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조선이야? 고구려야? … 디지털로 시공간을 건너다

이향휘 선임기자(scent200@mk.co.kr) 2024. 4. 19. 16:39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체험형 디지털 전시 열풍
조선의 명작 칠보산도병풍
실물은 美에 소장돼 있지만
국립고궁박물관 스크린으로
내레이션 곁들여 보여주니
"내가 산위에 오른 듯 생생"
국립중앙박물관 대형 OLED
압도적 광개토대왕비에 탄성
서울 종로구 고궁박물관에서 열린 '작은 금강, 칠보산을 거닐다' 칠보산도병풍 디지털 영상 전시에서 관람객들이 영상을 감상하고 있다. 연합뉴스

서울 경복궁 내 국립고궁박물관 2층. 배우 류준열의 담백한 목소리에 홀린 듯 전시장에 들어갔다.

깎아지른 듯한 기암절벽과 높은 봉우리의 향연이 커다란 스크린을 통해 눈앞에 펼쳐졌다. 생생한 겨울철 비바람 소리와 설경 속에 마치 험한 산속을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듯했다. 차분한 배우의 내레이션과 섬세한 양방언의 음악에 눈과 귀가 황홀했다. 다음달 말까지 펼쳐지는 디지털 실감 전시 '칠보산도병풍'이다.

작은 금강산으로 불리는 칠보산은 함경북도 명천에 있으며 이를 그린 실물 그림 역시 미국 클리블랜드 미술관에 있다. 직접 산을 오를 수도, 그림으로라도 자주 접할 수도 없다. 하지만 5m 높이의 대형 3면 디지털 영상은 이러한 아쉬움과 서운함을 일시에 씻겨준다. 오히려 시시각각 자태를 바꾸는 산 곳곳의 절경이 관람객에게 압도적인 몰입감을 안겨준다. 10분간의 장엄한 쇼에 은밀하게 초대받은 느낌이다.

류준열의 내레이션은 판관이었던 임형수가 1542년 3월에 칠보산을 유람한 뒤 쓴 여행기인 '유칠보산기'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영상에선 사흘간의 여정을 담고 있다. 해당 실물 그림은 가로 460㎝, 세로 185.2㎝ 규모의 큰 10폭 병풍화다. 19세기 조선시대에 그린 것으로 추정되며 작자는 미상이다. 개심사(開心寺), 회상대(會象臺), 금강굴(金剛窟) 같은 칠보산 특유의 명소들도 적혀 있다.

전시장을 나온 한 관람객은 "큰 기대 없이 고궁박물관 전시를 보러 간 김에 보게 되었는데 차분한 전시공간의 분위기와 콘텐츠의 몰입감 등으로 매우 빠져들었다"며 "한참 동안 자리를 뜰 수 없었다"고 말했다. 또 다른 관람객은 "친절한 영상을 통해 칠보산도 10폭 전체를 실제로 누빈 느낌이 들었다"고 말했다.

박선미 국외소재문화재재단 부장은 "보기가 어려운 외국에 있는 우리 문화재를 디지털로 기록화하는 작업을 하고 있으며 이번 클리블랜드 콘텐츠는 그 첫 번째 결과물"이라며 "가볼 수 없는 곳을 갈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실감 콘텐츠의 매력"이라고 말했다.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관 '역사의 길'에 디지털로 재현된 광개토대왕릉비. 연합뉴스

디지털 실감형 전시는 박물관 곳곳에서 쉽게 접할 수 있다.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관 '역사의 길'에는 올 초부터 7.5m 높이, 너비 2.6m 크기의 발광다이오드(LED) 광개토왕릉비가 우뚝 서 있다. 압도적인 실물 크기를 가늠할 수 있을뿐더러 비석의 세세한 면까지 체험할 수 있어 인기를 끌고 있다. 이 기둥에 들어간 LED 패널만 1260매다. 디지털 비석 주변에는 4개의 디지털 탁본 족자를 세웠다. 광개토왕릉비 4개 표면에 종이를 대고 직접 두드려 떠낸 원석탁본을 바탕으로 한 디지털 작업이다.

원래 광개토왕비는 높이 6.39m의 돌 4면에 총 1775자를 새겼으며 고구려 건국 신화와 왕의 즉위, 광개토왕의 업적, 왕의 무덤을 관리하는 규정 등의 내용이 담겨 있다. 실제 비석은 중국 지안에 있다.

전시를 기획한 이태희 국립중앙박물관 연구관은 "멈춰 있는 그림이 아니라 계속 움직이는 영상이다 보니 학생들이 많이 좋아한다"고 밝혔다.

실감형 디지털 콘텐츠는 접근성의 한계를 최첨단 디지털 기술로 뛰어넘는다. 광개토대왕비나 칠보산도병풍은 소중한 우리 문화재지만 우리 소유물은 아니다. 모두가 직접 가서 볼 수 있는 작품도 아니다. 디지털 광개토왕비가 있던 자리에는 원래 신라시대 진품이자 보물인 '월광사 원랑선사탑비'가 놓여 있었다. 이태희 연구관은 "진품 대신 디지털 콘텐츠를 넣는 게 부담이었는데 각종 SNS를 보면 박물관이 의미 있는 일을 했다고 평가해 개인적으로 뿌듯하다"고 말했다. 특히 경험을 중시하는 MZ세대는 수동적으로 그림을 관람하는 게 아니라 작품 속으로 들어가 다양한 감각으로 즐기는 체험형 전시를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달 말 서울 5대 궁과 종묘에서 시작하는 궁중문화축전 10주년 행사 때도 체험형 전시와 공연 비중이 작년에 비해 부쩍 늘었다. 새롭게 신설된 프로그램 가운데 경복궁 흥례문 광장에서 상시 운영되는 'K-헤리티지 마켓'은 무형유산 전승자의 공예품부터 전통문화상품, 궁중다과 등을 누구나 구입하고 즐길 수 있는 야외 시장이다. '아침 궁을 깨우다'는 '궁궐 걷는 법'의 저자 이시우 작가의 해설과 함께 창덕궁 곳곳을 아침에 산책할 수 있다. 덕수궁에서는 '황실취미회' 상설 프로그램이 열리는데 고종이 사랑한 취미 활동인 커피와 당구, 음악 등을 예약 없이 참여 가능하다. 한국을 대표하는 미디어 아티스트 이이남 작가가 참여하는 창경궁 '물빛연화'도 관객 참여를 유도하는 전시와 공연 합작품이다.

이이남 작가는 "미디어아트 작품에 실제 무용가가 등장해 춤을 추는 작품으로 인공지능(AI) 기술도 들어가 있다"고 귀띔했다. 그는 "미디어아트 시장이 아르떼뮤지엄과 실감형 콘텐츠 전시장 설립으로 급팽창하고 있다"며 "다만 기술이 아무리 발전한다 해도 인간의 감성과 정서를 따라갈 수 없다"고 말했다. 관람객의 공감을 받으려면 기술의 유려함도 중요하지만 그 안에 담긴 스토리와 구성, 감정도 뛰어나야 한다는 지적이다.

[이향휘 선임기자]

Copyright © 매일경제 & mk.co.kr.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