하자 1960년대 어로한계선이 설정됐다. 저도어장에서 어업이 가능해진 건 1972년부터. 매년 4월부터 12월 말까지 한시적으로 개방된다. 고성군 대진항과 초도항에 등록된 어선 200여 척만 입어(入漁) 가능하고, 안전 조업과 피랍 방지를 위해 해군·해경 경비함과 어업지도선의 통제를 받는다.

문어잡이 배들이 대진항을 나와 저도어장을 향하고 있다./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고성군수협 이종규 유통판매사업과장은 “올해 저도어장은 지난 4일 개방 예정이었지만 날씨가 좋지 않아서 하루 늦춰졌다”고 했다. 새벽 4시부터 대진항은 조업을 준비하는 어민들로 분주했다. 저도어장이 개방되는 4월 초 문어 어획량이 많고 대문어가 잘 잡히기 때문이다. 5시 30분쯤부터 어선들이 하나둘 대진항을 빠져나갔다.

출항한 지 30여 분, 어업지도선이 속도를 늦췄다. 위도 표시판이 ‘북위 38도33분’을 가리켰다. 해안에 서 있는 붉은 등대 2개가 일렬로 나란해지는 해상이 어로한계선. 어로한계선을 따라 3t급 소형 어선 142척이 일렬로 대기했다. 해경의 ‘조업 점호’를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15번 수일호”(해경) “수일호, 3명”(어민) “양지했습니다”(해경) “21번 송명호” “네, 21번 송명호, 2명” “양지했습니다”…. 어업지도선 선장은 “통신 점호는 올해 처음”이라고 했다. “그동안은 시각 점호였지요. 경비정 앞으로 어선이 하나씩 통과하며 눈으로 확인하느라 시간도 오래 걸리고 번거로웠죠.”

◇문어 낚시잡이 vs. 통발잡이

오전 7시, 출발 신호를 기다리던 어선들이 쏜살같이 저도어장으로 올라갔다. 어민들은 오랜 경험을 통해 터득한 자신만의 포인트에 배를 세우고 서둘러 문어 낚시를 준비했다.

대진항에서 만난 신세계백화점 해산물 담당 바이어 강영남 신선식품팀 과장은 “우리 백화점에서 저도 문어를 파는 건 낚시로 잡기 때문”이라고 했다. “낚시로 잡은 문어는 통발로 잡은 문어보다 스트레스를 훨씬 덜 받습니다. 통발은 보통 설치한 뒤 며칠 있다가 건져 올리는데, 그 사이 갇힌 문어가 먹이 활동을 못 하고, 심할 경우 서로 잡아먹기도 해요.”

저도어장에 도착하기 무섭게 어부들이 커다란 문어를 낚아 올리기 시작했다./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미끼로는 문어가 좋아하는 소금에 절인 돼지 비계나 가짜 바닷가재를 사용한다. 낚싯줄 반대쪽 끝에 달린 부표가 찌 역할을 한다. 부표가 한쪽으로 기울거나 바닷물에 잠기면 문어가 미끼를 물었다는 신호. 이걸 보고 어민들은 낚싯줄을 감아 문어를 끌어 올린다.

저도어장에서 잡히는 문어는 선홍빛이라 ‘피문어’, 크다고 ‘대문어’, 최고의 문어라고 ‘참문어’ 등으로 불린다. 강 바이어는 “저도어장이 워낙 문어로 유명해 유통 업계에서는 ‘저도문어’로 통칭하기도 한다”고 했다. 태어나 1년 차까지는 1㎏ 내외지만 2~3년 차부터 급성장해 약 10㎏에 이른다. 4년 차에 이르면 서식지 환경과 수온에 따라 30~50㎏까지 커진다.

남해와 제주도에서 잡히는 문어도 ‘참문어’라 불려 혼란이 생긴다. 이 지역들 문어는 몸무게가 최대 5㎏ 정도인 소형종으로, 표준명은 ‘왜문어’다. 따뜻한 바닷물에서 사는 난류성 문어. ‘돌문어’라고도 하는데, 돌 바닥에 살아서라는 설과 조금만 오래 삶아도 금방 질겨져서라는 설이 있다.

◇작을수록 비싸지는 문어의 역설

“문어 올라온다!” 조업을 시작한 지 10여 분 지났을까, 기쁨에 찬 탄성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어민들은 어느 정도 문어를 잡았다 싶으면 서둘러 대진항으로 돌아갔다. 위판장에서 경매에 부치기 위해서였다.

대진항 위판장에서는 5㎏ 이하는 소문어, 5~15㎏이면 중문어, 15~25㎏은 대문어로 구분해 가격이 매겨졌다. 작을수록 비싸다. 그날그날 시세가 다르지만 소문어는 1kg당 2만7000원, 중문어는 2만5000원, 대문어는 2만2000원에 거래된다. 강 바이어는 “일반 가정에서 소문어를 선호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큰 문어가 맛이 더 깊다지만, 육질은 작은 문어가 야들야들 연하죠. 제사상이나 폐백에 올릴 때도 온전한 한 마리를 선호합니다. 아무래도 통으로 올려야 더 보기 좋으니까요. 문어는 바닷물을 많이 머금고 있는데요, 특히 다리 한가운데 ‘심’ 부분에 많아요. 큰 문어일수록 심이 크고 바닷물이 많아서 짜고, 작은 문어가 상대적으로 덜 짜지요. 백화점에서는 1~3㎏짜리 문어를 수매하고 있습니다.”

문어는 암컷이 수컷보다 살이 연해 인기지만, 외형상 별 차이가 없어 구분이 쉽지 않다. 어류 전문가 김지민씨가 ‘생선 바이블’에 밝힌 바에 따르면, 다리 8개 중에서 왼쪽 두 번째 다리 끝부분이 빨판이면 암컷이고 빨판 없이 뭉툭하면 수컷이다.

대진항 위판장에서 경매되자마자 삶아진 문어./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위판장 바로 옆에는 문어를 전문적으로 삶아주는 가게가 있었다. 산 문어를 택배로 받아 어설프게 직접 삶기보다 미리 익혀 숙성한 자숙 문어를 구입하는 게 낫다. 문어를 제대로 익히려면 노하우와 순간 판단력이 필요하다. 문어는 체내 수분이 많아 데친 뒤에도 자체 열로 인해 더 익는다. 스테이크로 치면 ‘미디엄’이라야 적당한데 자칫 ‘웰던’으로 너무 익어 질겨질 수 있다는 뜻이다. 찬물에 재빨리 담가 식히거나, 조금 덜 삶은 상태로 건져내 잔열로 마저 익힌다. 문어는 삶은 뒤 얇게 썰어 숙회로 즐기는 등 대개 날로 먹지 않기 때문에 굳이 생물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

게다가 문어는 숙성해야 더 맛있다. 삶아서 바로 먹었을 때는 부드럽고 촉촉하기만 하지만, 숙성시키면 물이 빠지면서 육질이 한층 쫄깃해지며 더 깊고 미묘한 감칠맛을 품게 된다. 막 삶은 문어가 잘 버무린 겉절이라면, 숙성시킨 문어 숙회는 제대로 익은 김장 김치랄까. 전문가들은 “자숙 문어는 진공 포장 등 산소 접촉을 최소화해 하루 이틀 냉장 숙성하라”고 권한다. 냉장 보관은 6일, 냉동 보관은 6개월 정도 가능하다. 찬 상태 그대로 먹는 편이 더 맛있지만, 따듯한 문어를 원한다면 3분 정도 찐다.

◇경북 내륙에서 문어가 사랑받는 이유

저도 문어 상당량은 경북 안동과 영주로 배송됐다. 중매인들은 “경북 내륙 지방이 문어의 주요 소비처”라고 했다. 경상도에서 문어는 전라도 홍어에 버금가는 위상을 가졌다. 안동 사람들은 “문어는 경조사에서 무조건 써야 하는 음식으로, 결혼식이나 초상집에서 ‘잘 치렀다’는 기준이 바로 문어”라고 입을 모은다.

문어는 다른 해산물처럼 쉽게 상하지 않는다. 조선시대 보부상들은 문어를 찐 다음 등짐으로 동해안 항구에서 태백산맥을 넘어 안동과 영주로 가져다 팔았다. 험한 산들을 넘는 데 성공한 문어는 그 이름 덕분에 더 인기를 끌었다. 안동과 영주는 선비 문화가 깊이 뿌리내린 지역. 문어에는 선비들이 숭상하던 ‘문(文)’이란 글자가 들어 있다. 검은 먹물까지 품었다. 문어가 시행착오를 학습해 미로나 페트병에서 탈출할 수 있을 정도로 높은 지능을 가졌음이 밝혀지고 있으니, 문어 명명자의 통찰력이 대단하다.

문어가 인기를 얻자 온갖 의미와 상징성이 부여됐다. ‘문어 빨판은 과거에 철컥 붙으라는 의미다’ ‘문어 다리가 여덟인 것은 부계·모계·처가·진외가·외외가 등 팔족(八族)을 상징한다’ ‘깊은 바다의 바위틈에 몸을 낮춰 사는 것은 선비의 표상이다’…. ‘뼈대 없는 집안 자손인 문어는 뼈 있는 멸치에게 절해야 한다’는 농담도 있다.

이날 대진항 위판장에서 거래된 문어는 총 5000㎏. 경매를 마치고 돈을 손에 쥔 어부들은 기뻐하면서도 “지구온난화로 바다 수온이 올라서인지 어획량이 예전만 못하다”며 아쉬워했다. 이 과장은 “평년 저도어장 개방 첫날 평균 어획량 수준”이라고 했다. 자신의 처지를 아는지 수조 속 문어는 체념한 듯 다리를 꿈틀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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