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세화의 마지막 인사 “쓸쓸했지만 이젠 자유롭습니다”
“자유를 위해 늘 긴장한 일상…제가 의미하는 자유, 고결함 추구하는 것”
“오염된 자유는 민주시민을 고객으로…주체성·비판성·연대성 복구해야”
“날 위한 글 쓰지 않고 난민·이주노동자와 연대…‘약속’ 충실히 못 지켜”
“그래요….”
말을 빼앗긴 존재들의 편에서 빼앗긴 자유의 개념을 되찾기 위해 안간힘을 써온 그가 산소줄의 힘을 빌려 호흡을 가다듬었다.
“지금은….”
그가 숨을 모아 말했다.
“자유롭습니다.”
홍세화(77). 마침내 자유로운 사람.
지난 14일 녹색병원(서울시 중랑구 면목동) 1인실에서 그가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후배들을 맞았다. “와 줘서 고마워요.” 병상에 누워 가만히 한명씩 시선을 맞췄다. 얼굴과 발·다리가 심하게 부어 있었다. “몸의 단백질 수치가 떨어진데다 암세포가 커져 림프관이 막힌 탓”(주치의 김봉구 전 원장)이었다.
그는 지난 9일 녹색병원에 입원했다. 전날 국립암센터에서 ‘더는 항암 치료가 불가능하다’는 통보를 받았다. 그는 지난해 2월 전립선암을 진단받았다. 항암 대신 호르몬 치료를 받으며 활동을 이어 갔으나 연말에 암세포가 온몸으로 퍼진 사실이 확인됐다. 녹색병원에서 보름가량 통증 완화 치료를 받고 올해 1월3일 퇴원했다. 닷새 뒤부터 집과 암센터를 오가며 항암을 시작했다. 4차 항암이 예정돼 있던 지난 3일 ‘약이 듣지 않는다’며 암센터가 일정을 취소했다. 8일 검사에서 간 전이가 확인됐다. 이튿날 녹색병원에 재입원했다.
밤새 그를 돌본 ‘소박한 자유인’(그가 대표를 맡고 있는 독서토론모임)의 김창섭 회원이 “전날보다 상태가 안 좋으시다”고 알려줬다. 최근까지 간병하다 프랑스로 돌아간 가족들(16일 다시 입국)을 대신해 모임 회원들이 돌아가며 병실을 지키고 있었다.
인터뷰는 병원의 협조 아래 긴급하게 진행됐다. 그동안 그는 인터뷰를 최대한 미뤄왔다. 지난 연말 “곧 항암을 시작할 테니 어느 정도 루틴이 잡히면 때를 정하자”던 그가 녹색병원 입원 당일 인터뷰 의사를 알려왔다. 그날도 구체적인 일정까지 잡길 원친 않았다. 다시 연락이 온 건 사흘 뒤였다. 그사이 목소리가 크게 나빠져 있었다. “안 좋은 쪽으로 가는 것 같아 이젠 해야겠다”며 날짜(17일)를 맞췄다. 그날 저녁 급격한 상태 악화 소식이 건너왔다. “주말이 지나면 인터뷰 자체를 못 하실 수도 있다”는 전언이었다. 14일로 일정을 당겼다. “17일까지 버틸 수 있을까 걱정하시던 선생님이 안심하셨다”고 김혜순 회원이 전했다. 인터뷰는 그의 “마지막 숙제와도 같았”다. “선생님은 자신의 삶에서 각별했던 한겨레와 꼭 마지막을 정리하고 싶어 하셨고 인터뷰를 기다리며 남은 기운을 끌어모으셨다”고 했다. 주치의는 호스피스병원으로 옮기는 것을 권했으나 면회 차단을 바라지 않는 그가 녹색병원에 머물길 원했다.
“글쎄요. 얼마나 견딜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스스로 느끼는 몸 상태가 어떤지 묻자 그가 남은 시간을 가늠했다.
“열흘에서 두달 사이 아닐까 생각해요. 틀렸을 수도 있고. 아무도 모르는 일이니까요.”
부은 몸과 반대로 목소리는 야위고 흐렸다.
―마음은요?
“그냥 착잡하고 그래요.”
그가 기침을 하며 물을 청했다. “간으로 전이된 암이 숨 쉴 때마다 흉곽을 자극”(주치의)해 통증을 불렀다.
―병원으로 오시면서 가슴에 담으신 게 있으세요?
“특별한 건 없어요. 풍경이 예전처럼은 안 보여요. 여기서 창밖을 보면, 하늘이 조금 비치긴 해요.”
일요일 오후였다. 기상 관측 이래 4월 중순 서울 기온(29.4도)이 가장 높은 날이었다. 2시간10분 동안 진행된 인터뷰는 수차례 끊고 잇기를 반복했다. 드문드문 묻고, 띄엄띄엄 답하고, 중간중간 쉬었다. 간호사가 때마다 들어와 위장보호제를 놓거나 링거를 점검했다. 의식은 내내 또렷했고, 호흡은 내내 토막 났다. 그는 흩어지는 말들을 모으려고 시간을 들였고 한 단어 한 단어 애써 끌어냈다.
“21번 꾸욱 찍었습니다”
―투표하셨다고 들었습니다.
“21번, 꾸욱 찍었습니다.”
입원 전 그는 ‘비례 21번’ 노동당에 사전투표했다. 노동당의 22대 국회의원 선거 정당 득표율은 0.09%였다.
―지역구 투표는요?
“무의미하다고 생각해서, 안 했습니다.”
―20년 만에 진보정당 원내 의석이 사라졌는데요. (정치에 몸담는 계기와 무관치 않았던) 심상정 의원도 정계 은퇴를 밝혔고요. 소회가 어떠세요?
“어렵잖아요. 예견됐던 일이고. 크게 실망하거나 그러진 않아요.”
대학 졸업 뒤 무역회사에 입사한 그는 1979년 3월부터 파리 지사에서 근무했다. 그해 10월 ‘남민전(2년 전 조직 가입) 사건’이 터졌다. 귀국을 포기한 그는 프랑스에 망명을 신청했다. 그는 파리에서 난민으로 살며 관광 가이드와 택시 운전을 하며 생계를 이었다. 그 이야기를 담아 쓴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1995)가 한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됐다. 1999년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를 펴내며 20년 만에 한국 땅을 밟았다. 2002년 영구 귀국했고 그해부터 2011년까지 한겨레 기획위원과 시민편집인,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 편집위원 등을 지냈다. 그가 2011년 한겨레를 떠나 노회찬·심상정 등 당의 얼굴들이 통합진보당(그해 12월 출범)으로 빠져나간 진보신당(노동당 전신)의 대표가 됐다.
―영광은 없고 가시밭이 예정된 길이었는데요.
“양당 구조가 굳건한 상황에서, ‘다른 여지’가 있어야 한다고 봐서 그랬어요. 그렇다고, 양대 정당의 파워가 한국 사회에서 갖는 동력을, 무시할 순 없었어요. 어려웠어요. 쉽지 않았습니다.”
당대표 선거에서 단독 후보로 나선 그가 ‘출마의 변’에 붙인 제목은 ‘오르고 싶지 않은 무대에 오르며’였다. 그를 아는 사람들이 ‘상처받을 것이 분명하다’며 “하나같이 극구 만류”했을 때 그는 한 문장으로 답했다.
“저는 상처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파리 망명 시절 그는 “머리통 깨질 것 같은 아픔으로 노란 위액까지 모두 토해내게 하는” 두통에 시달렸다. 그 두통을 재발시킨 진보신당(2012년 총선에서 정당 득표율 2%에 못 미쳐 등록 취소) 대표를 맡으며 그는 체코 작가이자 정치인인 바츨라프 하벨의 시(‘시작해야 하는 것은 나 자신이다’)를 소개했다.
“일단 내가 시작해야 하리, 해보아야 하리/ 여기서 지금/ 바로 내가 있는 곳에서/ 다른 어디서라면/ 일이 더 쉬웠을 거라고/ 자신에게 핑계 대지 않으면서.”
―후회하진 않으셨어요?
“안 했어요. 진보정치와 한국 민주시민의 간극, 그 간극을 드러내면서도 줄여나갈 수 있길 바랐어요. 그게 한겨레를 나온, 가장 중요한 이유였어요. 한순간에 이뤄진다고 생각하진 않았어요.”
그는 20년 전 ‘진보정당 콤플렉스’(2004년 1월 ‘아웃사이더’ 17호)란 글을 쓴 적이 있다. 민주노동당이 10석으로 진보정당 첫 원내 진출을 이룬 17대 총선을 석달 앞둔 시기였다. 그는 이 글에서 젊은 세대의 탈정치화 경향을 우려하면서도 진보정당과는 거리를 두는 진보 지식인들을 향해 “진흙탕으로 묘사되는 정치판에 몸담지 않고 정치 현실을 비판하는 타성”을 지적했다. 실패가 뻔한 일이라도 ‘자신이 시작해야 하는 일’이라면 그는 핑계 대거나 회피하지 않았다.
“이상과 지향이 정치 지형과 잘 만나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중요한 순간이 오면, 바로 손을 빼거나 실망하는 면도 없지 않죠. 우리가 민주시민을 지향하는 게 분명한데도, 민주주의에 대한 자세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민주시민이라고 하면, 세 가지 성격이 드러나야 돼요. 세 가지.”
그가 잃어버린 물건 찾듯 머릿속을 헤쳐 찾아낸 단어들을 하나씩, 천천히, 말했다.
“주체성, 비판성, 연대성. 이 세 가지를 복구해야 해요. 주체성은, 자기가 이 사회의 주체라는 것. 이 사회를 움직여 가는 본체라는 생각. 비판성은, 비판 능력을 갖게 되는 것. 그리고 연대성. 이것들이 민주시민으로 품어야 하는 기본 성격인데, 반민주세력과 싸워나가는 과정에서 후…(한참을 호흡), 뭐랄까, 생활이 많이 결여돼 있죠.”
―물 좀 드릴까요?
“그래요…. (한 모금 마신 뒤) 갈수록 주체성, 비판성, 연대성이 지쳐가는 게 아닌가. 제가 볼 때, 아이엠에프(IMF) 이후 특히 그런 경향이 강화되고 있고, 소위 진보적이라는 사람들까지도 거기에 휩쓸려 가지 않나 싶어요. 그 모습들이 대세가 되다 보니, 이제 너무 자연스러워진 것 같아요.”
황달이 비치는 눈에서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한겨레 마지막 칼럼도 20년 만에 귀국한 날 본 광고판의 충격으로 시작하셨어요.
“그랬어요. 엄청 충격이었어요.”
“한국사회에 적응해야 하나요?”
그는 2023년 1월 ‘마지막 당부’라는 글을 쓰며 1999년의 ‘그날’을 떠올렸다.
“나를 초청한 한겨레신문 출판국의 자동차가 소공동을 지날 무렵 거대한 전광판에 ‘부자 되세요!’가 떴다. 내 시선이 그 전광판에 고정됐고 자동차가 방향을 바꾸었을 때도 계속 지켜보려고 몸을 뒤틀었다. 내가 놓친 게 있겠지. 가령 ‘마음의’ 같은, 그 앞부분을 못 본 것이겠지. 그러나 전광판은 다만 ‘부자 되세요!’를 거듭했다. 민주화와 산업화의 귀결점이 ‘부자 되세요!’였다.”
그가 물기 없는 목소리로 짜내듯이 말했다.
“주체성, 비판성, 연대성의 길로 가지 않고, 그 흐름에 승복하고 말았구나. 지식인들이라면, 좀 더 진보적인 설명을 해낼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는구나. 그렇게 보였어요. 물론 지금은 더 나빠졌죠.”
귀국 2개월 뒤 라디오 인터뷰에서 진행자가 물었다.
“한국 사회에 잘 적응하고 계신가요?”
그는 되물었다.
“적응해야 하나요?”
불온한 반문이었다. 사상이 불온하단 이유로 망명자가 돼야 했던 그는 고국으로 돌아온 뒤에도 얌전해지거나 착해지지 않았다. ‘불온’은 그가 글을 쓸 때마다 스스로에게 붙이는 자발적 딱지였다. “불온한 서생”을 명찰처럼 가슴에 달고 “내가 불온한 탓이겠지만”을 앞세워 싸움을 걸었다. 그의 불온한 글 앞엔 피아 구분이 없었다.
“국민의힘이 하면 안 될 행위를 주로 하는 정치세력이라면, 더불어민주당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정치세력”(한겨레 2021년 10월29일치 ‘응답하라, 차별금지법!’)이었다. “두 당은 둘 사이의 권력쟁취 게임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미치는 사안에서는 열심히 다”투지만 “민생 현안 앞에서는 치열하게 다투지 않”(한겨레 2021년 9월4일치 ‘탈진실 시대와 대통령 선거’)았다. 진보진영도 그의 편은 아니었다. 사유와 성찰 없이 진보를 파는 사람들을 그는 관용하지 않았다. “윤리적 우월감으로 무장한 민주건달”이라며 맹렬하게 비판했다.
―어떤 ‘주의자’세요? 그런 게 있으셨어요?
“정치·사회적 영혼을 담은 아나키스트. 그것에 가장 가깝지 않았을까 생각해요.”
홍세화는 아나키스트의 아들이었다. 식민지 조선에서 태어난 그의 아버지는 일본 도쿄 부두 잡역부였다. 표트르 크로폿킨(러시아 아나키스트 혁명가)의 책들을 일본어로 읽으며 “아나키즘에 의식 세계가 흔들리는 경험”을 했다. 그 신념이 첫아들의 이름에 끼어들어 그는 ‘세계평화’를 줄인 ‘세화’가 됐다. 아버지가 남겨준 이름은 그에게 “버거우면서 기꺼운 짐”이었다. 그는 2003년 출간한 ‘빨간 신호등’부터 최근에 낸 책들까지 동일한 저자 소개를 책날개에 새겨왔다. “끝까지 사병으로 남겠다”는 다짐과 “시어질 때까지 수염 풀풀 날리는 척탄병이고 싶다”는 바람은 그가 고집해온 ‘위치’이자 ‘좌표’였다.
―척탄병으로 살고 싶다는 꿈은 이루셨는지 모르지만 수염을 풀풀 날리진 못하셨어요.
그가 모처럼 웃었다. 링거선 치렁치렁한 팔을 들어 밋밋한 턱을 손으로 쓸었다. 암 진단 뒤 그는 항암 대신 남성 호르몬을 억제하는 방법으로 암세포의 활동을 막아왔다. “중성화된 덕에 수염이 없어지고 피부도 매끈하게 예뻐졌다”며 그는 암세포에 뼈까지 잠식된 지난 연말에 농담하듯 말했다.
“즐거운 아웃사이더이고 싶다.”
그가 저자 소개에 빠뜨리지 않는 또다른 바람이었다. 그러므로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의 바람은 삶을 건 선택이었으나 그는 어떤 중심으로부터도 환대받지 못했다. 그는 변방과 ‘가장자리’(진보신당 대표를 그만둔 뒤 꾸린 학습공동체)를 고집한 사람이었다. 한국 사회에서 그 자리는 명예가 아니라 차라리 낙인이었다. 현실에 조응하지 못한다며 ‘안’을 찾아 떠난 사람들로 옆이 차근차근 비어갈 때 그는 ‘밖’에 남은 마지막 사람이고자 했다. 편이 있다면 그는 배제된 자들의 편이었다. 그편을 떠나지 않기 위해 그는 “안간힘”을 썼다. 피해자 통계 속에 쇳물처럼 녹아버린 개별 존재들의 서사를 그 불온한 문장들로 줄기차게 썼다.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출간이 아니었다면 지금쯤 센강 변에서 배회하다 소멸해버렸을 존재”라고 그는 때마다 말했다. 귀국을 결심하며 그는 ‘소멸할 뻔했던 그 자리에서 소멸에 몰린 존재들과 연대하는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글을 쓰겠다’고 다짐했다. “그것은 자유인의 선언”(책 ‘결: 거칢에 대하여’)이었다.
―그 ‘자유’를 현재 한국 사회에서 가장 강력하게 주창하는 사람이 대통령인데요.
“그게, 참 묘하죠.”
안간힘의 궤적
“모든 개인의 자유라는 보편성을 지닌 게 아닌, 힘센 자들, 가진 자들만의 자유라면 그것은 자유가 아니라 타락이다. 그것은 지배와 억압의 기제로서 약자의 굴종과 복종을 강요하는 힘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 자유의 확대를 ‘번영과 풍요, 경제적 성장’에서 찾는 데서 알 수 있듯이 그(윤석열 대통령)의 자유는 시장의 자유, 자본의 자유, 신자유주의의 자유와 친화력을 갖는 것이었다.”(한겨레 2022년 6월10일치 ‘빼앗긴 자유, 자유주의’)
그가 안간힘을 다해 되찾아 오고자 했던 것도 ‘자유의 개념’이었다. 그는 “이 땅의 기득권 세력들이 저지른 윤리적 범죄행위 중에서 가장 앞선 것은 자유의 의미를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더럽혔다는 점”(책 ‘결’)이라며 조지 레이코프의 문장을 자주 인용했다.
“자유를 빼앗기는 것도 슬픈 일이지만, 자유 개념을 빼앗기는 일은 더욱 슬픈 일이다.”
―지난 2년간 대통령의 입에서 ‘오염된 자유’가 거듭 강조될 때마다 어떤 생각이 드셨어요?
“그런 ‘자유’에 휩쓸리면, 시민이 고객화되는 거예요. 고객에게 중요한 것은, 인간이나 자유가 아니라 구매력이에요. 구매력만 있으면 돼요. 학교와 학생·학부모의 관계도 마찬가지잖아요. 주체성, 비판성, 연대성을 찾을 이유가 없어요. 자문해봐야 해요. 우리는 민주시민인가, 고객인가.”
그가 진보신당 대표 이후 맡아온 학습공동체 ‘가장자리’와 ‘소박한 자유인’ 대표, ‘장발장은행’ 은행장 등의 역할도 “강제력에서 벗어난 자유인들의 자발적 연대”를 이루려는 안간힘의 궤적이었다.
“조금 쉴까요.”
그가 휴식을 청했다. 후, 후, 후, 짧고 거친 호흡이 이어졌다. 병실 불을 끄고 병상 등받이를 낮췄다. 눈을 감은 그는 금세 잠에 빠졌다. 전날 친구 유홍준(전 문화재청장)이 “또 만나자”며 두고 간 부채로 순한 바람을 만들어 그의 잠을 도왔다. 10여분 뒤 눈을 뜬 그가 부축을 받아 화장실로 걸어갔다. 누워 있던 자리는 땀으로 젖어 있었다. 화장실 안에서 끅끅 속 긁는 소리가 들렸고, 시계 초침이 조용한 병실에서 혼자 울었다.
“제가 의미하는 자유는, 고결함에 대한 추구예요.”
그가 돌아와 누우며 설명을 보탰다.
―‘존엄’처럼 들리기도 하는데요.
“네, 그렇습니다.”
힘이 부칠수록 그의 답도 짧아졌다. 그는 자세한 설명을 책(‘결’)에 써뒀다.
“자유인은 고결함을 지향한다. 비단결이 고운 것은 올이 많아 섬세하기 때문이다. 자유인은 사물과 현상을 인식하는 사유의 올들에 하나의 올이라도 더 보태거나 수정하여 조금 더 섬세하고 정교하게 세상을 인식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 결들을 올올이 살린 글로 “말을 빼앗긴 사람들과 목소리가 지워진 사람들”의 “비명”을 기우며 그는 “말의 가능성”(2013년 7월 ‘말과 활’ 창간호)을 꿈꿨다. 옳고 그름이 불투명해진 시대에 그의 글에서 그른 것은 옳은 것이 될 수 없었다. 그 경계를 흐리지 않고 줄을 두겹 세겹 겹쳐 그은 글들은 투명하고 명료했다. 물러섬 없는 글의 일관성과 그 일관성을 지키느라 안간힘을 써온 삶은 쓸쓸하고 외로워서 그만큼 아름다웠다.
―“자유인에게 긴장의 일상은 필수”라고 쓰신 적이 있습니다. 공격도 많이 받으셨고요. 그 긴장이 병이 되진 않았을까요?
“그렇게 볼 수도 있죠. 그럴 겁니다. 늘 긴장돼 있었어요.”
―“자유는 외로움을 대가로 치러야 한다”고도 쓰셨어요. 외로우셨나요?
“한때는 외롭고, 한때는 자유로웠어요. 자유를 위해 치러야 할 대가가, 진정한 긴장의 의미라고 생각해요.”
―그 모든 긴장들을 통과해 온 지금, 자유로우신가요?
“네, 자유롭죠. 지금은 자유롭습니다. 덜 외로워요.”
―이 순간까지 자유를 방해하고 있는 것이 있다면요?
“물론 병마죠.”
(지난 연말 그는 항암을 앞두고 “장기전”이라며 투병 의지를 가다듬었다. “사람이 아플 때도 있잖아요. 그래도 또 일어나야죠. 노력할게요.”)
“이 혼탁한 세계에서 이제…”
―어느 글에선가 “젊은 시절에는 기조가 분노였다면 이젠 쓸쓸함으로 바뀌고 있다”고 하셨어요.
“밖으로 향하던 분노가, 나이 들수록, 저 자신에 대한 질책으로 바뀌었어요. 제 고백이에요.”
―2014~2020년 칼럼을 모은 책 제목이 ‘미안함에 대하여’인데요. 뭐가 미안하신가요?
“(청년들과 미래 세대, 약한 이웃들의) 고통을 줄여주지 못한 책임이, 제게도 있을 테니까요. 좀 더 나은 세상을 위한 토대를 마련해주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해 미안해요.”
―한겨레 칼럼을 다시 쓴다면 무슨 내용부터 쓰고 싶으세요?
“계속 이야기했지만….”
숨이 거칠어지자 그가 한동안 말을 끊었다.
그는 1996년 프랑스에서부터 한겨레 필자였고 귀국 전인 1999년부턴 고정 칼럼을 썼다. “한국 사회에 직접 만나고 부딪히기보다 한겨레 칼럼을 통해 한국 사회와 만나고 부딪혀왔다고 할 수 있을 만큼 한겨레 칼럼 쓰기는 내 삶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책 ‘미안함에 대하여’)고 그는 말해왔다. 그 칼럼들을 통해 그는 ‘내부자’ 시절부터 어떤 ‘외부자들’보다 따갑게 한겨레를 감시하고 질책했다. 그가 ‘한겨레 편집국 간부의 김만배 돈거래 사건’(2023년 1월6일) 일주일 뒤 오랜 칼럼 쓰기를 중단했다. 그는 마지막 칼럼에서도 “불온한 서생”으로서 한겨레를 향한 일침을 빼놓지 않았다. 건강 악화 뒤엔 “언젠가 조금 나아지면 칼럼을 재개하고 싶다”고 문병 온 후배들에게 말했다.
“계속 말했지만, 관계성. 관계성이에요.”
―관계성의 복원이나 회복을 말씀하시는 걸까요?
“형성이라고 할게요.”
―형성이요?
“네. 사람의 삶은 관계의 형성인데, 관계를 형성하는 게 아니라, 흐트러뜨리고 파괴하는 일들이 심해졌어요.”
―칼럼에서 강조하신 ‘소유에서 관계로’, 그 의미겠죠?
“맞습니다.”
‘소유에서 관계로’는 2023년 1월13일치 신문에 실린 마지막 칼럼의 부제였다.
“자연이 인간의 지배, 정복, 소유, 추출의 대상일 때, 인간도 다른 인간의 지배, 정복, 수탈, 착취의 대상이었다. (…) 소유주의가 끝없이 밀어붙인 성장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리고 자연과 인간, 동물과 인간, 인간과 인간의 관계는 성장하는 게 아니라 성숙하는 것이다.”
―한겨레는 앞으로 어떤 언론이 돼야 할까요?
“알잖아요.”
―특별히 남기시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해주세요.
“(한참을 생각한 뒤) 그냥 떠오르는 이야기 할게요. 2002년에 귀국할 때, 제가 스스로 다짐한 게 있었어요. 하나는, 나 자신을 위한 글은 쓰지 않겠다. 다른 하나는…, 내가 (프랑스에서) 난민과 이주노동자 출신이었기 때문에, 나와 같은 처지로 한국에 와 있는 사람들과 연대하겠다. 그 두 가지였는데, 약속을 충실히 지키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지키지 못한 약속’이라고 했지만 그의 글과 삶은 그 약속에서 떠나 본 적이 없었다. 근래엔 시민모임 ‘마중’ 활동에 함께하며 외국인보호소의 장기구금 문제를 비판(한겨레 2021년 1월15일치 ‘화성외국인보호소에서’)해왔다. 제주에 도착한 예멘 난민들을 향해 혐오가 분출했을 땐 칼럼(한겨레 2018년 7월6일치 ‘이 혐오감정은 어디서 비롯됐을까?’) 끝에 이런 문장을 남겼다.
“나의 과거 모습을 오늘 보여주고 있는 당신들, 부디 꿋꿋하게 살아내시길….”
―‘난민과 이주노동자 출신’이란 정체성은 지금도 그대로이신가요?
“그렇죠”
그는 케이티엑스(KTX)를 타면 일부러 역방향 좌석을 택한다고 했다. “(역방향으로 앉아 있으면)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뒤로 물러”났다. “빠른 속도로 물러나고 또 물러나 마침내 소멸되는 그런 상을 머릿속에 그렸”다. 그때마다 그는 “물러남에 대해 생각”(책 ‘새로운 세상의 문 앞에서’ 저자의 말)했다.
“물러남 맞습니다. 물러나야죠. 이 혼탁한 세계에서, 이제 비켜나야죠.”
목소리가 알아듣기 힘들 만큼 잦아들었다. 그의 입을 빠져나오지 못한 말들이 입술 언저리를 맴돌았다. 귀를 입에 바짝 대고 들었지만 받아 적지 못한 말들이 적지 않았다.
그가 “오늘은 여기까지 해야 할 것 같다”며 “별것도 아닌 이야기를 들으러 오게 해서 송구스럽다”고 했다. “더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다시 연락드리겠다”고도 했다. 그로부터 연락은 오지 않았다. ‘숙제’를 마쳐서인지 이튿날부터 대화가 거의 불가능해졌단 소식이 대신 왔다.
병실을 나설 때 돌아본 그의 표정은 고요했다. 잡은 손을 놓고 나가는 후배들을 그의 눈은 병실 문이 닫힐 때까지 좇고 있었다. 그가 오른손을 들어 문틈 사이로 인사를 보냈다.
“기사는 마지막에요. 임박했을 때 내줘요.”
그가 기사를 앞질렀다. 2024년 4월18일 오전 11시55분. 자유로운 그가 떠났다.
이문영 기자, 안영춘 한겨레21 기자, 이재훈 한겨레21 편집장 moon0@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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