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언론실천선언 50년⑤] 해직자의 낙인, 하지만 우리의 삶은 '그들'보다 나았다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2024. 4. 19. 18:10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10·24 자유언론실천선언이 올해로 50주년을 맞습니다. 이 선언으로 당시 동아일보에서 130여 명, 조선일보에서 33명의 언론인이 강제 해직당했습니다. 일터를 잃은 언론인들은 출판, 문화, 정치 등 여러 분야로 흩어져야 했습니다. 각자의 영역에서 성과를 내기도 했지만, 언론 현장을 떠난 그들 개개인의 삶은 남모를 설움과 고달픔에 시달렸습니다. 뉴스타파는 자유언론실천선언 50주년을 맞아 이들 해직 언론인들의 글을 연재합니다. 지난 50년에 대한 소회와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 해직 이후의 생활 등을 담습니다. 네 번째 글은 김학천 동아투위 위원(해직 당시 동아방송 PD, 전 EBS 사장)이 썼습니다. - 편집자주 

① 해직과 굴절된 삶 : 김동현 동아투위 부위원장
② 검찰공화국 시대를 사는 아이러니 : 신홍범 조선투위 위원 
③ 흑산도 특종의 인연 : 윤석봉 동아투위 위원
④ 동아·조선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 : 이부영 동아투위 위원장
⑤ 해직자의 낙인, 하지만 우리의 삶은 '그들'보다 나았다 : 김학천 동아투위 위원

인간의 수명이 80세를 넘었지만, 지금도 50년은 한 인간의 수명에 해당한다. 유아기와 죽기 전 무기력한 시기를 빼면 그러하다. 그동안 열 명이 넘는 대통령과 정권교체가 있었다. 참 많은 것이 변하고 진화했지만 어찌된 셈인지 우리가 견디다 못해 울부짖은 언론 자유와 민주주의, 그리고 이를 실행하던 사람들에 대한 우악스럽거나 교묘한 탄압은 기대한 만큼 진화하지 못하고 있다. 언론과 민주주의를 통제하려는 권력의 욕망이 반세기 전이나 지금이나 그대로라는 뜻이다.

1970년대 언론인의 인권은 무시로 짓밟혔다. 언론의 정체성을 지키고자 한목숨을 걸고 버티어보겠다고 나섰다. 막상 그 당사자 언론 사주는 태도를 바꾸어 민주주의 압제자 쪽에 서고 50여 년을 아무렇지도 않게 돈만 버는 현상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사람 사는 게 다 그런 것 아니겠는가 정도로 넘겨버릴 일인가. 하긴 이런 의문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의 수도 이제는 많을 것 같지 않다.

△ 1975년 동아일보 농성 당시, 필자 김학천의 모습.

우와 좌, 양쪽으로 쫙 갈린 언론인이나 언론 소비자의 모습도 그러하다. 진화가 아닌 퇴행적 변화 과정은 우리에게 무거운 부채 의식도 남겼다. 그때 동아일보와 동아방송에 크고 작은 액수 가리지 않고 짤막한 절규와 함께 광고를 내준 시민들, 거리에서 학교에서 병원과 구치소에 이르기까지 찾아주고 격려해 준 시민들, 학생들 나름대로 성의를 담아 생활비 돈 봉투를 건네준 분들. 오늘의 언론 상황을 이분들에게 어떤 면목으로 설명을 드릴 수 있겠는가. 언론과 언론인의 위상에 대해 무슨 말로 인사와 변명을 건네야 하는가.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을 상기하게 된다. 유럽의 한나 아렌트가 아이히만의 재판 과정을 지켜보고 쓴 책에서 아이히만의 악행이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있을법한 현상이라고 지적한 책이다. 한나 아렌트의 관찰처럼 이기주의와 탄압은 언제 어디나 있는 보편성이라고 변명을 해야 하는가.

L 형사의 고백

자유언론실천선언 이후 투위 위원들의 대부분은 해직자로 찍힌 채 살아왔지만 그래도 권력만으로 살아가는 정치 무뢰배나 이기주의에 찌든 언론 사주들보다는 번거로운 삶을 같이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 틈에서 민주주의와 인간성을 지켰다. 저항의 싹을 발견하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작은 사연이지만 몇 가지 회상이 떠오른다. 해직 후 권력이 저지른 패악 중 하나는 해직 언론인들의 언론 관련 취업을 막은 일이었다. 생각하다 못해 몇몇이 사무실을 임대하여 식구들을 편집원으로 쓰면서 출판업을 시작했다.

그러자 경찰은 그 사무실에 아예 책상 하나를 들여놓고 감시원 형사를 배치하였다. 그 형사는 동아투위의 간부(위원장, 총무)가 차례로 구속 기소돼 재판을 받는 날에도 법원에 동석해 재판을 지켜보곤 했다. 어느 날 감시역 L 형사는 재판이 시작되기 전에 할 얘기가 있으니 문밖으로 나가자고 했다. 햇빛이 내리쬐는 법원 모퉁이에 쪼그리고 앉아 형사가 입을 열었다.

“다른 게 아니고, 우리 아이가 이번에 대학에 들어갔어.”

“어이고, 그거 잘 됐군, 그래서요.”

“그런데 그놈이 내 직업에 대해서 아주 사람 취급을 안 한다고, 어떻게 해야 돼?”

“그것참, 내가 지금 그럴싸한 조언은 하기 어렵고. 들으니 고향에 땅도 있다면서요, 내려가 보면 어때요?”

“아냐, 못 가. 고향에선 내가 크게 출세한 줄 안다고.”

어느 날 철망 두른 버스가 와서 시위하는 투위 위원들을 구치소로 실어 갈 때 L 형사는 투위 위원들 몇 명을 버스에 싣지 않고 수송동 술집 골목으로 밀어 넣었다.

△ 동아투위 송년회에서 필자 김학천의 모습.

'선생한 보람'과 동아방송 간부의 염치

3월 17일 회사에서 강제로 끌려 나오던 날, 나는 몰려드는 폭력 속에서 실신하고 병원 신세를 지게 되었다. 퇴원 후 다시 동아일보 앞에서 복직 시위를 하던 중 우리를 끌어내는데 앞장섰던 동아일보 직원 Y 씨가 다가왔다. 조용히 할 말이 있다고 했다. 동아일보 건물 구석에서 그는 겸연쩍게 얘기했다.

그는 Y 아무개를 아냐고 물었다. 모른다고 했더니 바로 자기 아들이란다. 지금 군에 가 있는데 신문에 방송사 퇴출 과정에서 당신이 쓰러졌다고 보도되니까 그 녀석이 제대로 수속도 안 하고 집으로 와서 김학천 선생 때린 게 아버지냐고 추궁하더란다. 당신 아들이 나를 어떻게 아느냐고 물었더니 내가 잠시 봉직했던 H 고등학교에서 내가 담임을 했던 학생이라 했다.

그러니 잠시 아들을 한번 만나서 내가 때린 게 아니라고 설명을 해달라는 거였다. 착잡하고, 고마운 거 같기도 하고 그랬다. 어쨌든 내가 쓰러진 것은 너의 아버지 때문은 아니라고 간곡히 전하고 귀대하도록 한 기억이 생생하다. 선생한 보람을 느꼈다.

폭도들이 동아일보에 난입한 3월 17일, 내가 실신하니까 우리를 끌어내던 사람들이 급하게 안암동 병원에 입원을 시켰는데 공교롭게도 옆방에도 동아방송 간부가 한사람 입원했다. 그는 방송국 투위 위원을 끌어내는 날 앞장서 들어오다가 사무실에 엎드렸던 누군가가 얼떨결에 던진 잉크병에 머리를 맞고 다쳤다고 했다. 그런데 이튿날부터 위문 온 사람들이 내 병실에만 몰려들었고, 그 간부의 방엔 얼씬하는 사람이 없었다. 당시 그 간부의 부인은 대학강사였다는데 며칠 후 다친 남편한테 말했다.

“당신 세상을 어떻게 살았길래 이 지경이 되었는데 들여다보는 사람 하나 없소. 우린 이젠 아무래도 여기서 살 수 없을 것 같아요.”

그 가족들은 그 후 곧바로 미국으로 이민을 갔고 들었다. 그 간부는 동아 사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눈물을 적시고 몇 해 전 귀국해서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그 잉크병을 던졌던 PD도 투위에 참여하지 말라는 강압을 받고 타 방송에서 일을 하다 요절했다.

나는 퇴원 후 퇴직 직전에 이사한 수유리에서 백수 생활을 하던 중 집을 살 때 진 빚을 감당할 수 없어 골목 입구 복덕방에 우리 집을 팔아달라고 했다.

“내가 당신 좀 아는데 살 집은 구해놓고 팔자는 거야?”

“그건 아직 못 구했는데, 영감님이 저를 어떻게 아시는지?”

“요 아래 경찰서에서 당신 들고 나는 걸 좀 지켜봐 달랬어. 무슨 큰 죄를 지은 사람인가 했는데 방송국 직원이었다며? 지켜보니 나쁜 사람 같진 않고, 하여튼 알려준다고 약속은 했으니까 집 팔아달랜다고 보고하지. 살 집 마련하지 않고서는 팔지 말라고 한 것도 보고하고. 허허. 앞으론 내가 적어보내는 건 미리 알려줄게, 에이 참.”

대체로 그런 내용인데, 그 복덕방 영감님 덕에 집을 헐값에 파는 걸 면했다.

권력이 낸 민주주의의 구멍, 민초들의 인간성이 메웠다 

아주 작은 일들이지만 세월이 가면서 권력이 망가뜨려놓은 민주주의의 구멍들을 이 민초들의 보편적인 인간성이 메꾸어준다는 생각을 했다. 권력의 이기주의와 막 나가는 욕심들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세상이 돌아가는 까닭에는 이런 것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아직 풀지 못한 의문과 부채 의식은 그대로 남아 있다.

대중을 상대로 진실을 전한다고 주장하는 그 문제의 기득권 언론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세월이 지나서 모두 잊었으니까 없던 일이라고 하는 걸까! 

△ 필자 김학천.

부채 의식이란 50년 전에, 그리고 지금까지 간단(間斷) 없이 바른 언론과 언론인 편을 들어주던 사람들에 대한 미안함이다.

70년대 중반 동아일보가 언론자유 편에 서고 압제 받기 시작하자 서울대생들은 무지스러운 탄압에 대한 비판, 풍자극을 하다 모두 정학 처분을 받았다. 해직된 투위 위원들에게 일자리를 마련해 주다 불려가 닦달을 받은 경우도 있다. CBS가 그랬다. 가끔 만나는 지인은 아직도 동아일보에 냈던 격려광고의 쪽지를 지니고 있었다. 모두가 큰 빚이다.

그래도 그 와중에 나는 아주 기쁜 마음으로 빚을 갚은 일이 있다.  해직 후 6~7년이 지나 대학 은사인 이영덕 선생이 만든 교육개발원이 교육방송을 만드는 일에 참으로 어렵게 동참하게 되었다. 취직을 한 것이다. 출근하는 첫날 얼굴에 웃음을 띠고 찾아온 첫 번째 축하객이 있었다. 광화문 비각 옆에 있던 복취루라는 짜장면 집 주인이었다. 정말 축하한다는 인사와 함께 7~8년은 되었음직한 노랗게 된 짜장면 외상 쪽지를 내밀었다. 절대 이것 때문에 온 것은 아니라면서.

여전히 정권만 바뀌면 우수수 목이 떨어지는 방송사 언론사 간부 직원들과 프로그램을 만들다 기사를 쓰다가 일손을 놓는 사람들은 어떤 외상 쪽지를 남기고 있을까. 빠르게 지나간 세월이었지만 긴 세월이었다.

※ 자유언론실천선언 50주년 준비위원회 후원
NH농협 301-0240-3680-71 재단법인 자유언론실천재단

뉴스타파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freemediaf@gmail.com

Copyright © 뉴스타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