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이냐 혁명이냐…맞짱뜨는 로미오와 줄리엣

유주현 2024. 4. 20.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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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욘드 스테이지] 무용계 ‘로미오와 줄리엣’ 대전
5월, 서울에서 ‘로미오와 줄리엣’ 대전이 펼쳐진다. 유니버설발레단(5월10~12일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의 케네스 맥밀란 버전 드라마발레 ‘로미오와 줄리엣’과 LG아트센터 서울(5월 8~19일 LG아트센터 서울 LG시그니처홀)의 매튜 본 버전 현대무용 ‘로미오와 줄리엣’이 맞짱을 뜬다. 무용팬들이 설렐만한 한판 승부다.

케네스 맥밀란의 ‘로미오와 줄리엣’은 1965년 전설의 무용수 마고 폰테인과 루돌프 누레예프가 초연을 장식한 바로 그 버전이다. 국내에서는 1983년 영국 로열발레단 내한공연 이후 볼 수 없었지만, 2012년 공연권을 획득한 유니버설발레단이 2016년 셰익스피어 서거 400주년 기념 공연 이후 8년 만에 선보이는 무대다. 한국인 최초 ABT 수석무용수 서희의 등판도 화제다.

프로코피예프가 작곡한 음악 쓰여

유니버설발레단의 캐네스 맥밀란 버전. [사진 유니버설발레단]
로열발레단의 상징적 존재인 케네스 맥밀란(1929~1992)은 존 크랑코(1927~1973)와 함께 드라마 발레 장르를 완성시킨 것으로 평가받는다. 인물의 심리를 디테일하게 춤동작으로 번역해 내는 특유의 스타일로 프랑스, 러시아보다 역사가 짧은 영국 발레를 세계 정상급으로 올려놓은 세기의 안무가다. 그의 첫 전막발레이자 로열발레단의 간판이 된 ‘로미오와 줄리엣’은 원작의 문학성까지 느껴지는 드라마틱한 무대로, 지금까지 안무된 100여 버전의 ‘로미오와 줄리엣’ 중 전세계에서 가장 많이 공연되는 ‘클래식’이다.

맥밀란 버전은 음악과의 궁합이 환상적인 것으로 유명하지만, 사실 음악이 한참 앞섰다. 1934년 러시아 작곡가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가 키로프 발레단(현 마린스키 발레단)의 의뢰로 작곡을 시작했고, 처음 무대화된 것은 1938년 체코 브르노 극장에서다. 이후 음악에 자극받은 안무가들이 앞다퉈 작품을 만들기 시작해 지금까지 프로코피예프 음악으로만 60여 버전이 만들어졌다.

프로코피예프 음악은 음악 그 자체에 장면과 캐릭터의 감정들이 춤추는 걸로 유명하다. 맥밀란의 뮤즈이자 ‘영원한 줄리엣’으로 불리는 발레리나 알레산드라 페리도 2016년 내한 공연 당시 인터뷰에서 “각기 다른 바이브레이션을 연주하고 있는 현악기 선율에 집중하는 것만으로도 캐릭터의 깊은 감정까지 도달할 수 있다”고 했었다.

유니버설발레단의 캐네스 맥밀란 버전. [사진 유니버설발레단]
맥밀란 버전이 셰익스피어의 고전을 그대로 춤으로 번역한 ‘로미오와 줄리엣’의 클래식이라면, 매튜 본 버전은 ‘혁명’에 가까운 재해석이다. 매튜 본도 기사 작위까지 받은 영국인이다. 영국 공연계 최고 권위의 올리비에상 역대 최다 수상자(9회)이자 ‘전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안무가’로 불리는 그가 2019년 초연한 최신작이라 더욱 이목이 쏠린다.

근육질 남성 백조 버전인 ‘백조의 호수’, 오페라 ‘카르멘’을 재해석한 댄스스릴러 ‘카맨’ 등으로 공연계를 뒤흔든 매튜 본답게 ‘로미오와 줄리엣’도 예사롭지 않다. ‘로미오와 줄리엣’도 동성애 코드를 넣는 등 새롭게 해석하면서도 비극의 컨텍스트를 절묘하게 계승했다. “‘로미오와 줄리엣’이 너무 많다고 생각해 30년 가까이 안무를 거부했었다”는 매튜 본이 움직인 건 최근 점점 심각해지고 있는 관객 노령화 때문이다. 유럽에선 젊은 관객을 사로잡을 작품을 만드는 게 모든 안무가들의 미션이 됐고, 매튜 본은 젊은 예술가들과 적극적인 콜라보를 통해 완전히 새로운 ‘로미오와 줄리엣’을 만들어냈다.

확 젊어진 ‘로미오와 줄리엣’에 가문의 갈등 따위는 없다. 근미래 청소년 수용소로 배경을 옮기고 기성세대의 통제와 시스템에 저항하는 불안한 청춘의 불꽃튀는 러브스토리로 만들었다.

두 버전의 파드되를 비교해 보면 그 진화상이 재미있다. 맥밀란 버전의 파드되는 발코니 파드되와 베드룸 파드되, 무덤 파드되까지 세 차례다. 시그니처는 단연 발코니 파드되로, 맥밀란 버전을 60년 가까이 굳건한 정상의 위치에 붙들고 있는 드라마발레 파드되의 교과서다. 둘이 손잡고 나란히 걷다가, 줄리엣의 뛰는 가슴을 확인한 로미오가 화려한 솔로 배리에이션으로 유혹한 뒤 꽃과 나비처럼 한바탕 듀엣을 추고 짤막한 키스를 나눈 후 발코니 위아래로 헤어지는 깔끔한 마무리다.

시그니처 ‘발코니 파드되’ 비교 재미

LG아트센터 서울의 매튜 본 버전. [사진 LG아트센터 서울]
매튜 본의 패러디는 훨씬 화끈하다. ‘스트릿발레’랄까. 플로어를 많이 사용하는 브레이킹의 파워무브를 연상시키는 공격적인 무브먼트에 발레의 우아함을 얹었다. 로미오가 줄리엣의 몸에 기대어 빙글빙글 무대를 돌다가 서로를 굴리고 뒤집는데, 남녀의 움직임이 거의 대등하다. 남성의 리프트와 서포트에 여성이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발레와 다른 지점이다.

‘무용역사상 가장 긴 키스신’도 볼거리다. 역동적인 안무로 바닥에 뒹굴고 계단과 사다리를 뛰어올라가면서도 1분 넘게 입술을 떼지 않는다. 매튜 본은 “젊은 사람들이 사랑에 빠질 때는 서로를 떼어놓을 수 없다. 우리는 도전적인 안무를 선보이고자 했다. 무용 역사상 가장 긴 키스신을 만든 건 관객들 모두가 간직한 청춘의 추억, 영원히 끝나길 원치 않는 순간을 포착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LG아트센터 서울의 매튜 본 버전. [사진 LG아트센터 서울]
베드룸 파드되도 전혀 다르다. 맥밀란 버전이 안타까운 이별을 앞둔 연인의 애통함으로 점철됐다면, 매튜 본은 두 사람이 분노의 솔로를 추다가 재회의 열정을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짧은 듀엣 후 곧바로 엔딩으로 치닫는다. 로미오가 가사 상태로 축 늘어진 줄리엣과 추는 맥밀란 버전의 무덤 파드되를 충격적으로 패러디했다. 매튜 본 스스로 “눈여겨 봐달라”고 한 명장면이다.

잔혹한 엔딩은 플롯을 뒤집어 줄리엣의 비극을 극대화시킨 결과다. “약물 트라우마·우울증·학대 같은 이슈를 무용에서 다룰 수 있어서 자랑스럽다. 매우 심각하고 현대적인 주제인 만큼, 이를 정직하게 다루는 것이 중요했다”는 게 그의 말이다. 덕분에 가문의 반대로 연인이 죽음을 맞는 비현실적인 옛날이야기가 이 시대 젊은이들의 아픔을 보여주는 무대로 진화했다. 잔혹하지만 아름답다. 고전이냐 혁명이냐. 취향일 뿐이다.

유주현 기자 yjj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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