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그대로 있어주세요, 커피는 늘 갖다드릴게요

한겨레 2024. 4. 19. 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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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그란의 마음극장 #그레이하운드
애플TV 제공
동그란의 마음극장은?

어떤 영화는 좀처럼 끝나지 않습니다. 내 이야기가 왜 저기 들어 있나 싶은, 나보다 내 마음을 더 잘 드러낸 것 같은, 친구에게 꼭 보라고 얘기해주고 싶은 그런 장면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영화 칼럼니스트 ‘동그란’이 격주로 마음 속에서 재편집되는 대사, 기억의 영사기에서 반복되는 장면을 이야기합니다.

아, 이런. 어떡하죠? 벚꽃이 눈처럼 쏟아져 거리에 나뒹구는 걸 보고서야 알았거든요. 벚꽃이 거기 피어 있었다는 사실을요. 벚꽃과 관련해 내가 했던 중요한 약속의 유효기간이 끝나버렸음을 그제야 깨달았어요.(누군가는 목련과 관련해서 무슨 약속을 했다던데…) 지킬 가치가 있는 것은 그럴 기회를 잃어버린 뒤에야 비로소 존재감을 제대로 느낄 수 있게 돼요. 마음을 제대로 표현할 기회가 있을 때는 전혀 모르다가. 사람은 왜 그렇게도 경솔한 것일까요? 내 경우와는 비교할 수 없는 사례이긴 하나, 어쨌든 느닷없는 상실감에 빠졌을 때, 어떻게 해야 하나 싶을 때, 잊지 않고 언급하고 싶은 영화가 하나 있어요. 군인인 주인공이 대서양 한가운데에서 침통한 표정으로 슬픔을 삼키던 영화 ‘그레이하운드’(아론 슈나이더 감독·2020)예요.

때는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1년. 크리스마스 시즌이었고, 어니스트(톰 행크스)는 샌프란시스코의 어느 호텔에서 한 여인을 기다리고 있어요. 어니스트는 몸담고 있던 미 해군에서 승진도 했고,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러 떠나기 전에 사랑하는 이비(엘리자베스 슈)에게 청혼할 생각에 잔뜩 들떠 있었죠. 그런데 그녀는 상냥하고도 단호하게 거절해요. “상황이 어떤지 알잖아, 함께할 수 있을 때를 기다려보자.”

어니스트는 실망감을 감추고 오히려 그녀를 따뜻하게 위로해요. “항상 당신을 기다릴게. 내가 어디 있든 수천 킬로미터를 떨어져 있어도…. 당신이 모퉁이를 돌아오길 기다릴 거야.”

해군에서 거절 상황에 대비한 대사 훈련이라도 시킨 걸까요? 자기가 듣고 싶은 말을 상대에게 돌려주는 방식으로 이별의 아픔을 소화해내는 어니스트. 상대의 거절에도 불구하고 변치 않는 사랑을 고백하는 그의 마음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죽음이 기다리는 바다로 떠나는 사람의 마지막 고백이 ‘항상 기다리겠다’였다는 걸 생각하면 목울대가 뻐근해집니다. (4월의 그 바다를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공감하는 감각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애플TV 제공

‘그레이하운드’는 수천 명의 군인과 수천 톤의 군사 물자를 실은 37척의 호송 선단을 이끄는 구축함의 이름입니다. 어니스트는 이 배의 함장으로 전투 항공기의 엄호 없이 대서양 한가운데 ‘구덩이’라 불리는 구간을 50시간 내에 통과하라는 임무를 받았죠. 독일군 잠수함 유보트가 곳곳에서 나타나 어뢰를 쏘아대고, 전파방해를 하며 심리전을 가하는 상황을 헤쳐가는 어니스트는 훌륭한 리더로서의 덕목을 유감없이 보여줍니다.

명령이지만 말끝마다 ‘땡큐’를 붙이고, 부하의 작은 기여에도 치하를 잊지 않으며, 하루를 시작하고 닫을 때마다 신께 기도를 올리죠. 부하들 이름을 일일이 기억하고 불러주는 것이 리더에게 얼마나 중요한 자질인지를 보여주는 데 공을 많이 들인 듯한 섬세한 연출이 인상적입니다. 그런데 ‘구덩이’에서의 50시간 동안 어니스트가 가장 많이 언급하는 이름이 ‘조지 클리블랜드’라는 점이 참 특이했어요. 그래서 내게 이 영화는 전쟁영화가 아니라 어니스트가 조지를 애도하는 이야기로 남아 있어요. 조지 클리블랜드(롭 모건)는 늘 함장 곁에 붙어 있는 통신병도 참모도 아닌, 갑판 아래 식당에 근무하는 조리장이었지요.

애플TV 제공

“뜨거운 걸 먹기엔 파도가 좀 높아서 햄스테이크와 달걀을 준비했습니다.” 조지가 음식을 가져오면 어니스트는 일단 기도를 시작합니다. 그러면 조지도 같이 눈을 감고 기도 끝날 때 ‘아멘’을 같이 해요. 하지만 어니스트는 한 입도 먹을 생각이 없어요. “이거면 돼.” 하고 커피잔만 집어들죠. 무시무시하게 춥던 날, 유보트 한 척을 침몰시키고 난 뒤에도 어니스트는 조지가 뒤늦게 가져온 식사를 사양해요. “콘드비프와 양파를 두껍게 썰어서 준비했습니다. 좀 드셔야죠.” “아니야, 콜 중위에게 갖다 줘. 배가 고플 거야.”

그다음날 저녁에도 조지가 왔습니다. “또 식사를 거르셨더군요. 베이컨과 달걀 샌드위치입니다. 아직 따뜻해요. 좋아하시는 복숭아도 찾았습니다. 커피는 계속 갖다 드리겠습니다.” 어니스트는 커피를 계속 갖다주겠다는 말이 제일 반갑습니다. 네 번째 식사 배달을 준비할 때 ‘제네럴 코드’(전 대원 전투 위치 발령을 뜻하는 군사용어)가 발동합니다. 조리장도 식사쟁반을 내려놓고 튀어나가야 하는 상황이죠.

교전이 종료된 뒤 어니스트가 피해 상황을 보고받는데 사망자 명단에 조지의 이름이 있었습니다. 포에 포탄을 장전하다 탄환에 맞아 숨졌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상태가 나빴지? 조지 클리블랜드 말이야.” “완전히 훼손됐죠.” 어떤 위기 상황에도 의연함을 잃지 않던 어니스트의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얼굴 전체로 참혹한 슬픔이 번졌습니다(이런 감정 연기는 대체 어떻게 하는 것일까요!).

조지의 시신을 바다에 묻은 후에도 식사는 날라져 왔어요. 어니스트는 무심코 말했지요. “땡큐, 클리블랜드.” “저는 피츠인데요.” 새 조리사 피츠의 상차림은 조지가 가져다주던 것에 비하면 풍성하고 차림새도 화려했습니다. 하지만 조지의 빈자리는 금세 표가 났죠. 어니스트가 통신병에게 안 하던 부탁을 하게 되었거든요. “커피 좀 가져다 줘.” 조지가 살아있을 때는 할 필요가 없던 말이었습니다.

어니스트는 대체 왜 그랬던 걸까요. 한번쯤은 조지가 챙겨준 음식을 먹어주어도 됐을 텐데 말이에요. 조지의 염려가 얼마나 따뜻한 것이었는지, 어니스트는 그를 잃고 난 뒤에야 벼락처럼 깨닫고 가슴 아파 하지요. 우리가 인생의 가장 험한 구간을 지나갈 때 의지가 되는 것 중 하나는, 누군가 나를 걱정하며 지켜주고 있다는 감각일 거예요. 조지 같은 사람이 늘 곁에 있는 것 같은 느낌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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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니스트에게 그레이하운드에서의 50시간은 이비가 선물해준 가죽 슬리퍼가 피로 얼룩질 정도로 치열한 것이었어요. 빵 한 조각 못 삼킬 만큼 긴장한 상황이 충분히 이해가 되지요. 그런 한편으로 카메라가 좀처럼 들여다보지 않는 갑판 아래 좁은 식당에서 조지도 수많은 병사들의 식사를 대느라고 정신없이 바쁘고 힘들었어요. 그런 와중에도 조지는 어니스트를 생각해 한 접시의 음식을 따로 챙기고 진한 커피를 주전자에 가득 담았어요. 식사 쟁반을 들고 좁다란 계단을 조심조심 오를 때의 조지의 발걸음도 치열하긴 마찬가지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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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척의 함선이 침몰하고 수백 명의 사상자가 났다는 보고를 받았을 때도 흔들리지 않던 어니스트가 조지를 잃었을 때는 부서질 것만 같았습니다. 하지만 어니스트는 오히려 더 힘을 내고 강건해져요. 유보트를 두 척이나 더 격침시키고, 살아남고, 맡은 임무를 완수하지요. 그렇게 힘을 낼 수 있었던 데는 이비를 염려하는 마음도 들어 있었다고 생각해요. 늘 곁에 있다고 생각해온 사람을 한순간에 잃는 상실감을, 이비가 겪는다는 건 어니스트로서는 용납할 수는 없을 테죠. 수천 킬로미터를 떨어져 있을 때도 항상 그녀를 기다리고 있겠다던 그 마음 변치 않음을 스스로 증명하고 싶었던 거라고도 생각해요. 그의 방 문앞에는 ‘YESTERDAY, TODAY, AND FOREVER’(히브리서 13장 8절)를 새긴 팻말이 매달려 있었어요.) 음식에는 관심도 없는 함장에게 계속 따뜻한 음식을 날라다 주던 조지처럼,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에게 한결같은 모습으로 계속 존재해 있는 것이 어쩌면 우리의 삶에서 가장 중요하고 치열한 전투일지 몰라요. 그 사실을 받아들일 때(그 사람은 내 마음 따윈 몰라준다 하더라도)가 우리가 가장 강해질 수 있는 순간일 거예요. 지금 모습 그대로 있어주세요. 나도 최선을 다할게요. 이 영화에 등장하는 유일한 풀 네임 조지 막스 클리블랜드의 이름으로.

영화 칼럼니스트 이하영 ha028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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