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보물만 26건 기증한 선친, 통일되면 북에 박물관 꿈”

2024. 4. 20. 0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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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문종합영어 저자, 혜전 송성문
혜전 송성문이 기증한 『기사기해계첩』(조선 1719년, 국보).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국박) 동관 2층의 기증관이 2년간 전면 개편 작업을 거쳐 올해 초 새롭게 문을 열었다. 예술적으로 디자인된 의자에 앉아 휴식을 하면서 벽장에 진열된 기증 유물들과 맞은편 거대한 디스플레이에 상영되는 기증자들의 이야기를 차분히 바라볼 수 있는 공간이다. 얼마전 이 곳을 둘러보다 익숙한 이름과 마주쳤다. 혜전 송성문(1931~2011), 혹시 그 유명한 ‘국민참고서’의 저자? 박물관 관계자에게 확인해보니 1970~90년대를 풍미한 대입용 영어 참고서 『성문종합영어』의 저자와 동일 인물이었다. 그가 국보 4건과 보물 22건을 포함, 무려 46건 101점의 문화재를 국박에 기증했다는 설명이 뒤따랐다. 송성문 컬렉션은 고서(古書)와 회화 작품이 주종을 이뤘다.

“고서 거풍할 때마다 와서 보라고 하셨죠”

『대보적경』(고려 11세기, 국보).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사실 아버지는 통일이 되면 고향인 평안북도 정주에 박물관을 세우겠다는 꿈을 갖고 계셨어요. 그래서 고서뿐만 아니라 도자기 등 여러 유물을 수집하셨습니다. 하지만 (생전에 통일이 될) 가능성이 희박해지고 2003년 간암 선고를 받으시면서 그해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을 하시게 된 것이지요.” 수소문끝에 연락이 닿은 장남 송철(65)씨의 말이다.

“아버지는 어떤 의무감 같을 것을 갖고 계셨어요. ‘태어나서 좋은 일 하나는 해야 한다. 내가 돈 벌어서 뭐 하겠니’ 이런 말씀을 많이 하셨어요. 그리고 (수집하신 것들을) 다 사회로 돌려보낼 것이라면서 ‘너희들이 철 들면 알아듣겠지’ 하고 설명하시곤 했어요. 오히려 우리 삼남매는 뭘 굳이 설명하시나 의아해했죠. 기증하실 때에도 형제들은 아무런 반대를 하지 않았습니다.”

송철
송씨는 아버지가 가끔 보자기에 싸서 보관해 두었던 고서를 때마다 꺼내 바람을 쐬게 하는 거풍을 하는 것을 지켜보던 기억이 있다. “아버지가 이리 와서 보라고 하는데 아이들이 고서 같은 걸 아나요. 그냥 시큰둥해 했는데 ‘나중에 네가 관리해야 되니 봐 둬라’고 하셨지요. 유독 『기사기해계첩』은 재미있었습니다. 요즘 사람이 그린 것처럼 생생해서 놀라웠죠.” 그는 말했다. 『기사기해계첩』은 국박에 기증된 국보 중 하나로, 1719년 기해년에 숙종이 59세가 되어 기로소(연로한 고위 관료의 친목과 예우를 위한 기구)에 들어간 것을 기념하여 제작한 화첩이다. 참석한 70세 이상의 퇴직 관리들의 초상화와 기념행사를 묘사한 그림들로 이루어진 화첩이다. 송씨는 “하지만 아버지가 수집품들에 대해 자상하게 설명해주는 편은 아니었다”고 덧붙였다. “이북 사람들이 그런 게 아닌가 해요. 말씀이 많지 않으시고 희로애락을 별로 표현을 안 하시는 타입이었어요. 이북에서 월남을 하고 그러면서 생사 고비를 많이 넘기고 하셔서 그런 것 같아요.”

혜전 송성문은 평북 정주 출신으로 중등학교를 우등 졸업한 후 당시 38선 이북의 최고 대학인 김일성대 영문과를 꿈꾸었다. 그러나 출신성분 때문에 탈락하고 2년제 신의주교원대에 들어갔다. 6·25전쟁이 일어나고 그해 11월 미군이 신의주에 진주했다. 그는 미군 앞에서 중학 영어교과서를 읽다가 통역으로 발탁되었다. 그러나 미군이 1·4 후퇴 때 평양에 그를 남겨놓고 퇴각했고 그는 갖은 고생을 하며 홀로 월남해 부산까지 내려갔다. 52년에 입대해 통역장교로 활약했다.

평소 나서기 꺼려 기증도 대리인 통해

수석과 함께 한 생전의 혜전. [사진 송철 제공]
그후 부산 동아대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한 혜전은 부산고와 마산고에서 교사로 재직했다. 영어를 잘 가르친다는 소문이 자자하게 퍼졌다. 서울에서 출판사 대표가 찾아와 계약금 200만원과 1년 기한을 주며 영어 교재를 써 달라고 했다. 당시 200만원은 집 한 채 값이었다. 이렇게 해서 1967년에 탄생한 『정통종합영어』가 대박을 쳤고 후에 『성문종합영어』가 되었다. 그 뒤 서울에 올라와 서울고에서 교사 생활을 잠깐 하다가 종로 경복학원에서 강사로 일했다. 요즘으로 치면 전국적으로 소문난 ‘일타 강사’였다. 1976년 자신의 출판사인 성문출판사를 만들어 『성문종합영어』를 비롯한 성문 시리즈를 냈다. 『성문종합영어』는 2011년까지 1000만 부가 넘게 팔렸다고 한다. 1990년대에 대입 시험 제도가 바뀌고 경쟁 참고서가 늘어나면서 판매량이 급감했지만, 지금도 여전히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성문종합영어』 표지. [사진 송철 제공]
혜전은 학원 강사와 교재 출판으로 벌어들인 막대한 돈을 문화재 구입과 수석 취미에 썼다. 그렇게 수집한 11세기 고려시대 대승불교 경전 『대보적경』을 비롯한 국보 4건과 보물 22건, 운보 김기창의 그림 ‘동해일출도’ 등 총 46건 101점을 2003년 3월에 국박에 기증했다. 그 공로로 그해 6월에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다.

이런 사실이 널리 알려지지 않은 건 그가 기증 사실을 드러내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2003년에 기증 의사를 밝힐 때에도 직접 박물관에 나타나지 않고 대리인을 보냈다. 대리인은 바로 혜전의 고서 수집을 도운 고인쇄 전문가였다. 당시 국박 전시과장으로서 기증 업무를 담당했던 장상훈 현 국립진주박물관장은 이렇게 회고했다. “(국박을 찾아온 대리인인) 노신사의 손에는 국보 4건, 보물 22건 등의 물목이 빼곡히 적혀 있는 기증희망원이 들려 있었다. 정말 놀라지 않을 수 없었고 흥분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한눈에 보기에도 우리나라 고인쇄 문화재의 정수가 고스란히 담긴 목록이었다.”

혜전은 자신의 애장품을 박물관에 기증하던 날에도,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던 날에도, 기증문화재 특별전이 열리던 날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장 관장은 “송성문 선생은 고귀한 나눔의 정신을 실천하셨고, 그럼에도 자신의 공을 결코 드러내지 않는 겸손의 미덕을 가르쳐 주셨다”라고 평했다. 아들 송씨에게도 그런 기질이 유전된 탓인지 그는 인터뷰 요청을 여러 차례 사양하고 전화로만 말문을 열었다.

혜전의 수집과 기증이 특히 빛난 것은 고서에서다. 그가 고서에 특히 관심을 가진 것에 대해서 송 전 대표는 말했다. “고서들이 자꾸 훼손되니까 더 없어지기 전에 빨리 보존해야겠다는 마음이 강하셨어요. 금속활자를 세계 최초로 발명했지만 잘 보존되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냐고 하시면서요. 저 어릴 때만 해도 이사 가면 집에 바르는 초배지를 고서를 뜯어서 사용하고 그랬어요. 안 믿기겠지만 진짜입니다. 1960년대 부산에서 살았는데, 이웃집들이 다 그러더군요. 당시에 고물상에 널린 게 옛 책들이었으니까요. 1990년대 되니까 서울 인사동의 전통 찾집이나 막걸리집들이 그걸 흉내내서 고서를 뜯어서 창틀에 붙여놓고 그랬죠.”

혜전은 별세 직전의 인터뷰에서 “그림이나 도자기는 가짜가 많지만 고서는 그리 쉽게 속일 수 없다”고 말했다. “집에 도둑이 든 적도 있지만 값싼 것만 가져가고 고서는 손도 대지 않았더군요. 못 알아봤을 겁니다”라고 했다. 혜전의 또다른 수집 대상은 수석이었다. 그는 생전에 “돌 안에 자연이 다 들어있다”며 “수석 수집이 군자(君子)의 마지막 취미”라고 했다. 별세하던 해에 책 『수석』을 출간하기도 했다. 그는 별세 1년 전인 2010년 애장하던 수석 한 점을 국박에 기증했다.

문소영 기자 symo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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