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십억 춤추는 경매무대의 지휘자 “돈이 아닌 눈을 본다” [베테랑의 한끗]

박지윤 2024. 4. 19.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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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리업 [베테랑의 한끗] <2>손이천 케이옥션 수석 경매사
편집자주
베.테.랑. ‘어떤 분야에 오랫동안 종사하여 기술이 뛰어나거나 노련한 사람’을 일컫는 말입니다. 무엇이 베테랑을 만들까요? 매일같이 사용하는 도구, 공들여온 시간, 오랫동안 지켜온 루틴이 그의 뒤에 있습니다. 차이는 그 ‘한 끗’에서 결판나지요. 베테랑을 완성시킨 그 한 끗의 디테일을 담습니다.
14년 동안 누적된 낙찰 총액만 약 4,400억 원, 그의 손에 들린 경매봉이 경매판 위에 떨어질 때마다 수억 원이 춤을 춘다. 손이천 케이옥션 수석 경매사를 지난달 20일 서울 강남구 신사동 케이옥션 본사에서 만났다. 매달 열리는 현장 경매날이었다. 이한호 기자

“이우환 작가의 작품 ‘다이얼로그(dialogue)’. 8,600만 원에 시작합니다!”

경매사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공간의 분위기가 바뀐다. 이우환 작가의 작품은 이날 경매 최고의 관심 작품. 30초 만에 작품 가격은 1억 원을 넘어섰다.

경매사의 손끝은 천천히, 끈질기게 두 고객 사이를 오간다. 휴대폰 너머의 전화 응찰자와 온라인 응찰자 사이의 숨 막히는 격돌. 관망하던 응찰자들도 자세를 고쳐 앉는다. 스물네 번의 호가를 거듭한 끝에 가격은 1억1,600만 원을 찍었다. 온라인 응찰 현황이 표시되는 전광판이 더 이상 반응하지 않는다. 경매사가 침착하게 추가 응찰이 없는지 거듭 확인한다.

“1억1,600. 1억1,600. 1억1,600만 원! 238번 전화 손님에게 낙찰되었습니다.”

케이옥션 3월 경매 현장을 꽉 메운 고객들. 경매사의 말, 손짓, 눈빛에 따라 장내 분위기도 너울을 탄다. 이한호 기자

‘땅!’ 경매사가 경매봉을 경쾌하게 내리친다. 지난달 20일 열린 케이옥션 3월 경매에서 처음으로 1억 원을 돌파하는 순간이다. 터져 나온 박수 세례가 한동안 장내를 메웠다. 흐른 시간을 확인해 보니 고작 2분 45초. K팝 한 곡 길이조차 안 되는 시간에 쓰인 아드레날린이 폭발하는 드라마다.

이 현장에서 ‘레디 액션’과 ‘컷, 오케이’를 외치는 감독은 손이천(48) 케이옥션 수석 경매사. 2010년부터 14년 동안 그가 성사시킨 낙찰 총액은 4,400억여 원, 경매봉을 잡은 경매는 104회에 이른다. 베테랑의 한 끗을 찾는 여정의 두 번째 주인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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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테랑의 도구 : ‘올백’ 머리에 하이힐

경매 현장에서 그가 고수하는 스타일이 있다. 머리카락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뒤로 넘겨 올린 ‘올백’에, 하이힐이다. 키가 172cm인 그가 굽이 6㎝인 구두를 신으면 신장은 180㎝에 가까워진다. 경매에 임하는 그의 무기 같은 복장이다.

“제가 14년 동안 고집해 온 스타일이에요. 기억하기론 딱 한 번을 제외하곤, 머리를 모조리 뒤로 넘겨 깨끗하게 묶어버렸죠.”

경매 당일 새벽이면 그는 머리를 깨끗하게 빗어 넘겨 세팅한다. 머리카락이 시야를 가리지 않도록 헤어스프레이로 단단히 고정한다. 그가 경매에 임하는 의식 중 하나다. 박시몬 기자

이유는 단순하다. 경매에 집중하기 위해서. “경매사는 시야가 넓어야 해요. 장내에 있는 모든 손님과 직원을 한눈에 조망하고 있어야 하는데, 머리가 흘러내려 시야라도 가려봐요. 거슬리겠죠. 주의가 분산될 수 있는 요소를 미리 제거해두는 거예요.”

머리는 그렇다 치자. 길면 2시간도 훌쩍 넘기는 경매를 진행하며 하이힐을 신으면 불편하지 않을까. “몸의 긴장도를 유지하려는 노력이죠. 같은 옷을 입어도 신발에 따라 몸의 자세가 달라지잖아요. 높은 구두를 신으면 온몸에 단단한 힘이 들어가죠.”

그가 리허설 도중 발에 쥐가 난 발을 스트레칭하고 있다. 구두를 신으면 등허리에 꼿꼿한 힘이 들어간다. 그 긴장감이 좋아 그는 불편하더라도 하이힐을 고집한다. 이한호 기자

그는 자신의 일을 '지휘'에 빗댄다. 65㎝ 높이의 경매 단상 위에 오르면, 전장을 조망하는 장수처럼 한눈에 판을 읽어내야 한다. 전화로 대리 응찰 중인 직원이 보내는 의미심장한 눈빛, 패들(paddle·경매번호판)을 들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이는 현장 응찰자의 기색, 더 높은 호가를 연달아 물으면 ‘제발 그만해 달라’는 듯 울상이 된 그들의 표정까지… 장내에 모인 100여 명의 사람이 각자의 자리에서 보내는 시그널을 두루 파악해야 한다.

고객의 심리와 취향, 특성을 고려해 전략적으로 응찰을 유도하는 것도 경매사의 몫이다. 표정이나 눈빛을 읽어 ‘응찰 기회를 한 번 더 줘 볼 만하다’라는 생각이 들면 숙고할 시간을 더 주는 식이다. 경험이 만들어낸 ‘감’에 따라 초 단위로 이런 결정을 한다. 경매사들을 ‘0.1초의 승부사’라고 부르는 이유다.

지휘하듯 경매 현장의 리듬이 끊기지 않도록 지휘하는 것도 그의 몫. “경매사의 역량이 바로 거기에 달려있어요. 유찰되는 작품은 고객들이 알아차리기도 전에 감쪽같이 지나가야 해요. 고객들이 ‘안 팔리는 작품이 많네?’라고 느낀다면 경매사의 실수죠.”

전화 응찰자와 현장 응찰자가 계속 경합을 하는데, 전화 응찰자가 시간을 끄는 상황도 있다. “전화 응찰 고객은 현장에 없으니 제가 표정을 읽기가 어려워요. 그렇다고 언제까지 기다려줄 수는 없죠. 그럴 땐 저의 재량으로 현장 응찰 손님에게 낙찰을 선언합니다. 경매는 쇼이기도 해요. 늘어지면 속도감이 떨어지죠.”

경매사의 역량은 그래서 낙찰 결과에도 영향을 미친다. 경매 역사가 280년에 달하는 글로벌 경매회사 소더비(Sotheby's)에 따르면, 경매사의 재량에 따라 낙찰률과 낙찰 금액에서 최대 30%까지 차이가 났다.

경매장은 어수선하다. 전화로 대리 응찰을 하는 직원들의 통화 소리와 현장 고객들의 말소리가 어지럽게 뒤섞인다. 경매사는 그런 상황에서도 좌중을 집중시켜야 한다. 무게감 있는 카리스마가 필요하다. 이한호 기자

14년 경력이 그에게 가르쳐 준 건‘낙찰자만이 경매의 주인공은 아니라는 것’. “응찰했으나 낙찰을 받지 못한 사람을 ‘언더비더(underbidder)’라고 하는데, 그들의 마음을 잘 돌봐줘야 해요. 큰 결심을 감행하며 열심히 따라왔는데 마지막에 미끄러진 거니까 무척 속이 상하거든요.”

그래서 마지막에 그가 언더비더에게 꼭 하는 말이 있다. “양보해 주시면”이다. 언더비더의 자존심을 지켜주면서 감정까지 어루만지는 말이다. 미소도 잊지 않는다. “한쪽의 편에 선다는 느낌이 들지 않도록 하는 게 경매사로서 제가 지키는 예의예요.”

그러니, 그가 경매봉을 내려치는 때는 그 예의를 다했다는 확신이 드는 순간이기도 하다.


베테랑의 루틴 : 14년 차도 매일 연습을 한다

지금이야 국내 톱 미술품 경매사지만, 그의 출발은 남들보다 느렸다. 첫 직장은 소프트웨어 회사였다. 마케팅을 맡아 3년을 겨우 버티다 퇴사했다. ‘하고 싶었던 공부나 해보자’는 마음으로 미술대학원에 들어갔다. 예술기획 전공으로 석사 수료를 하고 보니 서른세 살. 그때 입사한 곳이 케이옥션이었다.

홍보 담당으로 입사했다가 경매사의 길을 걷게 된 건 한마디 덕분이었다. 김순응 전 케이옥션 초대 대표의 말이다. “손이천씨는 목소리가 크고 얼굴이 두꺼워 보여.“ 긴장하지 않을 것 같다는 의미였다. 경매사가 될 자질을 알아본 칭찬이다. 그가 사내에서 치러진 경매사 오디션을 본 계기다. 합격해 데뷔 날을 기다릴 때 김 전 대표는 당부했다.

“경매사에겐 실수가 양해되지 않아. 우린 언제나 ‘처음부터’ 잘해야 하는 사람들이야. 생각해 봐. 맨 앞의 작품이 맨 뒤의 작품보다 덜 중요하지 않잖아. 데뷔도 똑같아. 첫 무대의 첫 작품부터 잘해야 해.”

3월 경매가 끝난 다음 날인 지난달 21일, 손 경매사가 자신의 경매 영상을 모니터링하고 있다. 그는 케이옥션의 최고참 경매사다. 혹독하게 지적해 줄 선배가 없기에 엄격한 '자가 피드백'이 필요하다. 박시몬 기자

그래서다. 그가 연습, 연습, 또 연습하는 건. 너무 뻔해서 식상하게 들리는 이 방법이 지름길이었다. 수백만 원부터 수십억 원대에 이르는 다양한 단위의 숫자를 버벅대지 않고 한 번에 말할 수 있도록 시도 때도 없이 연습했다. 밤중에 자다 깨서도 완벽하게 읊을 수 있는 수준으로. “숫자를 의식해 버리는 순간, 숫자를 말하는 사람 이상이 될 수 없을 것 같았거든요.”

숫자는 경매사에게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다. 경매 시작가부터 호가, 낙찰가까지 숫자는 경매장을 압도하는 언어다. 그 언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도록 연습하는 건 기본.

그렇다고 미술품 경매사를 두고 ‘가격만 잘 읊으면 할 수 있는 일 아니냐’고 생각한다면 오산. “경매사는 작품 정보를 통달한 상태로 경매에 나가야 해요. 단골을 전담하며 작품을 파는 스페셜리스트(영업 직원)들과 여러 차례 회의도 거치죠. 사전 정보도 파악해 둬야 해요. 특정 작품을 두고 경쟁하는 고객은 몇 명인지, 누구인지, 그들의 작품 취향과 구매 이력은 어떠한지, 유찰 가능성이 큰 작품은 무엇인지도 숙지하죠.” 경매장 단상 위의 시간은 60~70분 남짓이지만, 단상 아래에서 하는 일이 훨씬 많다.

'무한 연습'은 경매 단상에 올라가기 직전까지 이어진다. 이한호 기자

경매에서 가장 중요한 건 시작가다. 작품을 경매에 부친 위탁자와 경매팀이 협의해 결정한다. 경매팀에서 시장의 시세와 작가의 명성을 고려해 최초 가격을 제시하면, 위탁 담당 직원이 위탁자와 가격을 협상한다. 유찰될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되면, 경매 직전에 작품을 빼거나 시작가를 낮추기도 한다. 일단 경매가 시작되면, 호가 결정권은 경매사에게 있다. 시장 상황에 따라 200만 원 단위로 시작한 호가를 100만 원 단위로 낮추기도 하고, 경쟁 입찰이 치열해진다 싶으면 500만 원, 1,000만 원, 최대 1억 원 단위로 올리기도 한다.

연차가 쌓이면서 그의 연습 수준도 진보했다. 입으로 내뱉는 언어를 넘어선 몸의 언어로.

“외국 경매사들 영상을 보니, 팔을 넓게 펼치고 그에 따라 몸 역시 자유자재로 움직이더라고요. 훨씬 자신 있어 보였어요. 과하지 않은 선에서 따라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죠. 집에서 거울을 보며 연습했어요. 그런데 거울이 너무 작은 거예요. 제 팔이 긴 편이라 거울에 비치는 범위를 자꾸 벗어났거든요.”

그는 1.5m짜리 전신 거울을 옆으로 눕혀서 눈높이에 맞게 걸었다. 거울을 보며 꼼꼼하게 포즈를 연구했고 연습했다. 손을 내밀었을 때 손가락 끝이 얼마나 벌어져 있는지, 손날을 위로 향하게 들 때와 아래로 향하게 들 때 느낌이 어떻게 다른지, 몸통을 앞으로 숙이면서 다가가면 고객의 눈에는 어떻게 보일지까지. 그렇게 정교하게 만든 제스처가 몸에 완전히 배어들게 맹훈련했다. 마치 ‘자율주행모드’처럼.

경매봉을 잡는 방법부터 손을 뻗는 각도와 모양까지, 그가 하는 제스처는 수정에 수정을 거듭한 결과다. 이한호 기자

숫자 말하기와 제스처가 몸에 배자 시야가 넓어졌다. 경매장의 모든 것이 고해상도로 눈에 들어왔다. 고객들이 패들을 드는 속도, 맨 뒷줄에서 전화 응찰을 받는 직원이 눈짓으로 보내오는 신호까지도 예민하게 감지할 수 있게 됐다.

현장을 완전히 장악할 수 있는 경륜이 쌓인 거죠. 마음의 여유까지 더해지니 비로소 저에게 통제권이 생겼다는 생각이 들어요. 10년을 꾸준히 연습한 결과죠. 그래서 후배들을 만나면 항상 강조해요. ‘남들 앞에 서는 직업이니 멋있어 보이고 싶은 욕심은 누구에게나 있다. 하지만 기본기가 없이 ‘쇼잉’에만 집중하면 실력이 무너질 수밖에 없다’고요.”

요즘 그는 글로벌 경매사들을 벤치마킹하는 ‘응용 연습’에 재미를 붙였다. 소더비의 올리버 바커(Oliver Barker), 헬레나 뉴먼(Helena newman) 같은 경매사의 영상을 모니터링한다. 그들은 고객에게 유머 섞인 농담을 던지고, 무대를 자유자재로 이용한다.

“외국 경매사들은 전화로 대리 응찰을 하는 직원들의 이름을 부르더라고요. ‘맨 뒷줄 제임스의 손님, 얼마’ 이런 식으로요. 그게 인상적이었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한국 경매사들은 전화 손님도 패들 번호로 호명했거든요.”

자신의 현장에도 적용했다. 반응이 좋았다. 전화로 대리 응찰을 맡는 직원들은 “호명당하니 경매에 집중이 잘된다”며 웃었다. 경매 당일에 받은 숫자가 아닌 이름으로 불리는 게 더 직관적이라는 얘기다. 직원들의 효능감도 커졌다. 경매 라이브를 실시간으로 지켜보던 단골 고객들이 “○○씨, 이번 경매에서 활약이 대단했던데?”라며 아는 척을 해온 거다.

그는 올해 2월 경매부터 경매 단상을 15cm가량 높였다. 전후 사진을 비교하면, 작은 변화지만 차이가 확연하다. 케이옥션 제공

올해 2월 경매부터 그는 한 가지 시도를 더 했다. 경매 단상 위에 15㎝짜리 발판을 추가로 만든 거다. 시선이 높아진 덕분에 응찰자들은 그를 더 잘 볼 수 있게 됐고, 그 역시 팔과 몸통을 더 시원시원하게 움직일 수 있게 됐다. “단상을 높이고 나니 예전과 같은 동작을 해도 더 역동적으로 보여요. 경매사의 몸이 더 잘 보이니까요. 작은 디테일이지만, 그 디테일 하나에서 경매사를 바라보는 인상이 달라지죠.”


베테랑의 시간 : 묵묵히 쌓아야 위력을 발휘한다

그의 데뷔 경매를 본 미술계의 원로 신옥진 공간 화랑 대표가 건넨 칭찬을 그는 아직도 잊지 않는다. “손이천의 목소리를 들으면 어쩐지 작품을 꼭 사야 할 것 같아.”

그로부터 14년이 지났다. 현재 국내에 미술품 경매사는 10명 남짓. 그 중 한 명이 될 줄은 그도 몰랐다. MBC ‘무한도전’, ‘나혼자산다’ 등 TV 예능에 출연하면서 ’손이천처럼 되고 싶다’며 케이옥션을 찾는 지원자도 많다. 후배들은 그에게 종종 묻는다. “어떻게 하면 선배처럼 될 수 있어요? 빨리 노력해서, 빨리 목표를 이루고 싶어요.” 그의 답은 이렇다. “마음 급히 먹지 말고 길게 봐라.”

애석하게도 그런 조언을 듣는 후배들은 거의 없다. 대부분 2, 3년도 안 돼 회사를 그만두기 일쑤였다.

경매 리허설에서 손 경매사(오른쪽)가 후배인 양승아 경매사에게 피드백을 건네고 있다. 박시몬 기자

-환상이 컸던 만큼 실망도 컸던 걸까요.

“저를 보고 이 회사에 들어온 친구들은 화려한 일면만 본 거예요. 근데 막상 회사에 들어와서 어떻게 일하나 봤더니 너무 ‘개미’ 같은 거죠. 하찮아 보이는 일, 폼 안 나는 일이 많고요. ‘나는 이런 일을 하러 여기에 들어온 게 아닌데…’라고 생각했을지 모르죠.”

경매 단상에 올라가는 날을 빼면, 실제 그의 일상은 근사할 게 없다. 그렇게 묵묵히 일한 지 10년쯤 됐을 때 비로소 '시간의 존재감'이 보이기 시작했다. 하찮은 일도 마다하지 않으며 쌓은 시간의 힘을 그제야 알았다.

경매가 없는 날, 화려한 화장을 벗은 그의 모습. 그는 케이옥션 내에서 홍보이사를 겸하고 있다. 박시몬 기자

-당신에게 시간은 어떤 의미인가요?

“제대로 쌓여야 위력을 발휘하는 것. 요즘엔 이런 생각을 자주 해요. ‘빨리 가려고 하면 반드시 놓치는 게 있었겠구나. 나는 빨리 가려고 하지 않아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구나.’”

어차피 시작점이 남들보다 한참 늦었기 때문에 그에겐 빠르게 가는 것이 중요하지 않았다. 그만큼 시간에 무던해지기로 했다. 맡은 바, 부끄럽지 않게 묵묵히 해내는 1인분의 일꾼. 그가 밟아온 길이다. 그는 말한다. “무던함이야말로 내가 가진 힘 중 가장 강한 힘이에요.” 촌각을 다투는 경매 단상 위에서도 예민하게 휩쓸리지 않고 침착함을 발휘할 수 있는 것도 이 ‘무던함’ 덕이다.

시간 앞에 무던할 줄 아는 사람에게도 ‘버틴다’는 건 쉽지 않은 일. 그를 버티게 한 힘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다양한 조직에서 최초·최연소 여성 임원을 했던 최명화씨가 쓴 책 ‘PLAN Z(플랜 제트)’에 나오는 말을 읊었다. ‘경기장에 남아 있자, 젖은 낙엽처럼.’

2010년 데뷔 경매부터 2024년 3월 경매까지 그는 케이옥션에 열린 104번의 경매를 모두 지휘했다. 무대에 올라갈 땐 그 흔한 감기 한 번 걸린 적이 없었다. 케이옥션 제공

“직장 생활이란 게 언제나 성공 가도만을 달릴 수는 없거든요. 미술계에 들어온 지 15년째인데, 이 시장도 그래요. 호황인 시기가 있으면 반드시 어려운 시기가 와요. 제 경력도 그랬어요. 뭘 해도 안 되는 시기가 있었죠. 그때 결심했어요. ‘그래, 젖은 낙엽처럼 일단 붙어 있기만 하자. 어떤 모습으로든 이 판에 남아 있어야 다른 기회도 올 테니까. 그러다 보면 언젠가 다시 나가 뛸 수 있는 기회도 주어지겠지.’”

그 다짐은 그를 ‘성실한 개근자’로 만들었다. 주전이 아닐 때도, 벤치만을 지킬 때도 견디다 보니 알게 됐다. 한 번 반짝 잘해서 주목받는 것보다 매일 꾸준히 해내기가 훨씬 어렵다는 사실을.


베테랑의 한 끗 : “나는 상대의 눈을 보는 경매사”

-당신을 베테랑으로 만든 ‘한 끗’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경매 단상에 올라가면 반드시 모두의 눈을 본다는 거예요.”

-어떤 의미인가요.

교감이죠. 흔히 경매사는 자신을 경매라는 쇼의 주인공이라고 생각하기 쉬워요. 제 생각은 달라요. 경매사는 경매를 컨트롤하는 사람일 뿐 주인공은 아니죠. 나 혼자 하는 일이 아니라는 걸 깨달아야 타인이 보여요.”

“혼자 하는 일이 아니다." 그가 매일 떠올리는 말이다. 언제나 다짐한다.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일하면 최소한 실수는 없다”고. 이한호 기자

-교감을 어떻게 하나요.

“저는 경매장에서 눈으로 많은 이야기를 건네요. 응찰에 실패한 고객에게 ‘아쉬우시죠?’라는 말을 제 입 밖으로 낼 수는 없어요. 하지만 눈으로는 말할 수 있죠. ‘내가 저 자리에 앉아있는 손님이면 어떤 마음일까?’, ‘저기서 전화받고 있는 직원이라면 어떨까?’ 고민하면서 계속 눈으로 말을 걸어요. 그러다 보면 저절로 마중 나가듯 몸이 앞으로 기울어요.”

마지막으로 물었다. 경매사로 15년째, 그가 좋아한다는 소더비의 경매사 헬레나 뉴먼처럼 50대에도 여전히 이 일을 하고 있을 것 같은지. 우리나라엔 아직 그 같은 시니어 경매사가 없다.

“단순히 ‘오래 한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써주길 바라는 마음은 없어요. 제가 이 자리에서 계속할 수 있다면 참 행운이겠지만 ‘10년 후에도 반드시 이 일을 해야겠다’ 하는 다짐은 없어요. 제 커리어엔 계획이란 게 없었어요. ‘뭔가가 되겠다’라든지 ‘뭔가를 해내겠다’고 생각하고 실천에 옮긴 게 없거든요. 그래서 누군가 ‘너의 미래는 어떨 거 같아?’라고 물으면 저는 언제나 ‘모르겠다’고 대답해요. 살아보니 인생은 별로 내 뜻대로 안 되더군요. 그러니 눈앞에 있는 걸 열심히 하는 수밖에요.(웃음)”

‘그저 내게 주어진 매일매일을 단단히 살아내겠다’는 정석의 성실함이야말로 베테랑 손이천의 한 끗이 아닐까.

크리스천인 그는 매일 신에게 기도를 올린다. ‘잘하게 해달라’고 하지는 않는다. ‘그저 내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게 해달라’고 할 뿐. 이한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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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 박지윤 기자 luce_jyun@hankookilbo.com
사진 이한호 기자 han@hankookilbo.com
사진 박시몬 기자 sim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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