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된 농사 잊는 마법같은 시간...그림이 주는 행복이죠”

유건연 기자 2024. 4. 19. 17:14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경북 봉화 ‘마음을 그리는 농부들’
6년째 12명 회원 꾸준한 활동
‘평생학습도시 동아리 대상’ 영예도
경북 봉화 소천면 오지마을 그림 동아리 ‘마음을 그리는 농부’ 회원들과 이진숙 화가(서있는 사람)가 행복한 모습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다.

“사과밭 가지치기와 콩밭에서 순자르기로 고되고 지친 몸이지만 연필과 붓을 잡는 순간만큼은 오롯이 그림과 나 자신에게 집중하죠. 마음을 그리는 행복감에 동아리를 찾습니다.”

‘주경야화(낮엔 농사짓고 밤에 그림을 그린다)’란 말에 딱 들어맞는 농부들이 있다. 고향에 돌아와 전통주로 창업을 준비 중인 30대 청년부터, 귀농해 사과 농사를 짓는 60대 농부까지 다양한 세대가 그림을 매개로 어울린다. ‘마음을 그리는 농부들(이하 마농)’이다. 경북 봉화 소천면 오지마을 분천5리 폐교를 개조해 만든 아틀리에(화실‧畫室) ‘날마다 소풍’은 이들의 아지트다. 

산골 저녁은 일찍 찾아온다. 4월초 6시30분이면 칠흑 같은 어둠이 마을을 고요히 덮는다. 오래전 폐교된 중학교 건물 한쪽 아늑한 공간에서 마농 회원들은 1주일에 한번 그림을 그린다. 4~10월 매주 월요일 저녁 2시간은 12명 마농 회원들이 현실의 고단함을 잊고 자기만의 세계로 빠져드는 마법의 시간이다.

이 시간만큼은 고된 농사일도, 삶의 걱정도 잊는다. 2만6446㎡(8000평) 규모로 사과와 콩농사를 짓는 송금옥씨(62‧소천면 분천리)는 “바쁜 영농철엔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저녁도 굶은 채 헐레벌떡 온다. 하루 종일 농사일로 손이 떨릴 때도 있다. 하지만 연필과 붓을 잡는 순간 세상 모든 고민은 사라지고 그림에 집중한다”고 했다. 그는 이번 학기에 사과를 그린다. 송씨가 그리는 사과 품종이 ‘부사’인지 ‘썸머킹’인지, ‘아리수’ 인지를 놓고 한바탕 농담이 오간 후 회원들은 다시 그림에 빠져들었다.

고향 분천마을로 돌아와 산양삼과 송이버섯을 활용한 전통주(막걸리와 증류주)를 개발해 창업을 앞둔 박차령씨(31)는 “어릴 적 농촌 생활을 주제로 동화책을 만들고 싶다. 동화책 중간중간에 넣을 그림을 직접 그리기 위해 모임에 참여했다”면서 “기억 속 어린 나를 그림으로 표현하며 스스로 위로와 안식을 얻는다”고 말했다.

경북 봉화 소천면 오지마을 그림 동아리 ‘마음을 그리는 농부’ 회원들이 '날마다 소풍'에 모여 그림을 그리고 있다.

귀농 7년차 9917㎡(3000평) 규모 사과농사를 짓는 정태희씨(51)는 2023년부터 모임에 합류했다. 정씨는 “농촌에 취미 생활을 위한 시설이나 기관이 부족할 거란 생각은 기우에 불과했다. 선생님의 친절한 가르침과 함께 이웃들과 그림을 매개로 소통할 수 있어 정말 행복하다”며 미소 지었다.

마농 회원 창작을 돕는 화가이자 강사 이진숙씨도 2016년 분천리에 깃든 귀촌인이다. 그는 2019년부터 ‘마농’ 강사로 활동하며 재능기부를 하고 있다. 

그는 “손톱 밑 흙 때가 끼고 온종일 고된 농사일로 손이 떨리면서도 붓을 잡고 그림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며 되레 감동받는다”며 “문화 혜택이 상대적으로 부족한 농촌이지만 회원들은 그림을 통해 행복을 나눈다”고 말했다.

올해 6년차에 접어든 마농은 해마다 마을 주민과 인근 초등학교 학생을 초청해 전시회를 개최한다. 그림 수업을 마무리하는 10월엔 팜파티를 열어 이웃, 지역주민과 소통하고 정을 나눈다.

마농 12명 회원 중 남자는 2명. 이 중 한명 한정민씨(54‧소천면 분천리)는 “그동안 그린 그림 10점을 액자에 넣어 벽 한쪽에 걸어 놓았다. 볼 때마다 뿌듯함과 자부심을 느낀다”면서 “그림이 하나씩 더해질 때마다 우리집이 마치 갤러리가 되는 것 같다”면서 겸연쩍게 웃었다.

농부들의 그림에 대한 열정은 지난해 12월 교육방송(EBS)과 전국평생학습도시협의회가 주최한 ‘대한민국 평생학습도시 학습동아리 & 숨은 고수 열전대회’에서 동아리 활동 부문 대상의 영예를 안겨줬다.

마농 대표이자 농촌 활동가 김애란씨(47)는 “농촌 주민들이 즐겁고 행복하려면 마농처럼 자발적인 취미 모임이 더욱 활발해져야 한다”면서 “농부들이 삶의 재미를 맛볼 수 있도록 지원하고 공동체 활동이 활발해지는 기회가 더 많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Copyright © 농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