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받기 힘든 세상… 신종 변태가 나타났다

김동식 소설가 2024. 4. 20.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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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김동식의 기이한 이야기]
“미안합니다” 듣고 싶다면
의도적인 상황을 연출하라

주변에서 뭐라든, 그녀와 저는 천생연분입니다. 다만 어디 가서 자랑스레 떠벌릴 수는 없는 내용인지라, 익명의 힘을 빌려 이렇게 고백하고자 합니다.

저는 아주 가끔, 이상한 행동을 하곤 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쉽게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예를 들면, 일부러 지하철 노약자석에 앉습니다. 새파랗게 젊은 제가 거기 앉아 있으면, 반드시 한 명은 꼭 나타나서 한소리를 합니다. “노약자석에 왜 젊은 사람이 앉아 있어!”

그럼 저는 어정쩡하게 일어나며 무릎 위에 덮어 두었던 겉옷을 들어 올립니다. 깁스한 다리를 보여주면서 발을 절뚝이는 거죠. 그런 제 모습을 본 상대방은 무척 당황스러워합니다. “아휴, 다리가 불편한 줄은 몰랐네…. 미안해요.”

여기서 저는 희열을 느끼는 겁니다. 변태인가 봅니다. 사람들이 맘대로 오해해 화를 냈다가 곧 민망해하며 사과하는 그 모습이 너무도 짜릿합니다. 사과받기 좀처럼 어려운 세상 아닙니까. 제 성향을 처음 알게 된 건 몇 년 전. 자전거를 타고 근처 만둣집에서 만두를 사온 저는 집 엘리베이터에서 별 생각 없이 봉지 속 만두 하나를 집어 먹었습니다. 그런데 같이 타고 있던 아저씨가 갑자기 호통을 치는 겁니다. “이 양반아, 배달 음식을 빼먹으면 안 되지!”

저는 정말 깜짝 놀랐지만, 자전거 모자와 장갑까지 낀 제 복장이 배달원처럼 보일 수 있겠다 싶어 모자를 벗었습니다. “저 여기 304호 주민인데요?” 그 순간 아저씨의 두 눈이 휘둥그레 커지더군요. “얼마 전에 배달원들이 음식 빼먹는다는 뉴스를 봐서…. 미안하게 됐수다.” 붉어지는 그 아저씨의 정수리를 바라보며, 저는 느낀 겁니다. 쾌감을 말입니다.

일러스트=한상엽

며칠 뒤 저는 형 집에서 오토바이 헬멧을 하나 얻어왔고, 배달원이 입을 법한 조끼까지 사 입었습니다. 그러고는 포장해온 음식을 일부러 사람들 앞에서 빼먹기 시작했습니다. 세 번 정도 그렇게 엘리베이터를 탔더니 한 사람이 또 그러더군요. “아저씨, 그거 먹으면 안 되는 거 아니에요?”

저는 일부러 못 알아듣는 척하면서 좀 더 격한 분노를 유도했습니다. 상대의 막말이 격해지자, 저는 헬멧을 벗고 이어폰을 뺐습니다. “저 배달 온 게 아니라, 여기 사는 사람인데요?” 또 한번 저는 전율을 느꼈습니다. 혹시 몰라 제가 현관문을 여는 것까지 지켜보던 상대의 난감한 표정이란. 어찌나 좋던지요! 그날부터 저는 이 행위에 중독됐습니다. 점점 다양한 상황을 연출했습니다.

여자 가방을 하나 샀습니다. 이 가방의 용도는, 카페에서 다른 테이블 빈 의자에 놓아뒀다가 타이밍을 봐서 조용히 들고 나가기 위함입니다. 그러면 가끔 누가 쫓아와 저를 도둑으로 몰 때가 있는데, 그때 아니란 걸 증명하면 무척 짜릿합니다. 덕분에 제 삶의 질은 크게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이놈의 국민성이 말입니다, 오해였단 걸 알게 됐을 때 사과하는 대신 오히려 역정을 내는 인간들이 문제란 말입니다.

“다리 깁스했는데 뭐, 어쩌라고!” 심한 경우 설교까지 늘어놓기도 하죠. 제가 카페에서 들고 나온 가방이 제 것이라는 걸 증명했을 때 들었던 말처럼요. “충분히 오해할 만한 상황이잖아요? 진짜였어 봐, 오히려 나 같은 사람들이 있어서 다행인 거지. 그리고 그쪽도 참, 돈이 없는 건지 취향이 이상한 건지 몰라도 그런 가방은 좀 주의하세요. 남자가 왜 여자 가방을 들고 다니고 난리야?”

이날은 저도 욱해서 언성을 높였는데, 그녀는 제가 살면서 본 사람 중에 가장 화를 잘 내는 인간이었습니다. 제가 무슨 말도 못 하게 우다다다 쏟아내는데, 이길 도리가 없더군요. 질려서 먼저 피해 버렸는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며칠 뒤 제 은밀한 취미의 정체를 그녀에게 들켜 버린 겁니다. “그때 그 아저씨네? 이상한 짓거리를 하네? 발도 멀쩡하면서?”

그녀는 제 행위의 본질을 꿰뚫었습니다. 온몸에 식은땀이 났죠. 동네방네 소리를 질러대는 통에 도망쳤지만, 그녀는 쫓아왔고, 저는 저자세로 빌었습니다. 그럴수록 그녀는 더 강하게 저를 몰아붙였습니다. “당신 같은 작자들 때문에 MZ 세대가 싸잡아 욕 먹는 거라고! 사회에 하등 도움 안 되는 인간 말종 같은 짓이나 하고 말이야!” 잠시 후 저는 더 놀라 버렸습니다. 폭풍처럼 욕을 쏟아내더니만, 곧 다른 사람으로 돌변해 사과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죄송해요…. 아까는 제가 말이 심했죠?”

어쩌다 보니 그녀와 카페에서 잠시 대화를 나누게 됐고, 그녀도 저와 비슷한 부류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 예전에, 극도의 스트레스로 고통받던 어느 시기에, 백화점을 찾아가 일부러 하자 있는 물건을 골라 구매했다고 합니다. 그러고는 며칠 뒤 “그 물건을 선물했다가 내가 얼마나 곤란해졌는지 아느냐”며 화를 쏟아냈는데 그게 그렇게 후련하더랍니다. 한 번도 경험해본 적 없는 상황에서 크나큰 희열을 느꼈던 겁니다. 저처럼 말이죠.

이것이 저희가 천생연분인 이유입니다. 제 은밀한 작전이 실패했을 때, 그러니까 곤란한 상황에서 사과는커녕 역으로 ‘버럭’ 하는 사람이 나타날 때, 그때가 그녀에게는 완벽한 찬스인 겁니다. 따로 데이트 코스를 고민할 필요가 없다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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