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올드 오크’를 만들자[오늘을 생각한다]

2024. 4. 19.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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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명교 플랫폼C 활동가


이번 총선은 분명 윤석열 정부에 대한 심판 여론이 강하게 작동했다. 동시에 위성정당 전략을 통해 정치 풍토 자체를 망가뜨린 장본인들이 줄줄이 당선됐고, 투표자 97.7%에게 진보당이 버림받은 선거였다.

총선 당일 밤, 개표방송을 보지 않고 영화 <나의 올드 오크>를 봤다. 이 영화는 빈곤이 심해지고 복지 기반이 무너진 오늘날 영국의 지방 소도시와 그곳에서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갈등을 배경으로 한다. 전쟁을 피해 머나먼 이국땅에 온 시리아 난민들을 대하는 정주민의 태도는 제각각이다. 어떤 이들은 성심성의껏 정착을 돕지만, 또 다른 이들은 난민들 때문에 일상이 공격받기라도 한 것처럼 불만을 표출한다. 한국사회의 단면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기시감이 드는 모습이다.

영화 속 이 작은 지방 도시의 경제와 평범한 사람들의 삶이 파괴되기 시작한 것은 마거릿 대처의 신자유주의적 개조의 폭풍우가 몰아닥친 1980년대부터다. 효율이 떨어지는 산업이나 노동조합, 사회복지는 공격 대상이 됐다. 국가와 자본 권력의 폭력에 맞서려면 평범한 노동자들이 뭉쳐 싸워야 했지만, 노동자들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영화 속에서 함께 춤추고 노래하고 대책을 논의하던 공간 ‘올드 오크’가 복구마저 어려운 상태로 팽개쳐졌던 지난 수십 년은 이 소도시가 어떻게 무너져왔는지 드러낸다. 더 이상 사람들은 모이지 않았다. ‘이웃’과 ‘동료’는 잊혔고, 공동체는 무너졌다.

우리는 무수히 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다시 우리의 올드 오크를 세워야 한다. 대안 정치가 가능하다면, 그렇게 만들어질 수백 개의 올드 오크에서 시작될 수밖에 없다.


이 대목에서도 우리는 1997년 외환위기 이래 변모한 한국사회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양산에 맞서 노동자들은 굳건하게 맞서 싸웠다. 하지만 이에 굴복하고 깃발을 내린 일터에서는 많은 노동자가 쫓겨나거나 비정규직이 됐다. 많은 일터에서 ‘우리’와 ‘그들’의 경계가 높아진 현실을 보라. 조선족이나 동남아 이주노동자, 난민들에 대한 정주민들의 배타적이고 적대적 시선이 점증하는 현실도 마찬가지다.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건 국경이 아닌 자본의 착취, 일하는 사람의 권리를 축소시키는 부자만을 위하는 정책 때문인데, 어느샌가 적대의 칼날은 잘못된 정책이 아니라 이주민을 향한다.

지난 십수 년, 극소수 부유층은 더 부유해졌고, 대다수의 삶은 더 나빠졌다. 지난 2월 말 통계청이 발표한 ‘2023년 4분기 가계동향 조사 결과’에 따르면, 작년 4분기 가구당 월평균 소득은 전년 대비 3.9% 늘었지만, 높아진 물가를 반영한 실질 근로소득과 사업소득은 오히려 1.9% 줄어들었다. 노동자나 영세 자영업자 모두 생계를 위협받고 있는 셈이다. 이는 한국만이 아니라 미국과 유럽도 마찬가지다. 이에 반해 상위 1%의 자산은 오히려 사상 최대를 갱신하고 있다.

2000년대 초, 민주노동당이 빛날 수 있었던 이유는 스타 정치인과 인플루언서 때문이 아니라 그러한 결과를 집단으로 만들어온 토대 때문이다. 당시 노동운동이 공격받기 전의 광업도시라면, 오늘날 진보정당의 한 시대가 끝난 이유는 폐광 이후 우리의 ‘올드 오크’가 건설되지 않았던 탓이 크다. 그러니 우리는 무수히 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다시 올드 오크를 세워야 한다. 대안 정치가 가능하다면, 그렇게 만들어질 수백 개의 올드 오크에서 시작될 수밖에 없다.

홍명교 플랫폼C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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