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론으로 내려다보듯 입체적 작전, 백전불패 신화 이뤄
윤동한의 ‘충무공 경영학’ ④
흔히 이순신 장군의 승리를 23전 23승이라고 말하지만, 정확한 표현은 아니다. 학자마다 다르고 어떻게 헤아리는가에 따라 주장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제장명 교수(순천향대 이순신연구소장)는 “임진왜란 시기 해전 횟수는 총 47회이며, 이중 이순신이 참가한 해전은 43회”라고 밝히고 있다. 어쨌거나 이 43회 전투에서 이순신은 패전이 한 번도 없었다. 이 점이 놀라운 것이다.
임진왜란 전체를 볼 때 이순신이 참여한 전투 중 조선·명나라·일본 삼국 전황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해전은 순서상으로 한산해전, 명량해전, 그리고 노량해전이다. 노량해전은 다음에 다루기로 했으니 한산해전과 명량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이 보여준 전투 경영 능력의 공통점이 무엇인지 찾아보자. 학자마다 분석이 다르지만, 필자는 전투현장과 주변 환경을 바라보는 장군의 경영적 시각에 승전의 가장 큰 요인이 담겨있다고 본다. 이름하여 ‘bird’s-eye view(조감도·하늘에서 내려다보는 전경) 전략’이다.
이순신 장군은 수륙을 통괄해 전황을 살필 수 있는 예리한 시각을 가진 리더였다. 그것도 평면적이 아니라 조감도적인 아주 특별한 시각을 가졌다. 조감도(鳥瞰圖) 경영전략은 한 마디로 입체적 전략전술이다. 하늘을 나는 새가 땅을 내려다보는 것처럼 입체적인 조망과 분석 대비가 가능한 것이 승리 요인의 하나라는 것이다. bird’s-eye view는 주로 건축·미술·항공우주 분야 등에 쓰는 단어지만 한 차원 높은 곳에서 무언가를 찾아내고 바라본다는 비유로도 쓰인다.
[한산대첩] 새의 눈으로 적 움직임 꿰뚫어
이순신은 늘 당면한 문제를 눈앞에서 즉시 해결하려 하기보다 더 새롭고 더 높은 차원에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식을 갖고 있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육지에선 파죽지세로 일본군이 승리하며 올라왔지만 해전에선 달랐다. 조선 수군은 1592년 5월 7일 옥포해전에서의 승리를 시작으로 그해 6월 7일 율포해전까지 모두 일곱 차례 해전에서 일본수군에 완승을 거두었다. 이에 일본 수군은 전선 73척을 동원해 조선 수군과의 결전을 시도했다.
그 사이 이순신의 전라좌수군은 이억기가 이끄는 전라우수군과 7월 4일 좌수영에서 합류하고 남해의 노량에서 경상우수사 원균의 전선 7척과 합류한다. 경상도 전라도의 합동 함대가 결성된 것이다. 조선 함대의 전선은 총 58척이었는데, 이중 거북선 2척도 참전했다. 7월 7일 동풍으로 항해하지 못하다가 날이 저물 무렵 당포에 이르렀다. 그때 미륵도의 목동 김천손이 ‘일본군선 70여 척이 오후 2시쯤 영등포 앞바다를 지나 견내량에 머물고 있다’는 정보를 알려주었다. 전쟁은 곧 정보전이다. 이순신의 연합함대는 7월 8일 아침 일찍 일본함대가 있다는 곳으로 출발해 견내량 근처 바다에 이르러 일본의 척후선을 발견했다. 이들을 추격하자 과연 대소 73척의 함대가 대열을 이루고 있었다. 견내량은 경남 통영시 용남면과 거제시 사등면 사이에 있는 좁은 해협이다.
학익진은 육전에서는 심심찮게 사용되었는데 이순신이 수군에 적용해 승전을 이끌어낸 것이다. 거북선이 앞장서고 여러 총통을 발사, 선봉에 선 2~3척을 격파하자 일본 수군은 주춤 물러나려 했다. 조선 수군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일시에 포위 공격하여 격멸했다. 이 전투에서 일본의 대선 35척, 중선 17척, 소선 7척 등 59척이 격침 또는 나포됐고 나머지 14척 만이 겨우 돌아갔다. 이 해전에서 일본 수군은 전선과 병사 모두 심각한 피해를 입은 반면 조선 수군은 단 1척도 잃지 않았다. 완승이었다. 이후 일본 수군은 포구에 깊숙이 박혀 외해로 나오지 않는 전략을 구사했다. 나아가 서해로 진출하려던 일본의 야욕이 꺾이며 북진 전략과 명나라 침공의 꿈 자체가 실패로 돌아갔다.
한산 전투는 실전에 앞서 섬과 육지를 연결하고 물때와 조류를 입체적으로 이해하는 능력이 이순신에게 있었기에 가능했다. 왜군을 추격하되 무조건 죽이고 이기는 것이 아니라 육지로 올라간 적이 어떻게 움직일지를 예측하고 그들의 동선을 수륙 양면에서 고려했다. 함상의 장수로서 이 전투 상황을 드론의 카메라처럼 내려다보듯 살필 수 있었던 것 자체가 경이롭다. 물론 여기에는 당시 지도가 요긴하게 쓰였을 것이다. 난중일기 1595년 8월 25일 기록을 보면 이미 이순신은 지도를 보고 적정을 살피는 데 익숙했다.
“25일 맑았다. 일찍 식사를 한 뒤, 체찰(이원익)과 부사(부체찰사 김륵), 종사관(남이공)이 함께 내가 탄 배에 탔다. 아침 8시에 배를 띄우고 같이 탔다. 함께 서서 크고 작은 섬과 진(鎭)이 설치된 곳, 진을 합칠 곳, 맞붙어 싸웠던 곳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내내 논의하며 이야기했다. 곡포는 평산포로 합치고, 상주포는 미조항으로 합치고, 적량은 삼천으로 합치고...(생략)”
[명량대첩] 바둑 포석처럼 맥점 장악해 완승
1597년 9월 16일 이른 아침에 망군이 보고하기를 ‘수없이 많은 적선이 명량을 거쳐 곧바로 진격해 온다’고 했다. 이에 이순신은 여러 장수들을 불러 군령을 하달한 후 정박해 있던 배들을 이끌고 바다로 나갔다. 이순신은 배설이 남긴 12척을 포함해 13척의 전선으로 울돌목에서 일본 수군을 기다렸다.
명량해협의 폭은 가장 좁은 부분이 293m, 사리(大潮) 때의 유속이 11.5노트, 수심은 19m다. 이 점을 사전에 파악해 둔 이가 바로 이순신이다. 그는 1597년 9월 16일 어란포(於蘭浦)를 출발한 왜선 133척을 맞아 단 13척의 전선으로 목숨을 건 전투를 벌여야 했다. 이날 전투에서 이순신은 30여 척의 왜선을 불사르고 적의 함대를 물러나게 한 기적의 승전을 거두었다.
당시 조선 수군의 세력은 전선 13척에 초탐선 32척 정도. 후방에 교란작전으로 피난선 100여 척을 배치한 것이 신묘한 계책이었다. 이순신은 13척의 전선 중 12척을 명량해협을 가로질러 세워놓고 자신은 맨 앞에 나서 적의 공포를 자극했다. 최선봉에 선 이순신은 솔선수범 목숨을 건 전투를 하며 130여 척의 일본 수군과 맞붙었던 것이다.
전투가 치열해진 상황에서 일본군 장수 한 명이 바다에 빠졌다. 그를 건져 올려 효수하여 적에게 들이밀자 일본 수군의 기세가 크게 꺾였다. 마침내 오후 1시 30분경에는 조류가 남동류로 바뀌면서 조류가 최강류로 흘렀다. 북풍도 강하게 불어와 조선 수군에 한층 유리하게 전개됐고 마침내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조선 수군의 전선은 1척도 침몰되지 않은 완승이었다.
명량 앞바다의 승전으로 정유재란을 일으킨 왜군이 한강유역으로 침입하는 길목을 차단했고, 해전의 기세를 꺾어 전쟁을 유리한 국면으로 전환하게 만들었다. 이순신은 전쟁의 판세를 읽는 눈을 갖고 있어 불리한 전세 속에서도 지형과 물길을 이용해 남해 제해권을 다시 장악할 수 있었다. 그는 무릇 전쟁의 승리는 치열한 준비 여하에 달려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이순신은 전투현장을 설계하면서 경영학에서 개념설계를 하듯, 바둑판에서 포석하듯 적과의 전투에서 유리한 국면을 끌어내기 위해 섬과 육지의 지형을 숙지하고 아군을 어떻게 배치하며 화력을 어느 쪽으로 집중할 것인가를 결정했다. 정탐을 세워 적정을 파악하고 물길과 바람을 이용, 적을 몰아붙이며 진격과 후퇴를 적시에 지시하고 자신은 최전방에서 적을 밀어내는 용감한 리더십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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