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부림에 숨진 스포츠 스타의 아내…진실은 어디에? [올어바웃스포츠]

류영욱 기자(ryu.youngwook@mk.co.kr) 2024. 4. 19.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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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J심슨의 머그샷을 표지로 다룬 미국 타임지와 뉴스위크지. 타임지의 표지는 OJ심슨을 사건의 범인으로 단정짓는 듯한 황색 언론을 상징하는 사진으로 유명하다.
“그가 그 일을 저질렀다고 생각하나요?”

미소냉전의 시대를 지나 미국과 러시아의 평화무드가 무르익던 1995년. 미국 워싱턴 D.C.를 방문한 러시아연방의 초대 대통령 보리스 옐친은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에게 이와 같은 첫 마디를 던집니다.

‘그?’, ‘그 일?’ 2024년을 사는 우리에겐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는 문장입니다. 그러나 당시 미국 사회에 관심이 조금이라도 있었던 사람들은 모두 옐친이 던진 질문이 무엇을 뜻하는지 단번에 알아챌 수 있을 것입니다. 훗날 ‘세기의 재판’이라고 불렸던 사건. ‘OJ 심슨 사건’입니다.

미국인이 가장 사랑하던 스포츠 스타, 엔터테이너이자 가정 폭력범이며 아내를 죽였다는 강력한 심증을 받았던 주인공 OJ 심슨이 최근 76세의 나이로 사망했습니다. 그의 죽음은 다시 한 번 미국 사회에 30여 년전 그의 살인 혐의 재판과 이야기를 환기했습니다.

인종, 성별, 유명세, 황색언론, 사법제도 등 밀레니엄 시대 끝자락에 걸친 미국의 단면을 함축했다고 평가받는 ’OJ 심슨 사건‘을, 상징적인 몇몇 문구와 함께 이야기해보겠습니다.

NFL 필드부터 브라운관, 스크린까지 장악한 1970년대 ‘미국의 남자’
1960-70년대 최고의 미국프로풋볼(NFL) 스타였던 러닝백 OJ 심슨 <출처=Gettyimages>
“나는 흑인이 아니라 OJ다.”-OJ 심슨

오렌설 제임스 심슨(Orenthal James Simpson)은 미국프로풋볼(NFL) 역사에서 가장 뛰어난 러닝백(공을 들고 뛰는 포지션)중 하나로 평가받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두각을 보인 그는 대학풋볼리그 MVP를 차지하고 프로 무대에 진출합니다. NFL 입성 초기 잠시간 부침을 겪은 뒤 OJ는 이윽고 프로 세계도 평정합니다. 1972년부터 5년 동안 연속 1000야드 러싱을 기록하고, 4번이나 리그 1위를 달성합니다. 1973년엔 단일시즌 최초 2000야드 러싱을 기록한 선수가 됐고, 1975년엔 한 경기 273야드 러싱을 기록해 리그 신기록을 세웠습니다. 1979년 은퇴 후 OJ는 1983년과 1985년 각각 대학풋볼과 프로풋볼 명예의 전당에 오르며 스포츠스타로서의 부와 명예를 모두 움켜쥐었죠.

OJ의 인기는 스포츠 세계에서만 국한되지 않았습니다. 그가 경기장에서 보여줬던 카리스마와 실력은 인종을 넘어 모든 미국인들로부터 경외의 시선을 받을만 했고, 1970년대에 미국에서 가장 사랑받는 남자가 됐습니다. OJ의 팀 동료는 “그는 행크 아론, 무하마드 알리와 함께 70년대를 풍미했어요. 그중 OJ가 단연 가장 인기가 많았죠”라고 했습니다.

OJ의 유명세는 필드를 넘어 브라운관까지 뻗칩니다. 그는 엔터테인먼트 세계에 뛰어들어 새로운 커리어를 쌓으면 순조로운 은퇴 후 삶을 준비하는 살아있는 전설이었습니다. 영화 속 멍청한 경찰로 사람들에게 유머러스하며 친숙한 이미지로 다가갔고, 렌터카 사업 광고 모델에 NFL 해설자 등 다양한 모습으로 시청자들을 만나며 남부러울 것 없는 삶을 살았죠.

불륜, 이혼, 가정폭력 그리고 두번째 이혼...파국에도 굳건했던 ‘스포트라이트’
OJ심슨과 그의 부인 니콜 브라운 심슨 <출처=AP>
“그가 날 죽이려 하고 있어요. 죽이려 하고 있다구요”!-니콜 브라운

하지만 유명세가 절정에 달했을 때도 OJ의 사생활은 그리 떳떳하지 못했습니다. 첫 번째 결혼 생활을 이어가던 그는 당시 자신보다 12살 어린 18세의 웨이트리스 니콜 브라운과 밀회를 시작합니다. 몇 년 간의 만남 후 심슨은 첫째 부인과 이혼 후 새 살림을 시작하죠.

그러나 두 번째 결혼 역시 성공적이지 않았습니다. 심슨이 아내에게 손찌검을 했기 때문이죠. 니콜은 결혼생활 동안 가정폭력을 막아달라며 9번이나 경찰에 전화를 걸었습니다. 1989년 니콜의 전화를 받고 OJ의 집에 출동한 경찰은 집밖 덤불 속에서 옷가지도 제대로 걸치지 못한 채 숨어있는 니콜을 발견합니다. 입술이 찢어지고 눈에 검붉은 멍자국이 난 니콜은 경찰이 도착하자 “그가 날 죽이려고 한다”며 소리쳤습니다.

이 사건으로 마침내 OJ는 체포됩니다. 그는 쌍방폭행을 주장했지만 법원은 120시간의 사회봉사명령과 2년간의 집행유예, 200달러의 벌금 등을 선고합니다. 이 재판을 담당했던 LA 지방검사 길 가세티는 선고에 대해 “끔찍한 농담”이라고 표현했습니다. OJ의 유명세가 중형을 피하게 해줬다는 비판입니다.

실제로 OJ의 평판은 아내 폭행 사건 이후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체포 이후 수년간 두 편의 코믹영화에 출연했고 모두 흥행에 성공합니다.

반면 OJ와 니콜의 동행은 머지 않아 끝납니다. 둘은 1992년 이혼했고, OJ는 매달 1만달러의 양육비와 43만달러의 위자료를 니콜에게 건네게 됐죠.

LA 고속도로 한복판에서 열린 콘서트, NBA 플레이오프도 밀어내
OJ심슨과 경찰의 추격전이 벌어지는 고속도로 길가에 OJ심슨을 응원하는 피켓을 든 채 서 있는 시민 <출처=Gettyimage>
“도망가! OJ 도망가!” - OJ의 추격전을 바라보는 시민이 들고 있던 피켓 문구

2년 후인 1994년 6월 13일 이른 아침. 니콜은 자신의 친구 론 골드먼과 자택에서 칼에 찔려 숨진 채 발견됩니다. 경찰은 OJ를 소환해 심문한 후 증거를 바탕으로 그를 살인 용의자로 지목했습니다.

경찰은 OJ에게 출석 명령을 내리지만 그는 결백을 주장하며 사라집니다. 경찰은 휴대전화 발신기록을 통해 그를 찾아냈지만, OJ는 도주를 선택합니다.

그해 6월 17일, LA 고속도로에서 OJ와 경찰의 추격전이 벌어집니다. 그가 탄 흰색 포드 차량을 몇 대의 경찰차가 쫓는 장면은 미 전역에 생방송됩니다.

당시 추격대에 포함된 한 경찰은 이 추격전에 대해 “마치 콘서트 같았다”고 했습니다. 경찰을 포함해 약 15대 가량의 헬리콥터가 상공에서 날아다녔고, LA 시민들은 도망가는 OJ를 응원하는 팻말을 들고 고속도로 이곳저곳에서 나타납니다. 당시 벌어지고 있던 미국프로농구(NBA) 플레이오프 경기는 OJ의 추격전에 전국 생중계 자리에서 밀려나게 됩니다.

OJ는 결국 그 날 저녁 경찰에 자수합니다. 자수 당시 그는 총과 여권, 현금 9000달러와 변장도구 등을 지니고 있었음에도 “도주하지 않았다”고 주장합니다. 검찰이 그를 다음 달 니콜과 론을 살해한 혐의로 기소하며 법정에서의 진실공방이 열립니다.

드러나는 증거, 쏟아지는 보도, 천만불짜리 변호인단...시작된 ‘세기의 재판’
재판장에서의 OJ심슨(오른쪽 두번째)과 그의 변호인단<출처-GettyImages>
“절대적으로 100% 무죄임을 확신합니다.” - OJ 심슨

재판은 이듬해 1월 시작됩니다. 무죄를 주장한 OJ는 호화 변호인단으로 ‘드림팀’을 꾸립니다. 하루 변호사 수임료만 5만달러에 이르렀던 드림팀을 유지하기 위해 그는 자신의 풋볼 기념품을 팔아치워야 할 정도였습니다.

재판에선 OJ에게 불리한 증거들이 쏟아집니다. 그의 자택에 있던 옷가지엔 니콜의 DNA가 섞인 피가 묻어 있었습니다. 사건 현장 인근에 떨어져 있던 피가 묻은 왼쪽 장갑의 짝이 심슨의 자택에서 발견된 것은 결정적이었습니다. 여기에 OJ의 가정폭력 전과도 심증을 굳혔죠.

무엇보다도 언론의 황색 저널리즘 행태는 이미 OJ를 유죄로 단정 지었습니다. 타임지는 표지로 OJ의 ‘머그샷’을 실었는데, 보정을 통해 OJ를 어둡고 음울하게 보이게 만들어 그가 범인이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몇 매체는 사건의 목격자임을 자처한 사람들을 인터뷰했는데, 이들은 언론사로부터 돈을 받고 꾸며낸 말을 한 것이었습니다. CNN은 기자 70명을 파견해 900시간을 이 재판 보도에 할애하기에 이릅니다.

언론이 무리수를 남발했던 것은 그만큼 사건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엄청났기 때문입니다. 왕년의 풋볼레전드이자 TV스타, 피해자인 백인여성과 가해자인 흑인남성, 추격전, 가정폭력 등 키워드 하나하나가 파괴적이었습니다. 미국인들은 재판이 실황중계되는 TV앞을 떠나지 못했습니다. 클린턴 당시 대통령도 재판을 시청하기 위해 백악관 집무실에서 자리를 비우고 비서실에 머무르기도 했습니다. 하루 평균 550만명이 OJ의 재판을 봤고, 선고 장면은 1억5000만명이 지켜봤습니다.

인종차별 승부수와 검찰의 자충수에 뒤집어진 판세
주요 증거로 채택된 장갑과 같은 사이즈의 장갑이 손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OJ심슨. 이 장면은 그의 판결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받습니다. <출처=Makeagif>
“맞지 않는다면, 무죄입니다.” -OJ의 변호사 조니 코크란

그러나 ‘세기의 재판’은 검찰이 바라는대로 흘러가지 않습니다. ‘드림팀’의 현란한 말장난과 경찰의 증거수집 과정에서의 허점이 드러나면서 심슨의 유죄를 지지하는 증거들이 하나씩 논파되고 말죠.

변호인단의 전략중 하나는 이 사건을 ‘인종문제’로 몰고 가는 것이었습니다. 재판은 1992년 ’LA 폭동‘이라는 흑백갈등의 파열음이 미 전역을 뒤흔든 지 몇 년 되지 않아 일어났습니다. 미국인들은 모두 인종문제를 입에 담기 꺼렸고, 문제를 덮기에 급급했죠.

변호인단은 이점을 파고들어 OJ를 백인 경찰들의 부당한 수사로 범인으로 몰린 ’억울한 희생자‘로 바꾸려고 했던 것이죠. 수사의 중추적 역할을 맡았던 경찰 마크 퍼먼이 지독한 인종차별주의자였단 점은 OJ에게 유리하게 돌아갔습니다. 법정에서 틀어진 퍼먼의 평소 대화에선 “LA의 깜둥이들은...모두 벽에 줄을 서서 총을 쏴갈겨야 해”라는 표현이 들어가기도 했습니다. 전략은 잘 먹혀들었습니다. LA 지역지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심슨이 무죄라고 생각하는 비율은 흑인이 백인보다 4배 이상 높았습니다.

변호인단은 수시로 배심원단 교체를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배심원들이 재판 전 언론을 통해 OJ에 대한 좋지 못한 인상을 받아 중립적인 판단을 못한다는 이유였습니다.

결정적인 장면은 증거로 지목된 장갑이었습니다. 검찰은 OJ의 유죄를 드러내기 위해 법정에서 증거물과 같은 크기의 장갑을 착용하도록 주문했습니다. 문제는 이 장갑이 OJ에게는 너무 작았다는 것입니다. OJ는 법정에서 일어나 손을 욱여넣어 찢어질 것만 같은 장갑을 높이 치켜듭니다. 마치 개선장군이 보검을 든 것처럼요.

승기를 잡은 변호인단은 지금까지 회자되는 결정타를 날립니다. “(장갑이 손에) 맞지 않는다면, 무죄를 선고해야 합니다”라고요.

결국 OJ는 무죄를 선고받습니다. 죄를 증명하는 확실한 증거가 없어 ’무죄추정의 원칙‘이 적용된 것입니다. OJ는 선고 직후 주먹을 불끈 쥐며 청중들에게 감사 인사를 연신 날렸습니다.

끝나지 않은 법정 드라마 : 승승장구하는 조연들과 나락으로 떨어진 주연
말년의 OJ심슨. 그는 무장강도 혐의 등으로 교도소에서 복역하는 등 초라한 말년을 보냈습니다. <출처=뉴욕포스트>
“나는 언제나 사랑받고 존경받고 싶었습니다.”- OJ 심슨

무죄를 선고받지만 OJ의 여생은 더욱 험해졌습니다. 피해자들의 가족은 OJ를 상대로 민사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그들의 부당한 사망에 OJ의 책임이 있다는 것이지요. 민사법원은 1997년 OJ가 법적 책임이 있다며 3300만달러를 보상할 것으로 판결했습니다. ‘의심의 여지가 없는 유죄 증명’이 필요한 형사소송과 달리 민사에선 OJ가 살인을 저질렀을 가능성을 높게 본 것이지요.

순식간에 나락으로 떨어진 OJ는 잊을만 하면 뉴스의 사회란을 장식합니다. 2006년엔 자신의 재판을 다룬 자서전을 발간하려했다 유가족의 거센 항의에 취소하기에 이릅니다. 이듬해엔 라스베이거스 카지노에서 스포츠수집가를 납치하고 총구를 겨눠 물품을 강탈해 감옥에 갑니다. 2017년 2월 7년간의 복역 후 가석방으로 자유가 된 OJ는 한 달뒤 호텔 바에서 술 취해 난동을 부려 쫓겨나는 등 정상적인 삶을 이어가지 못합니다. 가끔씩 카메라에 포착된 그는 NFL을 주름잡았던 스타가 아닌 영락없는 노숙자 꼴이었습니다.

OJ 재판을 다뤘던 변호사, 검사, 판사와 증인들은 모두 유명 인사가 됩니다. 현란한 술수로 OJ를 무죄로 만든 변호사들은 대형 사건을 수임하고 사무소를 확장하며 승승장구합니다. 연이은 자충수를 뒀던 검찰 역시 나중에 회고록을 내며 돈방석에 앉습니다. 시청률을 넉넉히 챙긴 언론, 매일 밤 황금시간대 볼거리를 챙겼던 시민들도 잃은 것은 없었습니다. 비참한 말년 끝에 사망한 OJ와 끝내 범인을 찾지 못한 채 억울하게 사망한 피해자들과 유가족만이 이 게임의 ‘패자’였습니다.

<참고문헌과 외신> ◎http://simpson.walraven.org/fhr_tps2.html(캘리포니아 고등법원 기록물) ◎https://www.biography.com/crime/oj-simpson-bronco-chase-car-museum ◎https://www.nbcnews.com/storyline/o-j-20-years-later/o-j-simpsons-bronco-chase-theater-absurd-n129071 ◎https://www.vox.com/culture/24127565/oj-simpson-dead-76-infamous-story-trial-americas-national-sins ◎https://www.latimes.com/archives/la-xpm-1995-08-30-mn-40443-story.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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