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 영광을 위해 뛴다? 인기 얻고 연금 받으려면 모든 것 쏟으라 말해
장재근 진천국가대표선수촌장
대한민국 엘리트 스포츠의 총체적 위기다. 인구 급감으로 운동선수 풀이 크게 줄었고, ‘올림픽 금메달=국위선양’이라는 도식도 빛이 바래고 있다. 장재근 진천국가대표선수촌장은 속이 타고 마음이 급하다. 그는 “충무공의 사즉생(死卽生) 각오로 임하고 있다. 선수들의 컨디션과 경기력을 0.01%라도 올릴 수 있으면 무엇이든 하겠다는 마음”이라고 했다. 지난 18일 진천선수촌에서 장 촌장을 만났다.
Q : 메달 전망이 썩 밝지 않습니다.
A : “양궁에서 금메달 3개 정도를 보고 있습니다. 펜싱과 배드민턴, 태권도에서 한 개씩 잡으면 6개가 됩니다. 이건 마지노선이고요. 사격 여자 공기소총, 남자 체조가 다크호스입니다. 수영 황선우·김우민(이상 남자 자유형), 남자 계영 800m 중 하나에서 깜짝 금이 나오기를 기대합니다.”
Q : 현지에 사전 훈련캠프도 설치하네요.
A : “저희 선수단 규모가 170명 선밖에 안 됩니다. 선수가 줄면 현지에 갈 수 있는 지도자도 줄어요. 펜싱은 현재 지도자가 10명인데 올림픽에는 3명밖에 못 갑니다. 그래서 파리에서 80㎞ 정도 떨어진 퐁텐블로에 캠프를 설치하는 겁니다. 지도자들이 데일리 패스를 끊어 경기장을 오가면서 전력 분석도 하고 선수들에게 간식도 전달하도록 할 겁니다.”
Q : “메달 색깔은 중요하지 않다. 경기를 즐겨라”는 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A : “우리나라 축구가 결승에서 일본을 만났다고 칩시다. 금메달 따면 황홀하겠죠. 은메달 따면 서운해 하지 않을까요. 금메달을 기대했던 선수들이 줄줄이 탈락하면 ‘우리나라 체육은 죽었다’고 생각하지 않을까요. ‘우리나라 엘리트 체육이 아직 안 죽었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저희는 죽을힘을 다하는 겁니다. 대신 선수들에겐 ‘조국의 영광을 위해 뛴다’는 개 풀 뜯어먹는 소리 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냥 유명해지고 연금 많이 받기 위해, 네 인생의 최고 목표니까 후회 없이 자신을 쏟아 부으라고 합니다. 왜? 네가 대한민국이니까. 손흥민이 대한민국이고 안세영이 대한민국이니까.”
A : “풍요로울 때보다 국민들이 지치고 힘들 때 조금이라도 웃음을 주고 단 몇 초라도 행복감을 줄 수 있는 게 엘리트 스포츠 아닐까요. 안세영이 통쾌한 스매싱으로 금메달을 따고, 양궁이 퍼펙트 골드로 금 사냥을 하는 순간 치맥을 먹으면서 ‘역시 대단해. 우리에겐 안세영이 있어. 양궁은 한국을 아무도 못 이겨’ 하면서 엔돌핀이 솟구치는 거죠.”
Q : 선수 자율성을 무시한다는 비판도 있죠.
A : “태릉선수촌에서 진천선수촌으로 옮기면서 선수들에게 너무 큰 자율권을 준 게 문제라고 봤습니다. 육상 단거리 선수들이 한 번 뛰고 나서는 전부 퍼질러 앉아 휴대폰을 봅니다. 1인1실 방에 암막커튼을 쳐 놓고 거의 게임방 수준으로 새벽까지 게임을 하는 선수들도 있었어요. 저는 ‘그런 식으로 할 거면 나가라’고 합니다.”
Q : 산악구보가 시대착오적이라는 비판에 대해서는?
A : “2주에 한 번씩 산악훈련을 하는 건 함께 모이기 위해서입니다. 같은 마을에 살면서 이름이 뭔지, 뭘 하는지는 알아야 할 것 아닙니까. 함께 모여서 서로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시키면 말문이 트이고 금방 친해지게 됩니다. 산악훈련은 뛰어도 되고 걸어도 됩니다. 지난번에도 절반 이상이 걸어서 갔어요.”
장 촌장은 “저희가 대표선수 할 때는 ‘태릉 출신’이라는 자부심이 엄청났어요. 저는 진천선수촌을 운동선수라면 일생에 한 번은 1년 이상 지내다 오는 게 꿈이 되는 곳, 대한민국 스포츠의 성지(聖地)로 만들고 싶습니다”고 말했다.
장 촌장은 방송인 출신답게 달변이었다. 올림픽을 맞는 각오를 물으니 평소 지론을 술술 풀어냈다. “운동하는 사람이 정말 많이 늘었어요. 크로스핏 같은 극한 스포츠에도 도전합니다. 그분들은 엘리트 스포츠 선수들이 선망의 대상이자 목표입니다. 또 이분들이 만든 저변이 엘리트 선수들의 산실이 되기도 하지요. 우리도 일본처럼 생활체육과 엘리트 스포츠가 공존하고 발전하는 모델로 가면 좋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파리 올림픽을 죽을힘 다해 준비하겠습니다.”
정영재 문화스포츠에디터 jerr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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