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보물만 26건 기증한 선친, 통일되면 북에 박물관 꿈”
성문종합영어 저자, 혜전 송성문
“고서 거풍할 때마다 와서 보라고 하셨죠”
“아버지는 어떤 의무감 같을 것을 갖고 계셨어요. ‘태어나서 좋은 일 하나는 해야 한다. 내가 돈 벌어서 뭐 하겠니’ 이런 말씀을 많이 하셨어요. 그리고 (수집하신 것들을) 다 사회로 돌려보낼 것이라면서 ‘너희들이 철 들면 알아듣겠지’ 하고 설명하시곤 했어요. 오히려 우리 삼남매는 뭘 굳이 설명하시나 의아해했죠. 기증하실 때에도 형제들은 아무런 반대를 하지 않았습니다.”
혜전 송성문은 평북 정주 출신으로 중등학교를 우등 졸업한 후 당시 38선 이북의 최고 대학인 김일성대 영문과를 꿈꾸었다. 그러나 출신성분 때문에 탈락하고 2년제 신의주교원대에 들어갔다. 6·25전쟁이 일어나고 그해 11월 미군이 신의주에 진주했다. 그는 미군 앞에서 중학 영어교과서를 읽다가 통역으로 발탁되었다. 그러나 미군이 1·4 후퇴 때 평양에 그를 남겨놓고 퇴각했고 그는 갖은 고생을 하며 홀로 월남해 부산까지 내려갔다. 52년에 입대해 통역장교로 활약했다.
평소 나서기 꺼려 기증도 대리인 통해
이런 사실이 널리 알려지지 않은 건 그가 기증 사실을 드러내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2003년에 기증 의사를 밝힐 때에도 직접 박물관에 나타나지 않고 대리인을 보냈다. 대리인은 바로 혜전의 고서 수집을 도운 고인쇄 전문가였다. 당시 국박 전시과장으로서 기증 업무를 담당했던 장상훈 현 국립진주박물관장은 이렇게 회고했다. “(국박을 찾아온 대리인인) 노신사의 손에는 국보 4건, 보물 22건 등의 물목이 빼곡히 적혀 있는 기증희망원이 들려 있었다. 정말 놀라지 않을 수 없었고 흥분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한눈에 보기에도 우리나라 고인쇄 문화재의 정수가 고스란히 담긴 목록이었다.”
혜전은 자신의 애장품을 박물관에 기증하던 날에도,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던 날에도, 기증문화재 특별전이 열리던 날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장 관장은 “송성문 선생은 고귀한 나눔의 정신을 실천하셨고, 그럼에도 자신의 공을 결코 드러내지 않는 겸손의 미덕을 가르쳐 주셨다”라고 평했다. 아들 송씨에게도 그런 기질이 유전된 탓인지 그는 인터뷰 요청을 여러 차례 사양하고 전화로만 말문을 열었다.
혜전의 수집과 기증이 특히 빛난 것은 고서에서다. 그가 고서에 특히 관심을 가진 것에 대해서 송 전 대표는 말했다. “고서들이 자꾸 훼손되니까 더 없어지기 전에 빨리 보존해야겠다는 마음이 강하셨어요. 금속활자를 세계 최초로 발명했지만 잘 보존되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냐고 하시면서요. 저 어릴 때만 해도 이사 가면 집에 바르는 초배지를 고서를 뜯어서 사용하고 그랬어요. 안 믿기겠지만 진짜입니다. 1960년대 부산에서 살았는데, 이웃집들이 다 그러더군요. 당시에 고물상에 널린 게 옛 책들이었으니까요. 1990년대 되니까 서울 인사동의 전통 찾집이나 막걸리집들이 그걸 흉내내서 고서를 뜯어서 창틀에 붙여놓고 그랬죠.”
혜전은 별세 직전의 인터뷰에서 “그림이나 도자기는 가짜가 많지만 고서는 그리 쉽게 속일 수 없다”고 말했다. “집에 도둑이 든 적도 있지만 값싼 것만 가져가고 고서는 손도 대지 않았더군요. 못 알아봤을 겁니다”라고 했다. 혜전의 또다른 수집 대상은 수석이었다. 그는 생전에 “돌 안에 자연이 다 들어있다”며 “수석 수집이 군자(君子)의 마지막 취미”라고 했다. 별세하던 해에 책 『수석』을 출간하기도 했다. 그는 별세 1년 전인 2010년 애장하던 수석 한 점을 국박에 기증했다.
문소영 기자 symo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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