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칼이 주방에서 추방되는 까닭은?

이미지 기자 2024. 4. 20.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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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요리도 설거지도 귀찮아… 조리하지 않는 사람들

100만년 전, 불의 발견은 인류 문명을 바꾼 혁명이었다. 하지만 최근 한국 사회는 다른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다. 주방에서 불이 쫓겨나고 있는 것이다. 가스 공사 비용을 절감할 수 있고, 불꽃이 불완전 연소하며 생기는 일산화탄소가 건강에 좋지 않다는 거창한 이유 때문은 아니다. 불을 피우는 대신 전기를 이용한 인덕션과 오븐, 대류열을 이용한 에어프라이기가 주방의 필수 가전으로 자리 잡은 것은 물론, 이마저도 없어 조리 기능을 거세한 주방도 늘고 있다.

불뿐만이 아니다. 칼을 비롯한 조리도구 역시 주방에서 퇴출되고 있다. 설거지가 귀찮아서, 집에 음식 냄새 배는 게 싫어서 요리 자체를 하지 않는 것이다. 귀찮음에 밀려 가스와 조리도구, 주방이 기능을 잃은 시대. 가스 회사와 식자재 회사는 다양한 생존법을 모색하고 있다.

그래픽=송윤혜

◇주방에서 쫓겨난 ‘불’

“고객님, 도시가스 검침원입니다. 이달 검침을 했는데 6개월간 사용량이 하나도 없어서요. 혹시 비어 있나요?” 경기도 김포에 사는 김성환씨는 최근 가스검침원에게 이런 문자 한 통을 받았다. 그가 이사를 간 이후, 가스 사용량이 0으로 찍히자 사람이 살고 있는지 확인한 것이었다. 온수와 난방을 지역 난방으로 사용하는 김씨 집에서는 요리를 하지 않으면 가스를 사용할 일이 없다. 그는 “평일엔 대부분 밖에서 밥을 먹고 들어오고, 주말엔 배달 음식을 시켜 먹기 때문에 가스 불을 켤 일이 없다”고 말했다.

불 없는 주방은 1인 가구를 중심으로 늘어난다. 1인 가구의 가장 큰 단점은 요리하는 사람도, 뒷정리하는 사람도, 설거지하는 사람도 모두 자신이라는 것. 요리마저 노동이 돼버린 1인 가구들은 주방에서 불을 퇴출한다.

무용지물이 된 도시가스를 없애버리겠다고 나섰다가 무용담을 얻기도 한다. 작년 11월, 평소 배달 음식만 시켜 먹어서 도시가스가 필요 없다는 이유로 오피스텔의 도시가스 호스를 절단한 20대가 경찰에 붙잡혔다. 모두 잠들어 있을 새벽 2시, 28가구 규모의 오피스텔 내부에 가스가 차면서 위험천만한 상황이었다. 경찰은 이 무모한 20대에게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불이 쫓겨난 건 1인 가구의 주방만이 아니다. 가스레인지 대신 전기를 이용하는 인덕션을 설치하는 가정이 늘고, 요즘에는 식당에서도 인덕션을 많이 사용한다. 롯데하이마트에 따르면 2019년만 해도 주방 조리 가전(가스레인지·전자레인지·인덕션) 전체 매출의 35%를 차지했던 가스레인지의 비율은 2024년(1~4월 14일 기준) 20%로 줄었고, 인덕션은 22%에서 35%로 증가했다. 같은 기간 전자레인지 매출 비율은 43%에서 45%로 소폭 늘었다.

불이 사라진 주방, 음식 맛엔 변화가 없을까? 중식 전문가 여경옥 셰프는 “고기를 직화로 굽는 바비큐에서는 불꽃이 직접 닿느냐에 따라 음식 맛이 다를 수 있지만 사실 중식에서는 가스 불이냐, 인덕션이냐의 차이가 크지 않다”며 “프라이팬에 있는 뜨거운 기름으로 조리하는 중식에서는 고온을 유지하는 고출력 인덕션에서도 충분히 같은 맛을 낼 수 있다”고 말했다. 다만, 인덕션의 경우 팬을 공중에 띄울 경우 열이 닿지 않아 온도가 낮아지므로 가스 불처럼 팬을 위아래로 들었다 놓을 수는 없다.

◇'칼’도 퇴출당하고 있다

신촌 근처에서 자취하는 회사원 이지연씨는 집에 가스레인지나 인덕션은 물론, 전자레인지도 없다. 냄비나 칼, 도마 같은 최소한의 조리도구도 갖고 있지 않다. 이씨는 “대부분 외식으로 해결하고, 컵라면이 먹고 싶으면 오피스텔 1층 편의점에서 물을 받아 온다”고 말했다. 과일은 깎아놓은 것을 사면 그만이고, 전국 5만5000여 편의점이 간단한 조리를 대신하는 공유 주방이 된다.

국내 1인 가구는 올해 3월 처음으로 1000만을 넘어 섰다. 1년 전(981만7789가구)에 비해 20만3624가구 늘었다. 우리나라 5가구 중 2가구가 혼자 살고 있다. 요리와 설거지를 거부하는 젊은 층의 증가는 식자재 업체들을 위기에 빠뜨렸다. 도마와 칼을 써서 재료를 다지거나, 병 안에 든 소스를 숟가락으로 퍼내 그릇에 담는 것도 ‘설거지’라 생각하는 젊은 층이 칼과 도마 같은 조리도구도 주방에서 퇴출시켰기 때문이다.

1인 가구를 겨냥해 소용량 제품을 내놓아 봐도 요리와 설거지를 거부하면 소용이 없는 법. 식자재 업체들은 도구를 쓰지 않고도 사용할 수 있도록 고추장, 쌈장 같은 장류는 물론 다진 마늘이나 잼, 버터도 ‘튜브’ 속에 넣고 있다.

다진 마늘과 생강, 버터를 넘어 젓갈까지 튜브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 사진은 한성기업이 올해 상반기 내놓을 예정인 짜먹는 명란젓. /한성기업

60년 이상의 업력을 가진 식자재 업체 한성기업은 이 회사 역사상 처음으로 튜브에 넣은 젓갈을 개발했다. 젓갈을 따로 손질하고, 양념해 통에 담아 보관하는 방식을 귀찮아하는 소비자를 공략하기 위한 것이다. 올해 상반기 안에 기본 명란젓부터 와사비·크림치즈·치폴레 소스를 더한 명란 제품을 내놓아 젊은 입맛을 공략한다는 계획이다. 정승인 한성기업 사장은 “덮밥이나 베이글, 파스타 등에 간편하게 명란젓을 추가해 먹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개발한 것”이라며 “다른 젓갈류도 튜브형으로 출시할 예정”이라고 했다.

‘편의성’을 내세운 제품은 꾸준히 인기를 얻고 있다. 조리도구를 꺼내지 않고도 라면에 마늘을 추가하거나, 배달 시킨 음식에 소스를 곁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마트에 따르면 올해 1~3월 튜브형 마늘·생강·쌈장·잼 등 대표 상품 8종의 매출 신장률은 전년 대비 17.6% 증가했다.

◇가스회사는 아예 외식 사업으로

도시 가스 기업들은 외식업 등으로 사업을 확장하고 있다. 사진은 국내 최대 도시가스 업체인 삼천리가 운영하는 중식당 차이797. /삼천리

도시가스 업체들도 비상이긴 마찬가지. 가스레인지가 인덕션 등으로 빠르게 대체되면서 주요 수입원이었던 도시 가스 판매가 줄고 있기 때문이다. 작년 수도권 7대 도시가스 업체들의 주택용 가스 판매량은 총 53억3545만㎥로 전년 대비 10.2% 감소했다.

집에서 식사하는 사람이 줄면서 가스 회사의 밥줄마저 끊길 위기에 놓이자, 가스 회사들은 새로운 수익 사업을 찾아내고 있다.

국내 최대 도시가스 기업인 삼천리는 요식업에 진출했다. 집에서 요리하는 사람이 줄어드는 만큼 외식 수요가 늘어날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이다. 현재 삼천리는 중식당 차이797과 호우섬, 한식당인 바른고기정육점과 서리재 등을 운영하고 있다. 삼천리 측은 “가정에서 가스를 사용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가스를 사용해 만든 음식을 판매하면 된다는 생각”이라고 설명했다. 보일러 사업과 도시가스 사업을 하는 귀뚜라미그룹도 닥터로빈이라는 이탈리안 레스토랑을 운영하고 있다. 작년 하반기에는 온라인 쇼핑몰을 열고 이탈리안 메뉴로 구성된 밀키트와 기념품 등을 판매하기 시작했다. 다른 도시가스 업체들도 육가공 사업이나 문화사업 등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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